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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편중된 코드인사로 양산되는 위정자(僞政者)들

▲ 강희룡서예가 그릇된 정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치를 등치는 위정자(僞政者)들이 설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치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정치인이나 법관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법을 악용하는 국가는 항상 어지럽게 마련이다. 법의 판결이 올바른 저울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법관의 좌우 성향에 따른 편견으로 결정지어질 때는 더욱 사회혼란을 부추긴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올바른 정치란 곧고 올바른 사람을 등용해서 곧지 않은 사람들 위에 놓으면 정치는 바르게 돌아가지만 곧지 않은 사람을 곧은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들은 흐트러지고 나라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바른 정치의 국가경영을 잘 정리하고 있다.철학 없는 그릇된 정치투쟁으로 한국의 보수라는 용어는 군사 독재의 협조자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고 있으며, 진보라는 용어는 친북좌파로 확대 해석되어 콤플렉스를 동반하고 있다. 5년 대통령 단임제가 정착된 이후로 여야 정당의 권력투쟁은 초한지와 같은 상황이 몇 년마다 반복되고 있다.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각 진영에서 승부를 펼친 후 어느 한 쪽에서 대통령이 탄생된 후에는 어김없이 포용과 통합을 외치지만 그 내면에는 모든 부처나 공공기관에 선거공신과 친인척들이 발호한다.`맹자`에 거이기(居移氣)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처한 지위에 따라 기상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녔던 가치관이나 인간관계는 대통령이 된 후에는 변하게 마련이다. 이는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 자체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국가를 발전시키는 통치를 해야 한다. 임기 동안 투표로 보장받은 권한을 보은이라는 차원에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권을 잡으려다 보면 기획이나 설득을 잘하는 사람, 선동이나 연설을 잘하는 사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국가통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인격자이고 능력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제나라 맹상군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식객 같은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닭 울음소리를 잘 내고 좀도둑질에 능했던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능력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다는 때문이다.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응한 보답이 있어야 하겠지만 국가의 대통령이 돼서는 의리 차원의 보답은 잊고 인재를 두루 찾아 써야 하며 특히 인사상의 배려에는 신중해야 한다. 능력이 없거나 곧지 않는 사람이 코드인사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면 이러한 사이비로 인해 그 조직 자체가 흔들리고 부패하기 때문이다.중앙인사검증기관 자체가 코드로 편중된 시각에서 선택한 고위공직자들을 대개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기관의 정당한 목적을 외면한 채 삐뚤어진 과잉충성으로 권력을 좇으며 남용하다 조직의 부패와 비리의 중심에 서게 되며 실패한 정부의 원인제공자들이 되는 것이다.인사에서 배제되거나 탈락된 공신들은 흔히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들먹이지만 그것은 결코 배신이 아니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치부의 수단쯤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권력을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들 모두는 이 사회를 좀먹는 위정자(僞政者)들 즉 사이비 정치꾼에 불과하다. 이들이 공직사회에서 설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이다. 사냥개는 사냥 이외에는 아무데도 쓸 곳이 없다.

2017-08-25

보신탕의 양면성

▲ 강희룡 서예가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름날의 무더위를 이기는 법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보양식이다. 특히 복날에는 삼계탕 집에 손님들이 만원이고, 보신탕집도 성업이다. 보신탕하면 떠오르는 개고기의 식용에 대해서는 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보신탕문화가 서구사회에서 논란의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무렵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개막을 앞둔 시기다. 당시 브리지트 바르도를 필두로 한 동물애호가들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서유럽에 한국의 보신탕 문화가 대표적인 야만적 문화의 한 형태로 비춰졌었다. 세계 각 국마다 그 나라 민족들이 즐기는 혐오스런 음식이 많을진대, 우리의 보신탕문화가 서구인에 의해 도덕적 몰매를 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한국이 경제성장을 토대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대의 국제적 행사를 치르다 보니 보신탕 문화가 다른 나라의 것에 비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지난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복날에 개고기를 즐겼음이 기록돼 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줄 때 잔칫상에 개고기가 올라온 것도 흥미로운 기록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유배지에서 흑산도에 유배돼 있던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는 개고기 요리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편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면, 섬에 유배된 형이 짐승고기는 도무지 먹어보지 못한다고 하니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라도 섬에서 자라는 수많은 야생 개를 잡아 5일에 한 마리씩은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섬이라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기에 그물이나 덫을 사용하던지 식통(食桶)을 만들어 사냥하라고 개잡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정약용은 흑산도에서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님을 위해 개고기 섭취를 권유했으며, 산속의 개를 잡는 방법 설명과 요리법에 대한 설명도 매우 구체적이다. 요리법은 박제가가 만든 법으로 식초, 장, 기름, 파 등으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까지 개고기 요리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개고기 요리가 광범위하게 보급됐음을 알 수 있다.조선후기 학자 홍석모(1781~1857)가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도 `시장에서도 구장(狗醬)을 많이 판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종실록`에는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를 때 이팽수가 봉상시 참봉이었는데, 김안로가 개고기 구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나서 날마다 개고기 구이를 만들어 제공해 마침내 김안로의 추천을 받아 청현직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전통시대의 보신탕문화의 역할을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여름이면 무더위를 보신탕으로 이긴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특히 복중에 많이 먹는 이유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해 개고기는 화(火), 복(伏)은 금()에 해당, 화기(火氣)로서 금기(氣)를 억눌러 더위를 이겨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보신탕 문화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서유럽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동물애호의 시각과 동물권 시각에서 보는 것인 반면, 보신탕 문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내 시각은 다양한 음식문화의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부정과 긍정이라는 보신문화를 가치관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지금까지 소모적인 논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즉,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다소 복잡한 문제를 쉽게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2017-08-11

국가 경영에는 곧은 인재가 필요하다

▲ 강희룡 서예가박근혜 정부가 탄핵 정국을 맞고 박 전 대통령이 영어의 신세가 된 건 국민에게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공직 배제 5대 원칙에 의거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재로 조각인선을 약속했으나 심지어 어떤 인사는 대통령 스스로 천명한 인사배제 5대 원칙에 전부 해당하는 `비리 5관왕` 후보자를 야당 반대에도 임명을 강행했다. 이에 야당은 국회 청문회를 모독하고 무력화한 행위이며 전형적인 코드인사라고 반발하며 청문회 무용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청문회 상에서 나타난 장관 후보자들의 각종 비리의 연루는 과거 정부의 정부 요직인사들과 별반 다름이 없어 믿음에 금이 났다. 그나마 전 정부와는 다른 낮은 곳으로부터의 소통정치를 하고 있기에 국민들이 믿고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고려 말 원나라의 정동성 향시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여 원제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한 학자 이곡(1298~1351) 선생은 관료들의 자세를 `동문선, 신설송이부령귀국`에 잘 정리하고 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비록 임금에게 잘 보였을지라도 백성에게 잘 보이지 못한다면 높은 지위와 많은 봉급은 가질 수 있으나 백성에게서 오는 원망은 면하지 못할 것이며, 비록 지금은 남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후세에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많은 공적은 세웠다 할지라도 뒷사람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다.”이 글은 이곡 선생이 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고려의 왕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임금에 앞서 먼저 본국으로 떠나는 벗에게 신하의 도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쓴 글이다. `신하 노릇 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운을 떼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말은 장황하나 그 요점은 매우 간단하다. 무엇보다도 백성이 최우선이라는 점과 그리고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점이다.비록 임명권자에게 잘 보였을지라도 국민에게 잘 보이지 못한다면 높은 지위와 많은 봉급은 가질 수 있으나 국민들에게서 오는 원망은 면하지 못할 것이고 비록 지금은 남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후세에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많은 공적은 세웠다 할지라도 후인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다.조선후기 독립운동가 유인석(1842~1915) 선생은 그의 저서 `의암집, 직목설`에서 `사람을 찾음에 곧은 나무를 찾을 때처럼 성심을 다하고, 사람을 살핌에 곧은 나무를 살필 때처럼 치밀하게 하면 고른 사람이 곧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다.`이 글은 구한말의 의병장인 의암이 어떤 일을 겪은 뒤 느낀 바를 적은 `직목설`에 적은 것이다.의암이 어느 날 집을 짓기 위해 두 사람을 시켜 곧은 나무를 구해 오게 했는데 한 명은 굽은 나무를, 다른 한 명은 곧은 나무를 구해 돌아왔다. 의암이 굽은 나무를 구해온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 사람은 `산에 가보니 앞에 곧게 보이는 나무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살펴보다 곧지 않은 데가 보이지 않아 나무를 베었는데, 베어 보니 굽은 나무였다`는 것이고, 곧은 나무를 구해온 사람은 `명을 듣고 귓가에 곧은 나무라는 말이 맴돌았고 문을 나설 때는 마음에 온통 곧은 나무 생각뿐이어서 산에 들어서며 곧게 보이는 그럴싸한 나무들은 좌우로 살펴보니 곧았는데 뒤에서 보니 모두 굽은 나무라 살피고 또 살펴서 빼어난 곧은 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곧지 않은 나무를 구해온 사람의 판단을 밟을 때가 종종 있다. 그저 윗사람 눈치나 살피고 당장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 과장하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은 곧은 나무를 베어 왔던 사람의 정신자세를 한번 떠올려 무엇이 국민을 위한 길인지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17-08-04

