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갈증을 성찰한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전혀 다른 프라이데이를 창조해냈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재구성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
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자기들 기준 밖의 것은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흑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패러디 작에서는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프라이데이 대신 등장한다.
프라이데이가 단순하고 착한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주체자였다. 프라이데이가 수동성을 의미할 때 방드르디는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투르니에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협력자이자 야만의 자연인으로 순응한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와 문명의 경계가 어디 있냐고 질문해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는가, 개미에게도 그들 고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가 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가늠자를 들이대 줄 나만의 `금요일`을 찾아 옷깃 한 번 여며 보는 것이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