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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처럼 먼지처럼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8-11 02:01 게재일 2014-08-1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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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거울, 내가 지닌 프리즘, 내가 가진 가늠자를 통해서 본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특별하거나 누적된 경험은 그것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를 남기고, 그 이미지는 특정 대상에 대한 하나의 범주를 가능케 한다. 관찰자의 눈은 축적된 여러 경험의 씨날줄들을 엮어 그 사람은 참 착해,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이런 심상의 카테고리들로 대상을 범주화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예를 들어 유도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그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무에 대해 축적해온 자신만의 이미지 때문이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티셔츠에 그 꽃무늬가 등장했고, 한 때 근무했던 분위기 좋았던 사무실 복도에 그 화분이 있기도 했으며, 추억 속 방죽의 가로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거지 그 꽃 자체와 호불호는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한데 그 유도화 가지에 독성분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일지라도 -를 얻은 뒤로 그는 유도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게 된다. 긍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 부정의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게 될 때 관찰자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 `믿음`이라는 환상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당하는 정서적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환상에 가까운 긍정의 편견을 그 대상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또 다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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