조선왕조실록과 대통령기록물

▲ 강희룡 서예가조선왕조실록은 조선조의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각 시대마다 역사를 정리한 기록물이다. 제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으며,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또한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료이다.왕조실록하면 대개 왕의 주변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 중심으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코끼리, 장금이, 공길이 등 당시 생활사의 면모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들까지 다수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태종실록, 태종 11년(1411년) 2월 22일` `일본 국왕 원의지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 씩을 소비하였다.` `태종 12년(1412년)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태종 때 코끼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는 하루에 콩 4.5말을 먹는 큰 동물로 당시 고민거리가 되었던 차에 구경을 온 관리까지 밟아 죽였으니 졸지에 큰 죄까지 짓게 된 것이다.`중종실록, 중종 17년(1522년) 9월 5일``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지자 국왕이 약방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줬다. 의녀 신비와 장금에게 쌀과 콩 10석씩을 하사했다.` 여기서 장금은 한류 열풍을 선도한 TV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으로 실록에 등장하는 실존 의녀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1505년) 12월 29일` `전교하기를, 본디 나례(儺禮)는 배우의 장난으로 볼 만한 것이 없다.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인(優人) 공길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중략)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했다.` 연산군 시대에 궁중에 광대들이 자주 드나들던 상황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 공길 또한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 배우이며, 공길이 왕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유배를 가는 용기 있는 광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광대들은 왕을 비롯해 탐관오리들의 비리까지 해학으로 풍자해 비판했다.고전 실록이 이처럼 다양한 기록을 담을 수 있었던 것에는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 이외에 관청의 업무 일지에 해당하는 시정기(時政記)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폭넓게 당대사의 모습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오늘날 대통령제를 채택한 민주국가 형태에서 대통령기록물은 매우 중요한 사초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들의 불리한 자료들은 모두 파쇄 또는 소각시켰다. 출범된 지 2개월이 지난 현 정부에서 전 정부의 청와대에서 생산된 문건들이 대통령기록물 보관 장소로 이전되지 않고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구석이나 공간에서 다량 발견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보면, 탄핵된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공직자들의 정신자세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책임했는지 짐작으로도 알 수 있다. 국가의 정통성이나 민족의 자긍심에 국가기록물이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공직자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2017-07-28

소인배 인간형들이 판치는 유속(流俗)

▲ 강희룡 서예가유교문화를 바탕에 깔고 500여 년을 유지해온 조선조 사회에서 군자와 소인이란 말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말도 없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는 제자들에게 군자와 소인의 분류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는 `논어 자로편`에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부화뇌동하기만 할 뿐 화합할 줄 모른다`고 정리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면서 상반된 인간유형으로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키고 군자의 삶을 지향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조선후기 문신 이응신(1817~1887)은 `소산문집초고` `유속을 징계한다`라는 논고에서 소인과 유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가를 다스림에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소인배와 유속이다. 이들은 임금과 굳게 결탁하고 패거리를 널리 심으며 참혹하게 남을 해치고 교묘하게 자기를 살찌운다. 독사와 맹수같이 마음먹고 사귀와 요부 같이 행동한다. 틈을 비집고 들어와 때가 되면 국가에 해악을 끼친다. 음흉하고 사악하고 감추고 속이는 것이 비할 데가 없다. 이것이 소인의 환난이다.`또한 유속은 `옳고 그름의 중간에 몸을 두고 맑고 더러움의 중간에 발을 붙이며, 패션이나 취미는 남들을 따라하고 말과 행동은 시세와 부합해서 한다. (중략) 온화한 모습으로 공손하며 환히 아는 듯 두루 통해서 비방하는 소리가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재물의 이득을 얻으려는 욕심과 진출해서 빼앗으려는 속셈으로 밤낮으로 일을 꾸며내는 버릇이 몸에 단단히 붙어 풀리지 않는다. 심술이 망가지고 풍속이 전염되어 혼탁하고 비루해 더불어 일할 수 없다.`또한 그는 유속의 폐해를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국가를 다스리는 데 유속을 고치지 않는다면 정색하고 참언하는 신하가 없고, 영토를 방어하고 환난을 막아내는 관리가 변경에 없으며, 착실히 공부하고 힘써 실천하는 선비가 학교에 없을 것이며, 윗사람을 친히 하고 장자(長者)를 위해 죽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유속의 해로움은 물론 소인과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소인보다 심한 점도 있다. 소인은 화(火)라서 박멸할 수 있으나 유속은 수(水)라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소인은 구부러진 나무 같으나 유속은 누런 띠 풀이나 하얀 갈대 같아서 땅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이응신이 살았던 조선후기는 전형적인 전통시대를 벗어나 아예 군자나 소인의 차원을 떠나 버린 새로운 인간형으로 유속이 대두하였다. 유속은 겉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고 도덕에 관심이 없다. 관료적인 처세술과 세속적인 쾌락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당시 유속이 확산되어 더 이상 군자와 소인의 전통적인 인간 유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응신의 문제 제기가 과연 사실이라면 조선후기의 이와 같은 현상에 어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부패사회의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지금의 우리사회는 진정한 민주정치가 침체되고 좌우 이념프레임에 묶인 패거리정당정치의 장기적인 그림자 속에서 형성된 퇴영적이고 무기력한 정치문화는 결국 현대판 유속의 폐해가 현실화된 것이라 보겠다.`여씨춘추 신행론`에 옥을 깎는 사람이 근심하는 바는 옥처럼 보이는 돌이고, 검을 만드는 사람이 근심하는 바는 오나라 간장검처럼 보이는 검이고, 현명한 군주가 근심하는 바는 사람들이 널리 많이 듣고 논쟁하여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망국의 군주가 지혜로운 자와 비슷해 보이고, 망국의 간신들이 충신과 비슷해 보인다. 때문에 외형이 그럴싸하게 비슷한 것의 자취를 깊이 살피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 비슷한 참과 거짓의 올바른 살핌은 오직 현명한 국민들의 몫인 것이다.

