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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읊는 재미

김살로메(소설가)
등록일 2014-01-09 02:01 게재일 2014-01-0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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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을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김살로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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