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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량의 철학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6-26 02:01 게재일 2014-06-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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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예교실에서였다. 연세 지긋한 한 분이 밤새 써온 글을 발표하신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잘 보이던 젊은 한 때, 좋아했던 여성분이 선물해준 책 한 권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밤에 쓴 인생론`이란 책인데, 그 안에 나오는 어떤 한 장면이 평생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 장면을 생각하노라면 자연스레 책을 선물해준 여성분도 연상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애틋해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요량의 철학`이란 소제목이 달린 부분이 재미난 한 장면인데, 식모 `요량댁`은 요량이란 말을 요량 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다.

어린 딸을 잃은 아픔을 누군가 위로할라 치면 “시집 간 요량하지요.”라고 너스레를 떤다거나, 돈지갑을 잃어버렸을 때에도“약값으로 쓴 요량하지요.“ 라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아픔이나 슬픔을 체념이나 달관의 경지로 승화시킬 줄 아는, 털털한듯하지만 강단 있는 요량댁의 좋은 이미지를 글쓴이는 평생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책을 선물해준, 고왔을 그 여자분에게서도 요량댁과 비슷한 인생관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낭독하던 봉사자 한 분이 그 책을 녹음해드리겠다고 자청하신다. 녹음도서가 완성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겠지만 기꺼운 목소리로 봉사하시겠단다. 그것이 지난 주 일이었다. 오늘 문예교실에 글쓴이는 예의 그 수필집을 들고 오셨다. 녹음해 주시겠다던 봉사자의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 말에 출간된 책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편집된 데다 글자 크기도 겨우 8포인트를 넘길 정도였다. 유행 지난데다 조악해 보이기까지 한 책인데 들여다보자니 까닭모를 뭉클함이 몰려왔다. 그새 나도 요량의 철학에 감염되었나 보다. 일상의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이제 “냉수 목욕한 요량하지요.”라며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으려나. 나아가 젊은 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 그 섬세한 떨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려나.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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