2017-07-21

`조하리의 창`이 주는 시사점

▲ 강희룡 서예가심리학에는 조하리의 창이란 이론이 있다. 조하리란 고안자인 루프트(Luft, J)와 잉햄(Ingham, H)의 이름을 결합한 것으로 일명 `마음의 창` 또는 `마음의 4가지 창`이라고도 하며, 대인인지훈련과 대인관계능력에 활용되고 있다.그 창은 밭전(田)자처럼 네 개의 창틀로 되어 있는데 위의 두 창은 남이 알고 있는 내 마음 즉, 자아의 부분이다. 그 중 왼쪽 창틀은 개방적으로 나와 남이 모두 알고 있는 마음의 부분 즉, 공개영역이고(열린 창), 오른쪽에 있는 창틀은 나의 재능이나 단점 등 남은 알고 있으나 나는 모르고 있거나 은폐하고 싶은 부정적인 내 마음 즉, 맹인영역(장님의 창)이다. 그리고 아래쪽 두 창은 남이 모르는 내 마음이다. 왼쪽 창은 자신은 알고 있으나 맹목적으로 억제하여 노출을 시키지 않아 타인이 모르는 내 마음 즉, 비밀영역(숨겨진 창)이고, 오른쪽 부분은 타인도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자아 즉, 미지의 영역(미지의 창)이다.사람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열린 창 즉 공개영역을 극대화해나가야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 네 부분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크고 작을 수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어느 국민에게나 다른 국민보다 어느 부분이 더 크고 더 작고하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여기서 남이 알고 있는 나의 부분을 `공적자기`라 하고, 남이 모르는 나의 부분을 `사적자기`라고 한다.이 이론에 비춰 한국인과 서양인의 의식차이를 비교해보면 무의식층은 동서 두 민족이 비슷하나 사적인 자기층은 서양인에 비해 한국인이 엄청나게 큰 반면, 공적인 자기층은 월등히 작게 나타났다. 이로 볼 때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남에게 알리는 자신의 부분을 최소화하고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자기 부분을 극대화하려는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폐쇄적이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한국인의 표현구조는 일상생활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인은 보다 소수의 사람들과 선택적으로 접촉하며 미지의 사람과는 가급적 접촉을 적게 함으로써 자기노출의 위험을 최소화시키려한다는 것이다.이 네 개의 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맹인영역인 `장님의 창`이다. 이 장님의 창은 나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나의 또 다른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창은 확장도 가능하기에 한 명 한 명의 심리가 아닌 집단이나 조직 전체의 상태에 대입해 볼 수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맹인영역은 피드백 즉, 상대방의 조언과 책망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갈 수 있게 되고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게 된다. 집단이나 조직 또한 마찬가지로 내부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어 조직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오늘날 한국정치의 흐름을 분석해 보면 정당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타 정당이나 국민들 입장에서 보기에는 분명한 문제점과 도덕적 흠결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정작 그 정당 내부의 어떤 사람도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거나 스스로 외면하려는 경향이 많다.그 대표적 예가 지금 정치권에서 부각된 지난 대선 때 한 야당이 만든 가짜뉴스인`제보조작 사건`이다. 이 당의 당원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사건을 당사자가 스스로 모든 진실을 밝힘으로써 윗선과의 공모여부에 대해 수사 중이나 정작 윗선에서는 모두 모르쇠나 궤변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아이들도 웃을 자체진상조사단의 조사발표를 믿는 국민들은 애초부터 아무도 없을 것이다.이러한 상황의 답은 바로 국민의 입장이 돼서 그 집단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점들이 상식선에서 환하게 비춰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조하리의 창`이 주는 또 다른 시사점이기도 하다.

2017-07-14

107년 전 국치의 교훈을 잊었는가

▲ 강희룡 서예가상대방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할 경우 정쟁은 극단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경우 상대방이 집권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정치의 모든 타협이 거부되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정치 자체가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동아시아 지역은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형성된 어떠한 사상이나 운동도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안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국제정치적 환경은 제국주의 중 특히 후발적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으로부터 받는 외압을 물리치고 국가의 독립을 수호해야 할 대외적 과제를 뜻하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으로 국가의 독립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전근대적 중앙집권체제에 수반되는 하향식 국민적 통합을 지양하고, 근대적 의미의 국민 참여적인 통합을 도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올해는 경술국치 107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조선조는 19세기 중엽부터 서구제국주의 또는 그 아류인 일본의 무력도전 앞에서 좌절하다가 결국 1910년 8월 29일 국권상실의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좌절과 패망이 주는 역사적 교훈과 의미를 우리는 냉철하게 분석하고 정리해서 자손들에게 물려줘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민족공동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국가운영의 기틀을 다져나가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과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수행하느냐 하는 신념과 방향의 차이에 따라 이 시기의 정치사적 현장에 위정척사나 개화, 그리고 동학의 사상과 운동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운동들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응해 국권을 수호하고 자주독립을 지키겠다는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실현할 방법과 정치체제의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초래함으로써 통합적인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되지 못하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뚜르-뽀아띠에 전쟁에서 사라센 군대가 기독교 연합군에게 승리했더라면 오늘날 옥스퍼드대학이나 파리대학에서는 바이블 대신에 코란을 강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파한 기억이 생각난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의 사건이나 한 지도자의 선택이 계기가 되어 그 진행방향이 결정되고 바뀐다. 한 개인의 운명이나 한 국가의 흥망성쇠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19세기 후반 조선이 개화, 척사, 동학의 사상과 운동 중에서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한국 근현대정치사의 주역이 됐더라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 세 갈래의 사상과 운동이 서로 갈등하며 대립하는 양상에서 벗어나 근대적 민족주의의 사상과 운동으로 융합되어 통합의 길을 선택하였더라면 그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오늘의 정치는 자칭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정당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의 위치가 바뀌면서 지향하는 국가정책이나 방향이 서로 다를 수는 있으나,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존재의 불변의 법칙을 바꿀 수는 없다.독립기념관 뒤뜰에 세워진 서재필 선생의 어록비다. `합하면 조선이 살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근일 죽을 일을 할 묘리가 있겠습니까. 살 도리들을 하시오.` 영욕에 눈멀어 `내로남불`이라는 남 탓하는 신생어까지 만들며 아귀다툼하는 지금의 위정자들이 가슴에 새겨야할 교훈이다.

2017-07-07

경계해야 할 사이비들

▲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 실학자로 경세치용의 실학을 주장하며 공리공론으로 흐르던 정치상황을 비판하고 민생구제를 위한 새 길을 제시했던 이익(1681~1763) 선생은 `성호전집`, `안백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인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향원(鄕愿)에 해당하는 사람이니 그들은 옳은듯 하지만 옳지 않으며 의견이 분명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고을에서 모든 사람에게 근후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으로 신의가 있어 보이고 행동은 청렴한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세속에 영합하여 바른 도리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원`이라 했다.전통사회에서 `향원`이란 존재는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 그렇지 못한 사이비(似而非)에 해당하는 부류들로 양쪽의 의견에 분명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아 어떠한 비난도 교묘히 피하는 사람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겠다.다시 말해 덕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덕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덕의 적`이라고 보면 되겠다.공자는 향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덕의 적`이라 하여 극도로 배격하였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내가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을 사람은 오직 향원뿐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얼마나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또한 향원은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수령을 속이고 양민을 괴롭히며 환곡이나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부도덕한 사람을 가리킨다. 원래 이름은 첨수장이나 생긴 게 간사해 보이는 인상이라 별호가 향원이다.후에 맹자가 이를 좀 더 구체화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향원이란 말은 사이비 유덕자로 덕이 있는 사람과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사람으로 정리했다.춘추말기 노나라의 대부였던 소정묘를 공자가 주살한 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등 중벌로 다스리는 것을 보면서 소정묘를 인망이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여 따르던 자공은 스승인 공자의 행위를 대놓고 힐난하며 민심을 조장하자, 공자는 도둑 이외의 대악(大惡) 5가지를 들어 죽인 이유를 설명하였다.여기서의 5대악은, 남의 마음을 잘 읽어 사로잡지만 그 속에는 엉뚱한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 행실이 편벽하면서 고집만 센 사람, 말에 진실성이 없으면서 달변인 사람, 실행하는 목적이 어리석으면서 지식이 많은 사람, 비리에 순응하면서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다. 이 중 한 가지만 지녀도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운데,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를 모두 범하고 있어서 중벌로 다스렸다고 설명했다.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현대판 향원은 없는지. 우리가 향원을 덕을 지닌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회를 문란하게 하고 조직을 병들게 하는 간사한 무리들과 의로운 자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고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미혹에 빠지게 하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 득세하고 있지는 않은지, 겉으로는 정의를 논하나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으로 가득차서 구성원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개인의 영욕에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은 없는지, 중대범죄를 저질러 놓고 법의 허점을 이용해 변호를 통해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없지 않는지.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행위는 없는지, 우리 주변에서 스스럼없이 만들어지는 모든 일탈행위들은 누구에게나 잠재된 향원의 본심에 편승할 수 있으니 이러한 사이비의 유혹에서 스스로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2017-06-30

