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정도전`서 처세의 갑, 하륜역 맡은 이광기
하지만 사극에서는 그리 조명받지 못해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변화무쌍했던 여말선초에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 줄줄이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격변기에 70세 가까이 천수를 누렸던 점 또한 하륜의 `처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 권력의 옆에 있었으면서도 정도전처럼 부러지지도, 정몽주처럼 쓰러지지도 않고 69세까지 잘 살다가 죽은 하륜은 그래서 사실은 왕이 부럽지 않았을 것 같다.
29일 밤 막을 내린 KBS 1TV `정도전`에서 하륜을 연기한 이광기(45)를 전날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방영 내내 화제를 모았던 `정도전`은 후반부 하륜에게 힘을 실어주며 이광기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용의 눈물` 때 임혁 선배님이 연기하신 걸 보긴 했지만 사실 하륜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몰랐어요. 이번에 배역을 맡아 공부를 하다보니 하륜이야말로 `처세의 갑`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정도전이 조선을 끌고 갔다면 하륜은 조선을 밀고 가는 인물이었다는 설명도 있더라고요. 다만 정도전이 대나무처럼 부러지지 않은 성격에 리더십 있는 인물이었다면, 하륜은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가를 잘 아는 인물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 당시 천수를 누렸고요.”
이광기는 “솔직히 초반에는 비중이 적어서 속을 끓이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극초반 하륜은 야심만만하게 권력의 주변을 맴돌긴 하지만 그에게 이렇다 할 역할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광기는 짧은 등장에도 여운을 남기는 인상적인 연기로 매번 훗날의 하륜을 기대하게 했다.
“하륜은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는 과정에서 힘을 발휘하는데 이방원 이야기가 너무 늦게 시작된 감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하륜은 초반에는 뭐좀 하려고 하면 유배를 가거나, 한마디 하고는 사라지는 식이었죠.(웃음) 그래서 좀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알려줘 `정도전`의 인터넷 갤러리에 들어가보니까 하륜에 대한 반응이 좋더라고요. 한번 나와도 눈빛 하나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반응이 많아서 힘을 얻었습니다.(웃음)”
이인임(박영규 분)의 처조카로 정계에 입문한 하륜은 이방원(안재모)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저돌적인 추진력을 발휘한다. 50부작인 `정도전`에서 하륜은 40부부터 치고 나온다. 이방원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정도전을 제거하는 것이 하륜의 1차 목표.
“정도전이 있었기에 하륜이 칼을 갈고 지략을 세우고 정치적으로 단단해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라이벌이 있었기에 자극이 됐던 것이죠. 사실 하륜은 처음에는 정도전을 사형으로 모시며 존경했어요. 하지만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변해가는 보면서 실망하고, 정도전이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태클을 거니까 그를 적대시하고 제거하려고 한거죠. 그때부터 이방원에게 끊임없이 정도전을 제거하라고 얘기하게 되죠.”
이광기는 “하륜은 공부할수록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하륜은 관상과 풍수를 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진 인물이에요. 머리가 뛰어나죠.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절대 1등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아는 거죠. 그래서 시청자들도 그런 하륜의 모습을 보면서 친숙함 같은 것을 느낀 것 같아요.”
한동안 교양·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주력하던 이광기는 `정도전`을 기점으로 다시 연기에 대한 욕심을 불태우려 한다.
그는 “`정도전`은 다시 나를 연기로 돌아오게 한 고마운 작품”이라며 “한동안은 사극을 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떤 작품이든 내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