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마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 여자도 남자를 사랑했는지 남자는 확신할 수 없었다. 모호한 태도에 질려 헤어지게 되었다. 얼마 뒤 데미안 같은 친구가 그 여자와 사귄다고 편지로 알려왔다. 그래도 되냐는 친구의 자문에 남자는 자신에겐 지난 일이니 괜찮다고, 대신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선에서 답을 보냈다. 얼마 뒤 친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친구의 사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십 년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편지 한 통을 건네받는다. 젊은 시절 친구와 여자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였다. 남자가 기억하는 내용은 위에서 말한 `사귀어도 상관없고, 조심만 하면 될 것`이라는 정도의 상식적이고 건전한 수위였다. 하지만 편지를 읽은 남자는 충격에 휩싸였다. 잊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운명적인 사건들은 이어진다. 편지 내용은 스포일러가 되니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편지 하나로 다음과 같은 통찰에 이르게 된다는 건 말하련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며, 조작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조각난 것인지를.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시간이 더해지면서 그 기억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되는지를. 그런 사실과 편지 내용은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 나온다. 작가 줄리언 반즈가 안내하는 명제는 이렇다. `역사란 불확실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확신`이라고. 승자도 패자도 아닌 찌질한 주인공 남자 그가 바로 우리 개인 역사를 이루는 자화상임을 환기시킨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