우리의 공동체는 건전한가

▲ 강희룡 서예가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숙제는 바로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현대인은 `우리`에서`나`를 중심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도 정신보다는 육체의 `나`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의 육체를 영위해가기 위한 물질적 요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내 삶은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즉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질이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 삶을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물질을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의식이 집중되어 있다.삶의 철학은 곧 삶의 기예를 가리킨다. 진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표준 정의는 대체로 이렇다.`삶의 철학은 지혜의 통찰이다. 지혜란 삶의 기술을 가리킨다. 목표는 행복이다.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 것이다.` 오랜 세월을 인문과 삶의 철학의 중심이 되었던 유학(儒學)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쇠락하고 있다. 혹시나 지탱하고 있다하여도 그 참정신이 소멸된 껍데기뿐이다. 중국의 학자 모종삼(1909~1995) 교수는 중국 역시 명말청조 고증학이 `지식을 위한 지식`으로 낙착되면서 중국인의 삶의 철학정신이 죽었다고 탄식하였다.개개인에게서 진정한 삶의 목표가 실종된 결과는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속에서 발생되는 스트레스가 내면세계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며칠 전 Y대학에서 대학원생으로 인해 발생한 텀블러형 사제폭탄 사고도 이런 현상의 사례이다. 지도교수의 폭언과 논문 작성과정에서 마찰에 불만을 품고 폭탄 테러를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에서의 교수 갑질이 학생들의 인권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이러한 문제는 이 대학뿐만 아니고 거의 모든 대학에서 폭언이나 부당한 개인의 업무지시, 학생 인건비착취 등 인권침해가 뉴스로 보도된 지 오래다. 그들은 대체로 변화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담당자들이 발상의 전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본인의 의도나 심술의 선악과는 별개로 교육의 본질과 전인(全人)으로서의 나를 잊고 물질에 물든 기존의 관행에 익숙해서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이다.살인이나 아동학대 같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사람 목숨을 경시하는 끔직한 흉악범죄를 비롯해 묵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범죄 역시 참된 삶의 방향을 잃고 분노나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나는 사례다.물질이 설쳐대는 오늘날에는 이인(里仁)의 공동체 즉 대동(大同)의 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복잡한 사회와 커진 경제 규모, 기대 수준에 맞추어 일과 삶을 조화시키고 직업의 질을 고민하게 되었으며 일상적 권력과 불평등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인권 또한 시급해졌다. `우리의 공동체는 건전한가!` 이 물음의 답을 찾아서 실현함으로써 미래의 우리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그 답은 바로 `인의예지`가 새 공동체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에 던져진 화두의 인은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며 무고한 자를 다쳐 이익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휴머니티이다. 의는 자신의 이기심과 이해관계를 유보하고 사회적 공정성을 향한 의지이다. 예는 의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부드럽게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중심 태도이다. 지와 배려와 관용은 이 덕목들을 배양하는 교육과 훈련에 해당한다. 이 지식들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도 아니고 지식만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각자 사려와 선택에서 이 지식들이 실질적 힘을 지혜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부단히 연습되어야 한다.

2017-06-23

민주시대의 시폐(時弊)는 국민의 힘으로 척결해야

▲ 강희룡 서예가인간의 역사는 시대를 거듭하며 필연적으로 폐단이 나타난다. 이러한 시폐가 깊을수록 나라는 병들어 그 존재마저 위태로워진다. 율곡 이이는 `임오년 시폐에 대해 진달한 상소문`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람은 위기를 미리 예방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위기가 발생한 뒤에도 수습하지 못하고 안정시킬 방도를 찾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율곡은 이 상소에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고 경장(更張)을 할 것을 주장한다. 내용을 보면 `대관(大官)들은 녹봉만을 유지하면서 실지로 나라를 걱정하는 뜻을 지닌 사람이 적고, 소관(小官)들도 녹 받아먹기만을 탐내면서 전혀 직책을 수행하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해 서로 옳지 못한 행위만을 본받으므로 관직의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중략) 신 역시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는 필시 망할 터인데 그냥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경장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으니 경장해 잘 되면 사직(社稷)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난 8년 후 조선은 선생이 우려했던 시폐를 해소하지 못한 결과를 혹독하게 치뤘으니, 임진왜란이라는 6년여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가 되고 백성들은 유린당했다.당시 시국을 학봉 김성일은 `축성의 정지와 시폐를 아뢰는 글`에서 `백성이 원망하여 배반하면 호미와 고무래로 창을 삼아 쓰더라도 강한 진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고, 인화로 뭉치면 작은 고구려가 수나라 백만 대군도 무찌를 수가 있는데, 지금 백성이 흩어졌으니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는가.`라며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민생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학봉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고 당시 축성의 폐단은 극에 달하면서 관리들의 탐학과 불법이 더욱 성행하였다. 따라서 성 쌓는 백성들 사이에서 `성이 성이 아니라 백성들이 성이로다.`라는 속요까지 유행하였다.이로 선생의 `용사일기`에는 `지금 병기가 잘 들고 날카롭지가 아님이 아니요 성지가 높고 깊지가 아님이 아니다. 진실인 즉 수령에 어진 사람이 없고 지키는데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정치가 가혹하고 법이 혹독하여 백성들이 흩어진지 이미 오래인데 급기야 변이 창졸간에 일어나니 장수나 수령된 자들의 평소에 한 일이라고는 민심을 크게 이반시킨 것뿐이니 비록 수습하려 해도 백성이 따르지 않는 것이니 나라일이 이에 이르러 다시 어찌할 나위가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적고 있으니 올곧은 선비들이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와 폭정, 무능함이 극에 달한 상황을 잘 정리한 내용으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한 것을 알 수 있다.국가적 위험이란 것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일상이 위험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과 우리가 믿고 있었던 시스템이 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위기를 알았다면 그것을 안정시킬 방도를 찾아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위기는 그 사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위험부담이 균등하게 분배되어 그 위험으로 특별히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입는 사람이 없도록 하여 그 위험을 근원적으로 줄이려 할 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매독환주`라는 성어가 있다. 어떤 사람이 옥구슬을 팔러 갔는데 사는 사람이 구슬을 담았던 상자만 사고 정작 구슬은 도로 돌려주었다는 내용으로, 근본적인 것은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택하는 행위를 비꼬는 말이다. 지금 각료 후보자들의 청문회를 보면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것 같으나 실은 공수가 바뀐 여야정당 간, 여당시절 당했던 일을 야당이 되니 똑같이 앙갚음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고질적이고 구태의연한 적폐정치는 결국 현명한 국민들의 표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017-06-16

