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산업대전 공로상 수상자 인터뷰<BR> 포항제철소 입지선정 주역 류호문 前 건설부 산업입지국장
“4년만에 포항을 찾았는데,
올 때마다 자꾸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마치 고향에 온 것 처럼 푸근합니다”
2013 포항철강산업대전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류호문(81·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회장은
포항의 변화된 모습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선 포스코의
자랑스러움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영일만을 포항제철소 입지로 선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이다.
허허벌판이었던 영일만 모래사장을
오늘날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로 성장하는데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5일 포항 영일대에서 만난 그는
포항제철소 입지선정과정에서의 겪었던
숱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 300만평 모래사장 가진 영일만은 축복받은 곳1967년 일관제철소 건설계획이 구체화되자 정치권 실세들이 연고지 쪽으로 유치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여러 통로로 압력을 행사했어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충남 비인, 이후락 비서실장은 경남 울산을, 김윤기 건설부장관은 전남 보성을, 백진기 건설부 국장은 경북 칠포를 각각 후보지로 내세웠죠. 그리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에서는 삼천포를 적지로 지목했어요. 그때 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올바른 입지선정에만 매달려야겠다고 결심했죠.
또 대형 선박을 접안할 수 있는 항만기능, 적절한 면적(약 300만 평 기준), 견고한 지질, 공업용수 확보, 후방 교통여건 등의 기준을 마련하고 전국을 돌아보았지만, 그런 기준을 충족시킬 곳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홋카이도의 도마코마이, 도쿄(東京)만과 오사카만에 있는 가와사키제철과 일본강관, 규슈의 야하다(八幡)제철소에 이르는 수많은 제철소를 살펴보며 참고했죠. 국내로 돌아와 동해안 묵호항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남해안, 서해안 전역을 훑어가며 적소 찾기에 나섰죠.
당시 전국 해안선을 두루 답사했는데도 그때는 일본과 같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KISA의 총괄회원사였던 미국 코퍼스의 존스(Jones)씨가 경북 칠포에 같이 가보자고 제안을 했죠. 이미 가본 곳이라 가고 싶지 않았지만 존스씨는 정부가 추천한 곳이니 한반 가봐야 한다고 부추겼죠.
일정을 줄이기 위해 4인승 세스나 비행기를 빌려 타고 포항 해병대 비행장에 내린 후 택시를 이용하는 일정이었는데, 포항 상공에서 지금의 포항제철소 자리를 내려다보는 순간 아!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딱 맘에 들었어요. 지금와서 느끼지만 포항은 축복받은 땅이고, 이것이 바로 신의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991만7천355㎡(약 300만 평)가량의 모래사장이 소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시가지와의 거리도 적당한 데다 해안이 만(灣)으로 돼 있어 항만입지 또한 최적이었죠.
아름다운 소나무숲이 아깝기는 했지만 국가적 대업을 위해서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돌아오자마자 백진기 국장을 찾아가 포항에 적소를 발견했다고 보고했죠. 하지만 백 국장은 “거기는 모래사장인데, 예부터 사상누각(沙上閣)이라는 말이 있는데 되겠느냐”며 심하게 반대했죠. 모래 기반이 우수한 기반이라는 것은 지질공학에 있어 상식인데도 말이죠.
포항 영일만을 선정하기까지 난관이 무척 많았죠. 전남 보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김윤기 건설부장관은 다시금 보성을 넣어 재검토하라며 용역조사를 지시했죠. 아무리 확신이 있다 해도 위의 지시로 발주한 용역조사의 대상 안에 국장이 사상누각 운운하며 반대하는 포항을 포함시킬 수는 없었죠. 그러나 일은 묘하게 흘렀죠. 당시 국내 토목기술용역사는 한국종합기술공사 하나뿐이었는데, 이름만 용역사이지 제대로 기술인력을 갖추지 못했고 당연히 용역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어요. 그때 용역 계약은 했으나 수행할 능력이 없었던 기술공사가 나보고 일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 순간 아, `포항을 대상에 포함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을 맡았죠.
외부에는 일체 알리지 않고 각 전문분야의 후배를 동원해 사무실 인근 여관방에서 보름동안 작업했죠. 그리고 최종 용역보고서를 인쇄했죠. 마침 그때 청와대에서 제철입지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보고서를 본 김 장관은 노발대발했죠. 자신이 밀었던 보성이 탈락하고 당초 용역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포항으로 결론이 났으니 당연했죠. 그러나 보고서를 고쳐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 보고서가 그대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됐어요. 보고서를 본 박 대통령께서는 “거 잘됐군, 이대로 하게”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신 거죠. 그렇게 해서 제철소가 포항으로 결정됐죠. 결국 일은 잘됐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백 국장은 옷을 벗고 말았죠.
“ 우여곡절 많던 제2제철 선정도 엎치락 뒤치락1973년 당시 제2제철 부지선정을 놓고 6년을 끌었죠. 제가 추천한 곳은 전남 광양만과 충남 아산만이었는데, 이 두 곳은 낙동강 하구나 대호지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 었어요. 하지만 당시 정부는 6개의 전략사업과 입지를 선정하면서 제2제철의 입지를 낙동강 하구로 결정, 공포했어요.
뒤늦게 알게 돼 오원철 당시 제2경제수석을 찾아가 왜 낙동강 하구가 부적합한지를 설명했죠. 낙동강 하구는 홍수 때마다 토사가 흘러내려와 수심 유지가 안 되고, 만이 아니어서 태평양의 파도를 그대로 받기 때문에 아예 항구를 만들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죠. 게다가 연약지반이라 제철공장과 같은 중공업시설은 불가능하고, 더욱이 부산시민의 식수 확보도 어려운 판에 공업용수를 어디서 구하느냐고 따졌어요.
