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의 역사는 보통 13년의 상해 시기, 8년여의 이동시기, 5년간의 중경시기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동시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이동시기를 `장정시기(長征時期)`라고도 부른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는 중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흐름을 바꿔 놓은 쾌거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13년간 근거지로 삼았던 상해를 떠나야 했다. 거사 직후인 1932년 5월 임시정부는 긴급히 항주로 옮겼다. 김구도 자신이 거사를 주도했다고 성명을 발표한 뒤, 임시정부와 별도로 상해와 항주 사이의 시골 도시인 가흥으로 피신했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도 마음 놓고 열 수 없었다. 가흥의 `남호(南湖)`에 배를 뛰어 놓고 선상회의를 개최한 것도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항주에 잠시 머물던 임시정부는 내륙인 남경 방향으로 조금 이동해 1935년 11월 진강에 자리 잡았다. 진강은 상해와 항주에서 남경으로 가는 길목인데, 고속도로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임시정부를 진강에 두었지만 요인들은 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에서 활동했다. 일본이 임시정부가 남경에 주재한다면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와 함포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재지는 진강에 둔 채 남경을 무대로 활동한 것이다.
이때에 김구와 중국 국민당 정부 장개석 사이에 이뤄진 면담은 이후 한국독립운동의 전개에 전환점이 됐다. 김구는 장개석을 만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고, 장개석은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도록 조치해 줬다. 이들은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주요 인적 자원이 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남경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급하게 활동무대를 옮겨야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넉 달 만에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이 함락의 위험에 처했고, 11월 중국 정부는 중경 천도를 선언했다. 임시정부도 급하게 배를 마련해 장사로 옮겨갔다.
호남성(湖南省)의 성도(省都)인 장사에서 임시정부는 1938년 5월 `남목청사건`이라고 하는 총격사건에 휘말렸다. 우파 3개 정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조선혁명당 당사에서 김구를 비롯한 요인들에게 조선혁명당원이었던 이운한이 총격을 가한 것이다. 현익철이 사망하고, 유동열은 중상,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당시 김구는 거의 절명 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다시 장사를 떠나 광동성(廣東省) 광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이 광동성에 상륙하면서 임시정부는 채 자리도 잡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대가족은 버스와 배를 갈아타고 1938년 10월 유주에 도착했다. 유주에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해 반전활동을 펼치면서 중국인들에게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장차 한국광복군 조직의 틀을 마련했다.
1939년 4월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시수도 중경 바로 아래에 있는 기강에 도착해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가기까지 1년 반 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 정치적 통합과 군대 결성을 준비했다.
이렇듯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상해를 출발해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8년이 넘도록 고난의 대장정을 거쳤다. 1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공습을 피해가며 이동하면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준비했다. 그 결과가 중경시기 한국광복군 결성과 건국강령을 선포하고 좌우합작 정부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