경위(涇渭)가 없는 사회는 존재가치가 없다

▲ 강희룡 서예가경위(涇渭)란 말이 있다. 이 `경`과 `위`는 모두 중국의 강물 이름으로 경수는 강물이 몹시 흐리고, 위수는 강물이 아주 맑았다. 두 물줄기는 중간 지점에서 하나로 합쳐져 흐르지만 합쳐진 뒤에도 맑은 물과 흐린 물이 섞이지 않고 강 가운데 뚜렷한 경계를 그으면서 흘러갔다. 그래서 경위는 인품의 청탁(淸濁)이나 사물의 진위 또는 시비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어떤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세한 경위(經緯)를 조사한다. 이 경위의 한자는 원래 실의 날줄과 씨줄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전에는 삼베나 목화 등을 원료로 옷감을 짰다. 베틀에 세로줄인 날줄을 고정시킨 후 북으로 씨줄을 던진다. 이 때 세로줄인 날줄은 `경`이며 고정된 줄이어서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은 책을 `경전`이라 일컫는다. 반면 가로줄인 씨줄은 `위`이다. 씨줄은 실을 감은 북을 좌우로 움직인다. 이 날줄과 씨줄이 서로 엇물려 한 필의 옷감이 완성된다. 날줄과 씨줄이 켜켜이 쌓여 옷감이 완성되듯 인간의 일도 복잡하고 다양한 사정들이 쌓여 생겨난다. 그래서 일의 전개 과정을 달리 경위로 부르게 된 것이다.이렇게 본다면 일의 경위를 따진다고 할 때, 두 단어가 모두 맞으나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전자의 경위요, 일의 현재 상황과 위치를 따진다면 후자의 경위를 쓰는 게 맞다.왕정시기 한 나라의 공식적 역사기록인 제왕본기는 시간을 축으로 전개되며 당대의 역사를 살아간 개인의 열전은 공간의 축을 따라 펼쳐진다. 시간은 날줄이며 공간은 씨줄인 셈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시간이라는 날줄에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해간 수많은 개인의 행위를 씨줄로 먹여서 짜낸 다채로운 무늬이다.조선중기 문인인 성현 선생은 부휴자담론 아언(雅言)에서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것 속에 지극히 나쁜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부휴자담론은 선생이 부휴자라는 가공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에 나타나는 병리현상을 풍자 또는 비판한 책이다.여기에서 저자가 예로 든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 속에 지극히 나쁜 것이 들어 있는 사례로 바로 독버섯과 복어를 일컫고 있다. 매년 봄만 되면 빛깔 곱게 보이는 버섯을 식용으로 오인한 사고나 복어의 잘못된 요리로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사고가 발생한다.겉보기에 나쁜 것이 과연 속까지 나쁜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겉보기에 나쁜 것은 누구나 나쁘다는 생각에 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피해는 별로 크지 않다. 문제는 겉보기에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이거나 다른 것보다 더 좋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치명적인 독이나 해악을 품고 있을 경우이다. 독버섯이나 복어처럼 사람들이 그 색과 맛에 현혹되어 방심하다가 그 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면 그때의 피해는 훨씬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특정정당 의원 33명은 5대 개혁과제를 제시하고 지난달 31일까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일 년치 세비를 헌납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언했다. 하지만 약속기한 하루 전날인 지난달 30일이 돼서야 26명은 여론에 밀려 `꼼수발의`로 약속을 이행했다는 후안무치의 주장을 하고 있다.또한 정당을 새로 만들어 옮긴 의원 6명은 31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대국민 사과까지는 했으나 약속한 세비반납을 하겠다는 의원은 없었다. 당선에 눈이 멀어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꼼수발의로 무마하려는 철면피 행태에 비해 사과를 한 의원들이 그나마 더 책임 있는 입장표명을 한 것은 사실이나 1년 전 `대한민국과의 계약`이 대국민 사과만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이러한 행위 모두가 전자의 경위가 실종된 행태이다. 지역주의나 감언이설에 속아 지지해준 그들이 독버섯이나 복어의 독은 아닌지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감시해야 할 것이다.

2017-06-09

국회청문회와 공직자상

▲ 강희룡 서예가남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듣는다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더구나 합리적인 사고가 부족하고 흑백논리가 강한 한국인은 자신의 잘못을 듣는 것에 대해 더욱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우는 자신의 앎이나 행동을 부정하고 결국 자신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감정이 격해져 그 감정이 상대로 향하면 화가 되고 자기로 향하면 자괴에 빠지곤 한다.조선후기 학자인 유중교(1832~1893) 선생이 그의 `성재집`, `연거만지`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평소의 단상을 적은 토막글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글의 내용은 남에게서 자신의 잘못을 듣는 일은 여러 행운을 거쳐 찾아오는 세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주면 기뻐할 것이 셋이다. 내가 나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아 고치게 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남이 나의 잘못으로 인해 잘못되지 않은 것이 그 하나이고, 남이 나를 일러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또 그 하나이다`자기 부정이란 자신을 새롭게 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기존의 완고한 틀을 깨고 성장하는 데에 자기 부정은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이 나의 잘못을 들추어주는 것은 나를 묵은 틀에서 나오게 하는 반가운 두드림과도 같다. 더욱이 이 두드림을 듣는 일은 두 번의 행운을 거쳐야만 찾아온다. 만약 내가 잘못 생각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상대가 듣고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면 나의 잘못을 듣는 기회는 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행운이고, 상대가 나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을 것이니 내 잘못을 나에게 말을 해 준 것은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두 번째 행운인 것이다.2000년 처음 도입된 국회인사청문회제도는 국무총리와 대법원장 등 고위공직자에 적용되다가 2005년 7월에 국무위원 후보자 전원으로 대상이 확대되었다. 공직자후보에게 주로 검증할 5대 비리는 병역면탈,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에 그 초점이 맞춰져있으며 이러한 비리에 관련된 인사는 원칙적으로 고위공직에서 배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매번 국회청문회를 보면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로 표를 의식한 대선공약이 부메랑이 되어 이 비리에 걸리지 않는 후보자는 거의 없다. 정도가 심하여 낙마를 하는 후보자들을 볼 때 우리사회에서 고위공직자로 임명될 수 있는 상위그룹의 일상적인 불법이나 편법적인 생활에 삶에 힘든 국민들은 분노를 느낀다.세상의 귀함에는 두 가지 귀함이 있다. 하나는 남에게서 주어지는 귀함으로 지위와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내가 높은 지위에 오르면 남들이 나를 존대한다. 그러나 타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에 빼앗기는 것도 내 뜻과 상관없이 빼앗아 간다. 이런 유형의 귀함은 뺏기고 나면 더 이상 남들이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귀함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또 다른 귀함은 남에게 구하여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도 아니다. 높은 지위가 없어도 시골에 묻혀 지내도 듣는 자는 존중할 줄 알고 보는 자는 경대할 줄 안다. 또한 지위가 높거나 위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천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귀함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고 남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바로 재덕(才德)이다.선거 때면 표를 의식해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자신의 이익에 좇아 탈당을 밥 먹듯 하며, 자신들의 그런 행위를 궤변으로 합리화시키려는 정치인들을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옳고 그름을 살피지 못하다가 훗날 더 큰 이익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공자는 `속히 하려고 하지 말고, 조그만 이익을 보지 말라. 속히 하려고 하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좇으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경계하고 있다.

