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