하지만 오 수석은 “이미 대통령의 재가가 나고 신문에 공포까지 했는데 이제와서 무슨 소리하느냐, 어떻게든 해내야 된다”며 호통을 쳤죠. 오 수석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장예준 당시 건설부장관에게 이 사실을 알려 대통령께 보고하도록 했죠. 장관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다시 오 수석을 불러, 낙동강 하구 외에 다른 곳의 가능성도 조사해 보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죠. 오 수석이 잔뜩 화가난 채 저를 보고 제철입지로서 적당한 다른 곳이 어디냐고 묻기에 아산만과 광양만 두 곳뿐이라고 했죠. 그래서 이 두 곳과 낙동강 하구를 포함한 세 곳의 지질조사를 시작하게 됐죠.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유에스스틸에 용역을 주었는데 평가가 아산만, 광양만, 낙동강 하구 순으로 나온거죠. 낙동강 하구는 불가한 지역이라고 평가된거죠. 오 수석은 입장이 난처했는지 이번에는 현대건설에 낙동강 하구에 대해 별도로 평가용역을 주더군요. 당시 현대건설에는 입지선정 용역기능이 없었는데도 말이죠. 당시 현대건설의 용역 보고서는 짐작했던 대로 낙동강하구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죠.
현대그룹이 제철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보고서를 무리하게 작성했고, 내용이 모순투성이어서 검수를 거부했죠. 그러던 어느 날 오 수석이 이번에는 느닷없이 포항 북쪽에 있는 영해지구를 후보지로 들고 나오더군요. 낙동강 하구가 아닌 아산만이나 광양만으로 결정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본거죠. 당시 제철업 진출이 염원이었던 현대는 영해에 병원(현 영덕아산병원)까지 세우면서 대항했지만, 항만·용수·제품수송로의 중복 등 모든 면에서 영해가 제철소 입지로 부적합 했죠.
이날 동행하면서 박 대통령은 박태준 사장에게 “어차피 제2제철도 자네가 맡아 해야 할 것이니 입지선정도 자네가 알아서 하게”라고 지시했었죠. 그날부로 결정권이 박태준 사장에게 넘어갔죠. 오 수석이 6년이나 넘게 결정을 못 보니 대통령께서 박 사장에게 넘긴거죠. 그때 이미 포스코에서 제2제철 입지를 아산만으로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건설부로 보내온 상태라 내심으로는 안심했어요. 그런데 반년쯤 후에 포철에 근무하던 후배가 찾아와서 “큰일났다, 아산이 아니고 대호지구로 결정됐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지요.
“ 박 대통령 서거 후 결국 광양으로 바꿔네덜란드의 네데코사, 일본 항만컨설턴트, 가와사키제철 등 세 군데의 용역업체 가운데 두 군데서 대호지구를 추천했었죠. 곧바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다음날 만나 그동안의 상황을 소상히 얘기했죠. 김 부장은 편지를 쓰면 그 것을 대통령께 전해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날 밤새 편지를 작성해 이튿날 아침 일찍 김 부장을 통해 대통령께 전달했죠. 일종의 상소문이었죠.
김재규 부장은 나의 중학교 선생님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었죠. 묘한 인연이지요. 바로 그날 아침 10시께 청와대에서 즉각 장관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다음 날 고재일 건설부장관과 같이 청와대 회의실에 들어서니 신현확 부총리, 오원철 경제수석, 최각규 상공부장관, 박태준 포철 사장과 정명식 건설본부장 등이 앉아 있었죠.
박태준 사장은 보고를 통해 대호지구, 아산만, 가로림만 순으로 용역 결과가 나왔다면서 대호지구로의 결단을 대통령께 요청했다. 대통령이 좌중의 의견을 묻자 모두들 `이견 없다`고 했었죠. 이때 건설부장관이 나에게 설명할 기회를 줬어요. 차근차근 설명했죠. 항만·용수·지질 등 제철소 입지조건들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대호지구의 부적절성과 아산의 적절성을 설명했죠. 그때 대통령께서 “아산이 좋긴 좋은데, 제철은 공해산업이니까 가급적 바깥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시더군요.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뻘구덩이 대호지구에는 호안축조만 2년, 준설에 3년, 지반개량에 3년 등 10년이 걸려도 제철소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고 폭탄선언을 했었죠.
결국 건설을 맡을 현대·대림·동아·삼환 4개사가 두달이상 용역을 수행한 결과 모두가 대호지구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었죠. 그런데 나중에 현대가 슬그머니 의견을 수정한 거예요. 결국 현대만 대호지구를 추천하고 나머지는 모두 아산만을 추천해 3 대 1로 아산만이 결정됐죠. 결국 아산만으로의 결정이 확정된 6개월 후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제2제철은 다시 광양만으로 변경됐죠.
· 1932년 경북 군위에서 출생
· 1956년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
· 1965년 네덜란드 델프트공과대학교 수공학
· 1956년 해무청 시설국 토목기사
건설부 특정지역국 항만과
항만국 토목기정
건설부 산업입지국장
· 1981년 대한준설공사 사장
· 1982년 서울시농구협회장
· 1987년 제동흥산 사장
· 1991년 한진종합건설 사장
한국항만협회 이사
/김명득기자 mdkim@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