2017-06-02

보(洑) 철거도 고려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화양읍 야경(夜景)은 아름답다. 크고 작은 가로등과 가정집 전등이 청도읍성 조명과 어우러져 화사한 빛을 던진다. 야삼경에 느릿하게 승용차로 한적한 길을 가노라면 그 불빛에 아련해지곤 한다. 물을 댄 논에서는 개구리들의 합창경연이 한창이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그들의 노래에는 더러 절박함 같은 것도 묻어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그저 잠시 귀를 기울이며 소년시절 회상에 몸을 맡길 따름이다. 이팝나무와 아카시 꽃이 모두 져버린 가로에는 나무딸기가 서서히 자라고, 그들의 배후에는 6월의 향긋한 장과(漿果)가 내장되어 있다. 이따금 들리는 밤새 울음소리가 깊어가는 5월의 정취와 훈향(薰香)을 더한다. 그렇다, 눈부신 5월이다!여름을 방불(彷佛)케 하는 더위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남아있는 이 시절의 축복은 온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의 약동으로 춤추고, 살아있음을 축복하는 거나한 시절 아닌가. 그런 사품에 잠시 끼어드는 허망함에 헛웃음을 켠다. `자연보호`라는 시대착오적인 구호가 홀연(忽然)히 허탈하게 떠오르는 탓이다. 자연의 극미한 존재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그 자연을 보호하겠다고 설치는 꼴이 가관인 시절이 있었다.우리를 자연보호 슬로건보다 더 깊은 우울과 절망의 나락으로 끌고 간 토건기획이 이른바 `4대강 사업`이었다. 200만~300만년을 유구하게 흐르고 흘러 지금의 물길을 잡은 4대강. 그런 강에 칼질을 해대며 강바닥을 헤집고 세멘 콘크리트를 들이부은 희대(稀代)의 사기(詐欺), 4대강 사업. 친환경적으로 자연을 개발한다고 선전해대면서 22조원 넘는 돈을 재벌기업들이 나눠먹은 국민적 사기. 강은 부패와 오염으로 썩어가고 생명은 하나둘씩 강을 버렸다.얼마 전 문재인 정부가 4대강 보를 상시(常時) 개방하고 필요하다면 보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청량한 소낙비처럼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소식이었다. 애초부터 해서는 안 될 범죄수준의 사기행각이 4대강 사업이다. 흐르지 않는 강은 강이 아니라 호수다. 지하 용출수(湧出水)가 없거나 크고 작은 지류에서 적절한 수량이 인입되지 않는 호수는 죽는다. 우리 곁을 지키던 4대강은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다.`도덕경` 구절을 들어 나는 4대강 사업을 반대했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자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을 따르는 법이다. 장구한 세월 유장하게 흘러온 강을 개발논리로 무참하게 학살한 자들의 원죄가 불러온 참화(慘禍)는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우선 강을 살리고 강에 기대서 살던 뭍 생명을 소생시켜야 한다.17~18세기 계몽주의에 의지해 19세기에 개화한 1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하되 각각의 산업혁명 시기에 인간이 맞닥뜨려야 했던 각종 횡액(橫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자명한 자연 파괴의 후과(後果)를 치지도외하고 주머니 잇속을 챙긴 자들에게 이성과 합리성의 채찍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오직 지금과 여기, 나와 마누라, 자식새끼들의 이해관계에 함몰된 자들의 사적(私的)인 이익편취에 철퇴를 내려야 한다.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뭉친 정파(政派)의 앞잡이들과 고위관료, 토건재벌, 대학교수들이 한통속이 되어 벌인 희대의 사기행각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이 나라 금수강산은 비단 우리만 소유하고 향수하는 대상이 아니다. 대대로 물려주고 받아온 대물림의 공간이다. 어디 그곳에 포 크레인과 중장비를 들이대 사지(死地)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보의 상시개방 뿐 아니라, 보의 완전 철거까지 전향적으로 고려하는 담대한 실행을 기대한다.

2017-05-26

사도세자 기록과 대통령 기록물

▲ 강희룡 서예가우리는 사도세자(1735-1762)하면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세자를 그린다. 눈물로 그를 동정하며 그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책들도 당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친자식인 세자에게 대 처분을 내리자고 한 여인이다.`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를 살인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살인방식도 매우 끔찍하다. 정조의 생모이며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시어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라고 적고 있다. 즉 내관 김한채를 죽여서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고 목격담을 적은 것이다. 이 사건은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시인하고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이 후에도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정조가 책 `천유록`을 읽고 그가 죽인 사람의 수가 워낙 많아 제목을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으며 그 책 속에 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라고 적혀있다.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라고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 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온다.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인 패악이 세상에 드러나지만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으로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당시 신하들은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친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사도세자의 패악이 사초에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승정원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 유독 너덜거린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그리고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으며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조작은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가 말해주고 있다. 진실을 도려낸 조작을 효성스런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250년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 역대 대통령의 기록물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무렵 몇 달 동안은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하거나 심지어 밤에 불태웠다는 증언까지 더해진다. 인수인계 자료는 커녕 당장 처리해야 할 각종 현안들이 그동안 어떻게 진행돼왔는지 찾아볼 방법조차 없다. 지정기록물은 목록이 공개되지 않아 지난 정부에서 어떤 자료를 폐기하고 어떤 기록물을 봉인했는지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남기는 중요한 사료들의 증거인멸에 죄책감도 없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이 말은 청와대에 근무했던 관계자들이 남긴 증언이다.

2017-05-19

목민심서와 명이대방록

▲ 강희룡 서예가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고 관리들의 탐학비판과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농민의 실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또한 다산은 `백성을 위해서 목(牧)이 존재하는가, 백성이 목을 위해서 태어났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그 근원이 백성들의 생활상 필요와 자발적인 추대에 의해 여러 통치자와 권력이 발생했다고 적고 있으며, 200년 전 조선의 수령들은 오만스럽게 자신을 뽐내고 태평하게 스스로 안일에 빠져서 자기가 목자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고 질책하였다.명말청초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절동사학`을 창시하고 청대 고증학의 길을 개척한 황종희(1610~1695)도 `우리가 나가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요, 만민을 위한 것이지 한 성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치란이란 한 성씨의 흥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라며 왕조국가에서 관직에 나가는 목적을 `만민을 위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으니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공직자들의 정신자세는 `멸사봉공정신` 이외 다른 설명은 필요 없다고 본다.황종희는 `명이대방록`(1663)에서 `인류 역사의 초기에는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살며, 자신의 이익만을 구했다. 공공의 이익이 있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고, 공공의 해로움이 있어도 없애려는 사람이 없었다. (중략) 훗날의 군주는 천하의 이해관계를 온통 자신의 손 안에 쥐고는 모든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돌리고, 모든 해로움은 그대로 천하에게 돌리고 있다. 천하의 백성이 자기 뜻대로 살지도 못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모두의 공적인 이익이라 속여 그것을 추구하게 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명이`란 주역의 한 괘로서 빛이 어둠 속으로 숨은 암담한 현실을 나타내는 것에 빗대어 당시의 어지러운 세상을 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군주가 없다면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살며 자신의 이익이라도 챙길 수 있으리라고 설명하고 있다.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뽑는다. 하지만 선거 후 국민 앞에 공약했던 모든 공약들은 대개 형체만 남고 금세 사라진다. 이는 공인으로서의 공의 정신이 실종된 탓이다. 왕조시대의 군주는 천명의 대행자이나 오늘날의 그들은 민의에 복무한다. 왕정시대의 천명조차도 민의에 따라 변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오늘의 민주정치에서야 다시 말할 나위가 있으랴. 난무하는 후보자들의 감언은 저열한 유권자들의 이설을 만나 비로소 은밀하게 화동하기에 감언과 이설은 결코 홀로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선거란 유권자의 중의를 모아 임기 동안 국정을 맡길 사람을 뽑는 일이다. 고르는 이와 고름을 받고자 하는 이 사이에는 건강한 긴장이 필요하다. 당의 대학자 한유(768~824)는 사람을 천거하는 논리에서 산의 나무와 저자의 말을 천만인이 모두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그것이 곧 그 나무가 동량이 되지 못하고 그 말이 잘 달리는 말이 아닌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장석(전국시대의 대 목공)과 백락(말을 잘 준별했다 하는 주대의 인물)이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재목감이 아니요 준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여 년 전 당시 사회 모순을 제거하는 데 제도적 개혁과 관료들의 청백리사상에 따른 윤리적 제약과 관리의 합리화를 찾고자했던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대선도 끝났다. 이제 대통령 당선인과 새로 임명되는 고위공직자들은 헌법 1조를 되새기며 국민 앞에 약속한 공약들을 국민들이 쥐어준 권력으로 임기동안 차분하게 실천해 나가는 일만 남았다.

