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1967년 6월 우여곡절 끝에 종합제철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자 건설부는 곧바로 포항공사사무소 설치에 들어갔다. 당시 영일군 내무과에 근무했던 필자는 포항공사사무소를 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기공식 준비, 편입지역 토지보상 관련 조례안 입안 등 포항제철소 건설에 따른 민감하고 까다로운 건설부 업무들을 지원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종합제철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된 후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부지조성 사업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편입지주들의 반발과 저항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철소 편입부지들은 입지발표와 함께 지가가 치솟아 부지매입을 위한 지가산정과 예산확보에 많은 애를 먹었다.
그래서 경북도에서는 `애향심운동`이라는 캠페인까지 전개하면서 편입지주들에게 입지선정 이전의 가격으로 매수에 응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300여만 평에 달하는 사유지 편입지주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철소 대상부지는 총 350여만 평이었는데, 이중 국유지는 50여만 평에 불과했다. 경북도청 건설국장과 지역개발과장, 영일군수, 조흥은행 포항지점장, 주민 대표 2명 등으로 구성된 토지보상심의위원회는 편입부지 보상금으로 평당 398원78전을 제시했다.
이 보상금은 당시의 시세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제철소 입지 인근 땅값은 정부 발표 후 급등했다. 발표 이전에 비해 무려 5~10배 인상된 곳도 수두룩했다. 보상금은 발표전이 아니라 원만한 수용을 위해 급등한 시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럼에도 일부지주들은 이에 불복하여 중앙과 지방의 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신청을 내었고, 심지어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였다. 하지만 모두 패소하여 4~5년 후에 매수 당시의 보상금을 받게 되어 도리어 손해를 봤다.
편입지역에 대한 매수가 일단락되고 본격적인 부지조성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부지 내 지장물 철거와 주민이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발목이 잡혔다. 당시 편입지역 내에는 대송면에서 가장 큰 부락이었던 동촌동에 300여 가구가 살았고, 지금의 제3고로가 들어선 곳에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던 예수성심수녀회 수녀원과 송정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포항시내로부터 형산다리를 건너 강변도로로 들어가는 입구, 송내동에도 가옥 등 철거대상 지장물이 총 533건에 달했다.
특히 신부 2명과 수녀 160여 명을 비롯하여 노인, 고아, 일반 직원 등 모두 700여명의 가족을 거느린 수녀원 측의 저항이 강했다. 이들은 청와대까지 찾아가 토지수용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일은 사안이 워낙 민감, 영일군과 경북도, 정부등이 나서 이들을 차분히 설득했다. 제철소는 나라의 장래가 걸려있는 사업이라는 끈질기게 이해를 구하자 마침내 수녀원 측도 정부 입장을 받아들였다.
영일군청은 당시 제철소 부지 수용이 가장 큰 현안이다보니 군정을 집중, 편입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그 결과, 대부분은 정들었던 고향 땅을 뒤로하고 포항 시내와 오천 등지로 뿔뿔이 이주해 갔다. 그러나 이들 중 107세대 주민들은 이주를 거부했다.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며 연일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괴동동 일대 소나무 숲에는 2천230여기에 달하는 대규모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다수의 주민들이 이장을 거부하면서 그야말로 큰 곤혹을 치뤘다. 영일군은 반발과 저항이 거센 대상은 어쩔 수 없이 강제철거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시행했다. 이후 지지부진하던 부지조성사업도 탄력을 받아 그해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리고 1967년 10월 30일 마침내 영일군 대송면 현지에서 포항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을 가졌다. 부지 발표 후 착공까지 걸린 시간이래야 불과 4개월여였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주민들이 포항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양보해줬기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기에 가능했다.
기공식에는 당시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하여 김윤기 건설부장관, 김인 경북지사 등이 참석했으며 인근의 수많은 주민들도 함께 했다. 도약하는 포항과 종합제철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벌였던 흥겨운 농악놀이와 가장행렬 등 그날의 장면은 아직도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