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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도 연민도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2-25 02:01 게재일 2014-02-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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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구나 상처 받고 상처 준다. 같은 농도로 주고받는 상처이건만 희한하게도 내가 받은 상처가 진해 보인다. 온통 상처 받은 영혼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책도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들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상처 준 사람을 직접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책(이런 게 있을까만)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상처는 주는 것일 때보다 받는 입장일 때 훨씬 상처 본연의 속성에 가깝다.

개인이나 집단의 갈등이 생긴다. 잘못을 저지른 이와 피해자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변명을 찾기 바쁘다.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 피해자인 자신에게 할당될 작은 책임조차 면하려면 어쩔 수 없다.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그때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책임을 덜어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당하는 입장일 때는 일이 일어난 여러 정황들에 대해서는 빼는 대신 상대가 어떻게 나를 자극하고 해를 가했는지에 집중한다. 한마디로 자기 유리한 것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당사자 간에 일어난 일은 두 쪽 다 들어봐야 안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자기애` 때문에 일어난다. 위대한 성인군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비교적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 올곧고 성실한 쪽에 내가 있고, 그릇되고 거짓을 일삼는 편은 상대방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행위를 한 사람이나 인류를 파멸로 이끈 독재자들조차도 자신을 위한 변명은 마련한다.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지 않는가.

나약한 인간은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익숙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는 선, 너는 악의 구도가 자리 잡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곧장 성립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언행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선, 온전하게 피해자이거나 완벽하게 가해자인 일상은 없다. 변명도 연민도 한 몸에서 나온다.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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