2017-05-12

사상누각인 대선공약

▲ 강희룡 서예가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시 변호인단은 검찰의 수사결과를 두고 사상누각이라며 폄하했다. 즉 검찰이 조사해 최순실 일당을 기소하고 박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입건 한 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기초가 부실한 수사결과라는 것이다. 사상누각이니 공중누각이니 하는 말은 원래 토대가 약하거나 토대가 없는 일과 사물 또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근거 없이 생각만 크고 비현실적인 공상에 사로잡혀서 현실은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능력과 역량도 모른 채 터무니없이 큰 꿈만 꾸고 있는 것은 허황된 욕망에서 오는 사상누각인 것이다.이 사상누각은 원래 공중누각에서 유래됐다. 공중누각 우화가 기록된 책은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백유경`에 나오는 비유에서 유래한다. 이 경전의 원래 이름은 `백구비유경`으로서 인도의 승려 상가세나가 저술한 것인데 중국에는 남조의 제나라 때 들어왔다. 비유를 담은 이야기 98편으로 사람들에게 불교의 진리와 세상살이의 슬기를 깨우쳐 준 경이다.백유경의 기록에 옛날 어리석은 부호가 다른 부잣집에 갔다가 3층으로 된 높고 화려한 누각을 보고서 몹시 탐이 났다. 자기도 재산이 그만 못지않은데 어째서 지금까지 이런 누각을 지을 생각을 못 했을까 안타까워하다 즉시 목수를 불러서 삼층 누각을 지을 수 있는지 물었다. 목수가 저 집도 내가 지은 것이라 하자, 자기에게도 저런 누각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목수는 청을 받아들여 일층부터 짓기 시작하자 어리석은 부자는 왜 자기가 부탁한 3층 누각을 짓지 않고 1층부터 짓는가? 의심해 물었다. 목수가 아래층을 지어야 2층을 올리고 2층을 지어야 3층을 올릴 수 있다고 설명해도 부자는 아래 두 층은 필요 없고 맨 위의 3층 누각만 필요하다고 고집했다.일과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 과정과 결과, 목적과 수단이 있다. 무슨 일이든 시작부터 정당한 과정을 거치고 올바른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런데 흔히들 남이 이룬 화려한 결과에만 취해 그것을 선망하고 탐을 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들인 수많은 시간과 노력의 과정을 보지 못한 채 결과만 부러워하고 탐을 내는 것은 바탕과 토대가 되는 일층과 이층은 버리고 맨 위 삼층 누각만 바라보는 이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바 없다.조선조 중종 때 박영(1471-1540)선생은 송당문집 `공중누각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안락선생은 낙양에 살았는데 공중누각을 짓고 스스로 무명공이라고 호를 붙였다. 공이 이 누각을 짓기 시작한 것은 모든 것이 혼돈으로 있던 태초로서 궁극의 하나가 나뉘던 때이다. (중략) 우뚝하게 높고도 높아 하늘, 땅과 함께 서서 틈이 없으니 누가 누각과 공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임을 알랴! 아! 사통오달하는 오묘한 경지를 정이천이 아니면 누가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여기서 안락 선생은 북송의 유학자 소옹의 호이다. 소옹의 학문이 스케일이 굉장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경지를 넘나들지만, 실은 현실적 토대와 근거가 없는 공중누각이나 마찬가지라고 소옹의 학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19대 대권주자들 역시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국가경영의 비전은 없고 정쟁으로 이전투구하고 있다. 정책토론이기 보다 색깔론이 나오고 `보수니 진보니`, `적이니, 주적이니`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서로를 헐뜯는 유치한 입씨름을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이런 행태와 마구잡이식 공약은 결국 사상누각과 같아 지켜지지 못하며 그 대가는 국민들이 치러야 한다.5월 9일 있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유권자의 냉철하고 현명한 선택만이 대통령의 주어진 임기 동안 그나마 속앓이를 덜 하게 할 것이다.

2017-04-28

세월호와 조선의 해상참사

▲ 강희룡 서예가온 세상은 꽃 잔치로 봄을 말하지만 우리 국민의 마음 한 편이 아직 차가운 바다를 향해 있는 것은 3년 전 쓰라린 그날의 기억 때문이다. 2014년 4월 15일 인천을 출항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다음날 아침 무렵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특히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국가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기구나 컨트롤 타워는 보이지 않았다. 행정자치부가 중심이 된 재난체계는 무용지물이었고 사고 발생 후 꾸려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각 기관이 보고하는 숫자를 모으는 엉터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국가 통치자인 대통령은 오후 5시 15분쯤에야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듯 엉뚱한 질문으로 국민의 공분을 더 키웠다. 사건은 책임자 없이 입을 꾹 닫은 채 3년이 지났다. 더욱이 현재 세월호는 흉측한 몰골로 육지로 올라와 목포 신항에 거치되어 있으니 당시의 무기력과 찢어지는 슬픔, 분노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드리우고 있다.효종실록에는 조선 최악의 해상 사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각 고을의 군함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가 훈련을 하는데, 거센 비바람이 일어나 영암, 강진, 부안, 진도 등 고을의 군함이 모두 침몰했다. 사망한 수군이 1천여 명이었고 진도 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이 해상사고는 전라도 앞바다에서 실시된 대규모 군사 훈련 도중 갑자기 풍랑이 몰아닥쳐 수많은 군함이 침몰하여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군사가 무려 1천 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단일사고의 희생자로서는 최대 규모이다.사고당시 함대를 통솔한 이익달은 1644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몇 고을의 수령을 거친 후 1656년 전라 우수사에 임명됐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별다른 이력도 없는 그의 우수사 임명을 부당하다며 체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효종의 뜻이 있었지만 부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참사가 일어났으니 시험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이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훈련 일자가 다가오자 이익달의 부하들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며 훈련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으나 이익달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훈련 시작 하루 전에 모든 전함을 출항시켜 바다 위에서 대기하게 했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풍랑이 몰아닥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풍랑을 만난 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358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이 두 해상참사의 공통점은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점과 젊은 영혼들이 수장된 대형 참사라는 점이다. 다른 점은 조선의 해상훈련사고는 배가 전함이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수군의 해상 훈련 중 일어난 공적행위 중 일어났으니 호국영령들이라는 것이다.반면 세월호는 여행자나 일반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해상을 통해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침몰사고이다. 침몰 당일 모든 언론들이 시시각각 보도하는 상황을 전 국민이 시청하였지만,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이 그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결국 `대통령의 7시간`은 진실을 밝혀야 할 정치 이슈화가 되었다. 세월호는 야당에 의해 정치판의 중심에 주저앉아 전대미문의 대통령탄핵에 일조를 하게 된다. 이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재앙은 유능한 지도자와 각 분야마다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의 선택만이 해결할 수 있다. 능력사회가 아닌 인맥사회는 이미 국가의 기능이 상실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017-04-21

17세기 초의 당쟁과 21세기 당쟁

▲ 강희룡 서예가조선의 당쟁은 선조 8년(1575)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된 이래로 당파 간의 경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선조 후반 서인과 북인 간에는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북인이 집권 세력이 된 후에는 북인 간에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으며 특히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선조의 후계자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북인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에는 당시의 당파 분열과 인물 간의 갈등 요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기록에 의하면 대북은 이산해와 홍여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이며, 남이공과 김신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은 소북이라 하였다. 소북이 왕의 견책을 받자 이산해와 홍여순이 서로 권력을 다투어 이산해 쪽은 `육북(肉北)`이 되었고, 홍여순 쪽은 `골북(骨北)`이 되었다. 이이첨의 상소로 홍여순을 탄핵하자 임금은 둘을 내쫓고 다시 서인을 참여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체찰사인 이귀가 스스로 영남에서 돌아와 정인홍이 고향에 거주할 시의 불법적인 일을 논하자 정인홍은 `신은 성혼, 정철과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또한 유성룡과도 유쾌하지 못하여 지금 그 무리가 신을 미워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며 상소하였다.(중략) 대사헌 황신이 성혼의 무고함을 상소하자 왕은 황신을 교체하고 조정에 있는 모든 서인을 내쫓고 간사한 성혼, 독한 정철이라는 교서를 내리고, 유영경을 이조판서로 하고 정인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평생 당이 없었지만 이때 유영경이 이조판서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므로 당에서 탄핵당하는 바가 되었고 정철의 심복으로 지적되어 정승직을 면하게 했다. 정인홍은 왕의 부름을 받자 먼저 최영경을 국문했을 때 대간으로 있었던 구성을 유배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정치를 전임하자 정인홍의 무리를 많이 파면하고 교체했으며 오로지 소북만을 등용했다.이 기록에는 북인 내의 소북과 대북, 육북과 골북의 분열상과 기축옥사, 성혼과 정철에 대한 탄핵 등을 빌미로 북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선조 후계자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은 치열한 대립을 했다. 선조는 국난시기를 맞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망설임이 없었으나 후궁 출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선조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선조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기에 이러한 분위기는 조정에도 감지되어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도 생겨났으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의 줄서기는 마찬가지였다.영창대군의 탄생으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립되었으며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를 잡았다. 정인홍측이 유배되자 소북에서 유영경을 지지했던 이들을 `유당`이라 부르고 붙지 아니한 이들을 `남당`이라 불렀다. 지금의 친박과 비박인 셈이다. 영창대군의 왕의 계승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으나 1608년 선조의 급서로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가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정권의 실세였던 유영경을 탄핵했던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되어 `왕의 남자`가 되어 정치와 사상계의 일선에 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1세기 오늘날 우리의 정당정치 역시 친박, 비박, 친문, 비문 등 분열된 패거리 정치에 빗대어 볼 때 선조 후반의 북인과 서인의 대립, 북인 내의 자체 분열이 과거의 옛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것이 지금의 정치 현실이다.

