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창의력이 바닥난 중년의 일상이라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런 식상한 어버이날을 뛰어넘어 뭔가 그럴듯하게 두 노인에게 더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며, 자책하는 모든 회고적 모성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들에 그토록 염증을 내면서도 정작 그 부류에서 나 또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셈이다.
팔순 중반을 넘어선, 각각 고관절과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두 노인은 보조 수레나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도 못한다. 그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이 성당 나들이에 나선다. 마리아께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해 평화를 갈구하고 내세를 간청하는 것이, 당신들 스스로 다복하다고 자부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노친네들은 진작에 알고 있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 더 걸어 들어가지 않고 /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 엎드려버리신다(중략) / 관절이 시큰거려 / 얼른 안겨 /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 (중략) / 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
문인수 시인의`해녀`를 대하면 신 앞에 철벅 엎드리고 마는, 관절 시큰거리는 두 모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에 스치는 순간, 의탁하고픈 물결이 있다는 것에 무심한 자식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복하고 거칠 것 없는 자식을 둔 것도 죄인양 두 할머니 오늘도 마리아께 오롯이 제 모든 걸 맡기러 저 언덕배기 넘어 간다. 구루마 밀며 지팡이 짚고서 웃으며 간다. 오늘은 어버이날!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