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연일과 흥해는 미곡생산지로, 청하는 군영지로, 장기는 유배지로 모두 현청이 소재했던 고을이었다. 단일지역에서 4명의 현감이 있었던 고장은 아마 포항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포항은 당시 단일지역에서 전국적인 특산품을 6가지나 생산한 유일한 곳이다. 쌀과 해산물, 도자기, 삼베·모시, 천일염, 그리고 철이 그것이었다.
세계에서 젓가락 문화가 발달한 지역은 한·중·일, 즉 동북아 3국이다. 이중 중국은 대나무 젓가락을, 일본은 일반나무 젓가락을, 한국은 유독 신라 때부터 쇠 젓가락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포항에서 철이 생산된 것과 무관치 않다.
포항은 고대로부터 철의 생산지였고, 그 중심지는 신광 비학산 일대였다. 기계천과 형산강 등의 사철을 녹여 철을 생산하였는데, 지금도 이 일대에는 철을 생산했던 고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신광(神光)은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지명을 쓴다. 신라 때 임금이 이곳을 지나는데 고로에서 피어나는 불을 보고는 그 불의 출처에 대해 묻고는 `귀신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신광`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조선조 천문과 지리 등을 담당했던 관상감(觀象監) 이성지(李聖智)가 연일현감으로 있던 처남에게 둘렀다가 이 지역 바닷가 지형을 살펴보고는 `竹生魚龍砂 可活萬人地 西器東遷來 回首無望砂 어릿불에 대나무가 솟아나니 가히 많은 사람을 살릴 땅이다. 서양기물이 동쪽으로 옮겨와서 머리를 돌려보니 모래가 없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처음엔 그 말뜻을 짐작하지 못했지만 종합제철소가 세위지면서 이성지의 예언이 적중,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돌아보면 포항에 종합제철소가 입지하게 된 것(배경은 다음 기회에 기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포항은 신라 때부터 철 생산 중심지로 찬란했던 신라의 천년문화를 지탱했던 기운이 있었고, 여기에 풍부한 먹거리와 오천공항 등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견인한 철강 산업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정부는 1965년 혁명후 바탕이 됐던 `재건국민운동`을 해산하면서 지방정부를 추스리기 위해 전국 각 시군에 농업직 7급 2명의 자리를 배정하는 선심을 썼다. 당시 9급이었던 나는 영일군청 직원중 유일한 대학출신이라는 이력으로 인해 승진시험을 칠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합격했다. 두 단계나 뛰었으니 파격적 대우였다. 이후 행정계로 옮겼고, 1967년 종합제철소 입지가 포항으로 결정되면서 필자에게 이와 관련된 대외업무를 담당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고향에 산업 핵심 시설이 들어온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종합제철소와 깊은 인연을 쌓으며 열심히 일했다. 아마도 필자가 9급에서 출발하여 공무원 최고봉인 1급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9급에서 시험을 거쳐 두 단계 뛴 것과 포항제철을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지금도 생각한다.
종합제철소에 편입된 부지는 영일군 대송과 오천의 일부로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영일만에 접해 있었다. 당시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기에 종합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항시내와 오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철소 편입 지역은 당시 형산강과 냉천 하구의 퇴적층이 매우 발달했고, 일대 해변은 강 하구의 퇴사와 파도의 영향을 받아 은빛 백사장이 눈부시게 펼쳐진 그야말로 명사십리였다. 바닷가 송정동과 도로변 송내동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사장을 따라 울창한 해송들이 즐비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했으며 당시 최고의 어부림으로 손꼽혔다. 어부림은 물고기 떼를 끌어 들이기 위하여 간만의 차가 적은 바닷가 등지에 나무를 심어 이룬 숲을 말하는데 그만큼 고기가 많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울창한 해송과 송도~도구를 연결했던 명사십리 백사장에 노닐던 바닷새들의 군락 또한 장관이었다. 특히 몸놀림이 빨랐던 아이들은 하루에 수백 마리를 잡아 인근의 포장마차 등에 팔아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해수욕장으로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용이한 접근성과 완만한 해저경사, 해송 같이 쉴 수 있는 환경, 민물, 일조량, 그리고 풍부한 먹을거리 등이 필수적인데, 포항 송도와 형산강하구, 도구를 잇는 해수욕장은 이를 충족시킨 최고의 해수욕장이었다.
아직도 그 울창했던 송림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당시 종합제철소 입지선정을 주도했던 건설부 인사들도 그 해송을 오랫동안 기억했고, 그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사실 종합제철소 부지로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혜의 자연경관이었던 것이다. 포항은 종합제철소를 얻은 대신에 천혜의 자연을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포항제철이 들어오기 전 그 아름답고 멋졌던 풍광을 기억하는 포항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