2017-04-14

적폐청산은 석서(碩鼠)부터 퇴출시켜야 한다

▲ 강희룡 서예가오늘날에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대부분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으나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고양이를 키우는 목적이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기 위해 키웠다. 당시 고양이는 쥐를 잡는 기본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큰 이로움을 주는 고양이와 관련된 글을 종종 남겼다. 조선중기 학자 권호문(1532~1587) 선생은 `송암집`, `축묘설`에 이렇게 적고 있다. `대개 짐승의 몸을 하고서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으며,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라에서 주는 옷을 입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들이여, 어찌 우리 집의 고양이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쥐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로 우리의 주위 어느 곳에서나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둠 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쥐의 습성을 닮은 자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곡식을 훔쳐서 자신들의 소굴로 가져가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쥐를 `석서`라 일컫는다. 석서는 작은 쥐보다 훨씬 더 큰 쥐를 말한다. 이 단어는 본래 시경의 `위풍 석서`에 나오는 시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로써 기장을 훔쳐 먹던 큰 쥐를 후대에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위정자나 탐욕스러운 공직자나 범죄자를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공직자가 되어 국가에서 주는 녹봉으로 살면서 고양이의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백성들에게 폐해를 주는 쥐들을 잡지 않고 되레 그들의 이욕만 취한다면 이들이 바로 석서이며, 선생은 축묘설을 통해 이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70년대 유신독재로 암울했던 시대에 김지하 시인은 `오적`이란 시를 발표해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당시 풍자시의 백미를 장식한 이 시에서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재벌, 군 장성, 장·차관을 오적으로 지목했으며 이들을 지칭하는 모든 한자에 개견 변을 넣어서 말을 만들었다.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공익은 도외시한 채 개인이나 집단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자들이 바로 현대판 `석서`이며 청산돼야 할 적폐세력인 것이다.이들은 비교적 사회의 높은 위치에 있어서 그 위세가 대단하고 서로 연줄로 맺어 있어서 그 생존력도 매우 끈질기다. 때문에 힘없는 고양이로는 퇴치가 힘들다. 이들에 맞설 만한 위세를 가진 고양이가 바로 오늘날 권력기관인 검찰인 것이다. 하지만 임명권자로부터 독립되지 못한 검찰은 그 역할이 위축되니 사회는 자연히 석서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쥐를 잡아야할 고양이가 자신의 직무에 태만할 경우 그 순간부터 고양이도 석서로 변해버린다. 정의를 세우고 국민에게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기관이 국민에게 해독만 끼치는 석서로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권력으로 포장된 큰 악을 퇴치해야만 사회가 맑아진다.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의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국민 앞에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하지만 석서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집권한 세력이 국민이 쥐어준 권력을 통해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초심을 잃을 때 그들 또한 석서로 변한다. 청산되어야할 적폐세력의 중심에 있지나 않을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2017-04-07

사회는 신뢰로 존재한다

▲ 강희룡 서예가겨울 철새인 기러기는 전통시대에는 긍정적 이미지였다. `규합총서`에는 기러기에 신·예·절·지의 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암·수컷의 사이가 좋다고 해서 전통혼례에서는 평생 제짝 이외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기러기를 목각으로 만들어 전안이라고 하여 혼례에서 예물로 사용했다. 말하자면 부부간의 신뢰의 상징인 셈이다. 이동할 때 경험이 많은 기러기를 선두로 하여 V자 모양으로 높이 날아가는 것은 서열과 질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러기에 대한 우화가 있다. 남북을 오가는 철새다보니 수많은 마리가 한 무리가 되어 한가롭게 날며 조용히 모여서 물가에서 잠을 잔다. 잠을 잘 때는 보초 기러기로 하여금 사방을 살피게 하고는 그 속에서 대장 기러기들이 잠을 잔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면 즉시 보초가 알리고 다른 기러기들은 깨어나 높이 날아 오르니 그물도 펼칠 수 없고, 주살도 던지지 못한다.이에 사람들은 불빛을 가지고서 기러기를 잡는다.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항아리 속에 촛불을 넣고 불빛이 새지 않도록 감추어서 가지고 간다. 조용히 다가가서 촛불을 조금 들어 올린다. 보초가 놀라 울고 대장 기러기도 잠이 깬다. 그 때 촛불을 다시 감춘다. 조금 후 기러기들이 다시 잠이 들면 또 전처럼 불을 들어 보초 기러기가 울도록 한다. 이렇게 서너 번 하는 동안에 기러기들이 깨어나 보면 아무 일이 없으니 대장 기러기가 도리어 보초 기러기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쪼아 버린다. 그러면 다시 촛불을 들더라도 보초 기러기가 쪼일까 두려워서 울지 못한다. 이때 사람이 덮쳐서 모두 잡아 버린다는 일화다.최연(1503~1549) 선생은 `간재집` `안노설`에서 `보초 기러기는 참으로 충직하고 사람들의 꾀는 정말로 교활하며 대장 기러기의 미혹은 심하기 그지없도다. 그러나 어찌 기러기뿐이겠는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편안함만 찾으며 고식적으로 대처하여 외적을 돌아보지 않고, 간교한 적의 꾀에 놀아나서 도리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불신해 끝내 적의 독수에 당해도 깨닫지를 못한다. 크게는 나라가 망하고 작게는 패가하니 이 또한 미혹한 것이 아닌가! 기러기가 비록 미물이지만 큰 것을 깨우쳐 주니 내가 이에 보초 기러기에 대한 이야기를 짓노라`고 했다.이 우화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대장 기러기의 안이함과 멍청함이다. 충직한 보초가 누차 경고했건만 편안함만 찾아서 고식적으로 대처했으며, 적의 꾀에 속아서 충직한 보초를 불신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보초 기러기의 충직함이다. 간교한 적의 꾀에 놀아나 비록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충직만큼은 인간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는 것이다. 충신은 곧잘 간신으로 둘러싸인 주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신의 진정은 죽임을 당한 뒤에야 밝혀진다는 것이다.이솝우화 중의 하나인 양치기소년과 비슷한 줄거리다. 다른 점이라면 양치기 소년은 재미삼아 거짓말을 했고, 보초 기러기는 충직하게 사실대로 경보를 울렸다는 점이다. 정직과 거짓이라는 정반대의 원인행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별 차이가 없다. 어떻게 정반대의 의도가 동일한 결과를 산출했을까. 그것은 둘 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상호신뢰는 사회적 자산이다. 무너졌을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매우 크며 대신할 만한 대체재도 없다. 이리 보면 신뢰는 자산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주역`의 `중부`괘에 `헤아리면 길하다`고 했는데 이는 믿을 바를 살피고 헤아려서 따라야 길하다는 말이다.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나 운용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잃어버리면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믿음이 정당성을 얻는 것은 잘 헤아리는 데 달려있으므로 지금 대선주자들이 쏟아내는 공약들을 국민들은 잘 살피고 헤아려야 할 것이다. 앞으로 또다시 탄핵되는 대통령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는가.

2017-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