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과 학식은 믿을만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족은 미암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편지로 미암에게 신행 올 때 버선발에 두꺼운 솜을 켜켜이 넣어 신고 오라고 충고했다. 우리나라 키높이 신발의 원조가 될지도 모를 에피소드가 덕봉에게서 나온 셈이다. 한편 장난끼 많은 미암이 부인에게 이런 시를 지었다. `부인이 문 밖에 나갈 때 코가 먼저 나가더라.` 콧대 센 부인을 놀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덕봉이 아니었다. `남편이 길을 갈 때 갓끈이 땅을 끌더라.` 미암의 작은 키를 농으로 받아치는 여유를 발휘한다.
오랜 귀양 생활 끝에 벼슬길에 다시 오른 미암은 고향에 남아 있는 덕봉에게 자신의 행실을 자랑하고 싶었다. 지난 몇 개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큰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편지를 보낸다. 덕봉은 답한다. 늘그막에 홀로 지새는 것은 당신 건강에나 좋은 일이지 마누라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더구나 시모의 삼 년 상을 거두고, 귀양살이 때 먼 길 찾아 나선 것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나은 것이냐고 일침을 가한다.
저토록 거침없는 화법과 진솔한 여성적 유머 코드가 용인된 당시 조선 사회는 확실히 여성에게 열린 사회였다. 논리적이고 담대하며 문학적 감수성 면에서도 결코 미암에게 뒤지지 않았던 덕봉 여사의 한 궤적도 남편인 미암의 배려 없이는 꽃피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 따라 봄 오는 오늘 같은 날, 봄꽃을 앞에 두고 덕봉과 미암은 어떤 시로 부부의 정을 나눴을까. 그미를 위한 온전한 시집은 사라지고, 미암의 기록만으로 그 시절을 되돌려야 하는 게 조금은 애석하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