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의 정치다. 감동의 정치는 국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때 가능한 정치이다. 정치인들의 정치행태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인정을 받을 때 정치인에 대한 신뢰는 되살아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 정치가 사실은 국민의 여망을 반영하는 공감과 감동의 정치가 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대 국회가 출범했지만 공감의 정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공감의 정치는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의 본령인 의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는 법정 개원 일에도 문을 열지 않고 개정 휴업이라는 구태만 재연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여야의 원 구성이라는 감투싸움보다는 하루 빨리 개원해 산적한 민생을 해결하기를 바라는데도 말이다. 더욱이 대선의 경선 방식이나 종북주의 색깔 논쟁은 누구를 위한 정쟁인지 의심스럽다. 연일 쏟아지는 여야 정치인들의 정치적 발언들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만 있고 `화합과 상생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이 나라의 정치는 너무나 유권자들의 눈높이와 괴리돼 있다.
그래도 과거에는 이 나라 정치인들 중에는 국민적인 존경과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 더러 있었다. 민초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그들의 권익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자기희생적인 정치인, 일생을 청렴과 절제로 모범을 보인 정치인, 권위주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정치인 등 이들은 모두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들은 이 나라의 척박한 정치 풍토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진솔하게 봉사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정치에는 이러한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야를 떠나 국민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정치인마저 드문 현실이다. 의원의 소신발언이 당연한데도 쓴 소리하는 의원을 `미스터 쓴 소리'로 치켜세우는 세상이 아닌가. 살기 힘든 각박한 세상에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정치인 보다는 정쟁만 일삼는 정상배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18대 국회에서도 툭하면 의회는 문을 닫아 버리고 혈세만 축내는 식물국회가 돼 버렸다. 여러 명의 의원이 비행과 비리로 의사당을 떠났으며 의회의 수장까지 돈 봉투 사건으로 도중하차하지 않았던가. 어느 설문조사에서 가장 불신 받는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슬픈 현실이며 여기에 공감과 감동의 정치는 자리할 수 없다.
공감의 정치를 위해 우리 정치는 이제 `시민들의 눈높이'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특히 새로 출범한 19대 의회는 이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정치적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소외되고 불쌍한 백성들을 보살피는 정치,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감동의 정치를 우리는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비리에 연루된 의원의 조건 없는 사퇴라는 결단이 선행돼야 한다. 비례대표 경선 과정의 부정으로 국민적인 지탄을 받으면서도 의원직을 고수하는 두 명의 의원, 박사 학위 논문 표절과 파렴치한 제수 성추행 의혹에도 자리에 연연하는 의원이 있는 곳에 어찌 감동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개원되면 의원들은 스스로 의회에서 만든 `의원 종신 연금법'이라는 기득권부터 폐기해야 한다. 서민들이 30여 년 간 부어야 탈수 있는 120만원의 연금을 의원 경력 하루만 해도 종신까지 보장받는 제도를 어찌 국민들이 동의하겠는가. 이뿐 아니라 의원 겸직 금지 조항을 법으로 규정했지만 변호사와 교수직 등을 겸직토록 허용한 제도는 응당 폐기돼야 한다. 율사 출신 국회의장마저 재임 중 엄청난 사건 수임료를 받았던 것이 과연 온당한 제도인가. 서민의 민생 법안은 팽개쳐 두고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앞장선 의원들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하고 존경할 것인가. 여기에 정치에 대한 불신은 싹트고 민심은 이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00명의 국회의원들과 12월대선 후보들의 자기 자기희생적인 결단과 실천의지가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