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1661~1720)이 지난 1693년 일어난 `안용복 사건`의 이른바 `울릉도 쟁계(爭界)` 문제가 논란이 되자 숙종이 과거시험 응시자에게 대책(對策)을 묻는 내용의 시험문제를 냈다.
당시 시험문제에 제시된 조정 대신들의 견해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강토는 남에게 줄 수 없는데 한번 그들(일본)의 소유가 되면 동쪽 경계를 보호할 수가 없다. 그러니 변방의 장수를 가려 보내 우선 점거해 지키는 것이 낫다`였다.
또 한 가지는 `바다 밖 조그마한 섬은 본래 빈 땅인데 일본과 100년의 인호(좋은 관계)를 잃어선 안 되니 그들의 왕래를 내버려두고 (북쪽)변방의 방비를 지키는 것이 낫다`였다.
이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나은가? 아니면 이 외에 따로 만전(萬全)의 양책(良策)이 있는가? 자대부(子大夫)들은 독서하고 담도(談道)하는 여가에 반드시 `변방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킬 방도(安邊靖國之猷)`를 강구, 각자 자세히 대책을 나타내라고 했다.
울릉도 쟁계 사건은 지난 1693년 봄 울산과 동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다 일본 어부와 만나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한 뒤 그해 11월 초 `조선 어민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요청하는 서계와 함께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의 어업권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울릉도 쟁계)이 벌어졌다. 분쟁 결과, 일본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하고 `죽도(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 막부는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를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오래전에도 이 같이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등 분쟁이 있었지만, 당시 일본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정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도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백하게 했는데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 지리적, 형태적, 역사적, 자연 생물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외교적 결례를 하면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하루빨리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하고 대한민국과 상생적 발전을 통해 세계경제에 이바지하는 선진국으로 소임을 다 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