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6시 쯤 서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9월 초순의 날씨답지 않게 후텁지근함을 더하는 비가 오더니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는데도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일행의 불편이 자신 탓인 양, 관광안내원은 일 년 중 비가 오는 날이 30일이 안 될 정도로 건조한 기후인데 날씨가 손님들을 반기는 모양이라며 농을 건넨다.
서안의 시가지는 옛 도읍지의 흔적이라고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13.7km의 토성 성곽이 전부였고, 시내에는 자동차들이 어지럽게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에 지붕을 씌운 듯 개조한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사람들을 뒤에 태우고 다니는가 하면 노후한 건물 사이사이로 곳곳에는 아파트나 빌딩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중국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상황이 이제 상해나 북경을 비롯한 해안지역에서 내륙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화청지(華淸池)
서안에서 진시황릉이 있는 곳까지는 30여km, 버스로 1시간가량 떨어져 있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별궁이랄 수 있는 화청지. 내륙에서는 보기 드물게 높은 여산의 서북 기슭에 아래 자리한 별궁 입구에 발을 딛자 화려한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청지는 산세가 뛰어나고 목욕하기 적당한 43도의 온천수가 풍부해 주나라 때부터 이어 온 온천 휴양지로, 무려 3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나라 때 여궁(驪宮), 진나라 때 여산탕(驪山湯), 한나라 때 이궁(離宮), 당나라 때 온천궁(溫泉宮), 화청궁은 모두 화청지에 건설된 역대 황제들의 별궁 명칭이다.
아홉 마리의 용의 조각상에서 물을 뿜어내는 구룡탕 옆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양귀비 조각상이 전라의 모습으로 수줍게 서 있다. 양귀비 앞에서는 사진 촬영하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양귀비와 현종이 즐겨 목욕했다는 해상탕과 연화탕은 탕의 바닥을 다 덮을 크기의 백옥이 놓여 있어 화려함을 더한다. 더운 온천수가 차가운 옥에 닿아 식으면서 서서히 탕으로 올라와 목욕하기 알맞게 된다는 것. 아들의 비였던 양귀비를 가로채 사랑에 빠지면서 국정을 소홀했던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몰락한 원인을 보는 듯하다.
진시황릉
화청지를 빠져 나와 진시황릉까지 가는 길가로는 수확기의 석류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도로변 곳곳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원두막에서 석류를 판매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곳 특산품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속을 빨갛게 가득 채운 알갱이들을 떼어 내 입에 넣자 떫은 듯, 시큼한 맛을 낸다. 우리 입맛에는 영 아닌데 중국인들은 즐겨 먹는 과일이란다.
진시황제가 묻힌 곳. 그는 죽음에 대비해 50㎢에 달하는 무덤 부지와 그 속에 묻을 부장품들을 미리 마련해두었다. 시황제의 사후 2천100여 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 황릉은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진시황릉 유적지를 들어서자 커다란 표지판과 무덤 조성 당시의 상황을 조각한 큼직한 현판 뒤로 야트막한 산 아래로 공원이 꾸며져 있다. 유적지를 둘러보는 전동차를 타고 향나무 사이로 길쭉길쭉하게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 보니 그저 큰 규모에 놀랄 뿐 어디에도 무덤의 흔적은 없었다. 안내원이 야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라는데, 나는 “아니 도대체 무덤은 어디 있다는 거죠?”라고 물었다. 안내원이 씩 웃으며 “저 야산이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한다. 농부가 발견한 것은 병마 도용(陶俑)이었고, 그 병마 도용은 시황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조성된 형태로 짐작된다는 것.
황릉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 둔덕 바로 아래, 내벽 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능 내부는 광대한 지하궁전으로, 각지에서 징발된 70만여 명의 일꾼들을 동원해 36년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안내원은 역사가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무덤 안에는 수은을 엄청나게 매장해 놓아 무덤을 파헤치면 수은이 강으로 흘러 심각한 중독현상이 발생할 우려가 있어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이 유적지를 발굴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정작 무덤을 완전히 발굴하려면 아마도 몇 세대가 더 지나야 할 것이라고 한다.
병마용 박물관
황릉 동쪽 1.2㎞ 정도 떨어진 곳에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병마용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동쪽에 강력한 적이 있어, 이를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
지금까지 발굴된 병마도용은 8천여 구에 이르고 있다. 동일한 모양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실물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 규율에 따라 군사 대형으로 늘어서 있고, 궁수와 석궁 사수, 보병과 전차병 무리 그리고 후미에는 갑옷을 착용한 호위병이 줄지어서 있다.
3곳의 건물을 세워 병마도용의 발굴을 진행 중이었는데 한 곳에서는 진군의 정예 지휘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68개의 상이 발굴되기도 했다. 발굴 당시에는 당시 복장에 나타나는 색깔이 그대로 드러났으나 햇빛을 보는 순간 흙 색으로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문화재는 현장 그대로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느껴졌다.
진시황릉 유적지를 나서면서 안내원은 당시 무덤 조성에 동원된 사람들은 무덤의 보호차원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는 섬뜩했던 역사를 전한다. 그 수많은 사람,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70여만 명의 당시 사람들이 황릉 조성이라는 노역에 시달리고도 보상은커녕 도리어 무덤 보호라는 명분 아래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오전에 떠날 때 비가 오던 날씨가 오후 들어서는 햇볕을 보이더니 병마용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을 나서자 땀이 절로 흐를 정도로 더운 기운이 몰려온다. 곧바로 다음 행선지인 박주시까지 긴 기차여행을 해야 한다. 오후 5시40분에 출발한 기차는 섬서성 옆의 안휘성 박주시를 가는데 12시간이 걸려 다음날 오전에야 도착하는 먼 길이다. 서안시 기차역에 도착하자 70년대 우리나라 명절 때 기차역처럼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파를 헤집고 기차에 올라 먼길을 떠나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황릉에 동원된 그 많은 사람의 영혼들이 우글거리는 듯했다. 그 악독한 독재의 시절을 보낸 조상의 희생이 오늘날 중국 곳곳에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바탕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이용호기자 yelee@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