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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거짓으로 피는 꽃

오낙률시인·국악인 살면서 그리움 하나쯤 가슴에 묻고 살지 않은 이가 있을까?봄을 맞아 산이나 들판 혹은 공원 등에서 이름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운 수많은 생명이 다투어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헤치고 있다. 팬데믹으로 고통받던 우리네 인간도 거리두기 제한이 풀렸으니 저 대자연의 대열에 끼어 아름답게 피어날 그리움의 씨앗들을 사방에 뿌리며 실로 몇 년 만에 봄 다운 봄을 즐기게 될 것이다. 직장인, 소상공인, 예술인 등 많은 국민의 가슴 가슴에 지금쯤은 작고도 큰 희망의 꽃송이가 봄꽃 터지듯 번지지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움츠려져 좀처럼 피어나지 못하던 인간의 꽃 무리가 다발로 모여 피는 야생화 군락처럼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피어날 것이다.꽃이 가짜로 필 수 있다면 꽃의 존재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만약에 눈속임으로 예쁘게 피는 꽃이 있다면 그건 아름답기에 앞서 신기한 것이거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꽃임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꽃을 두고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찬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말 대신에 현혹이라거나 유혹이라는 말이 그 꽃에 매겨지는 기본 이미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서 가끔은 그 꽃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인간의 웃음을 꽃의 반열에 올려놓고 보면, 앞에서 말한 ‘거짓으로 피는 꽃’을 인간의 꽃밭에서 종종 만날 수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좀 그렇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4월의 꽃밭에서 가슴 한쪽에 작고도 시린 그늘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봄이면 딜레마처럼 생각나는, 인간의 원죄 같은, 거짓으로 피는 사람의 꽃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좀 아리다. 특히 선거를 앞둔 이맘때면 그렇게 거짓으로 피는 꽃이 무리 지어서 피는 것 같아 씁쓸하다.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시신에서 떠나는 영혼은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에게 주었던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는 것 또한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에게서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는 것처럼 슬프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우리네 인간사 중에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운명처럼 몇 번은 만나야 하는 꽃이 가짜로 피는 인간의 꽃이라면 그것이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이렇게 찬란한 봄에 저렇게 온 대지를 뒤덮으며 거짓 없이 피어나는 식물들의 꽃을 보며 치유와 위안을 더 크게 얻게 되는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꽃이란 그리움 그 자체이다. 꽃은 세상 아름다운 것의 대표이며 핵심이다. 그리고 그립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표현의 역설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조상님이 그립고, 가고 없는 배우자가 그립고 나를 즐겁게 해주던 어느 날의 이성이나 정답게 지내던 형제며 친구가 그리운 것은 모두 과거 그들과 맺어 놓은 인연이 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 인간은 그리운 꽃만 피울 일이다. 훗날에 누군가가 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그런 꽃만 피울 일이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에서 피는 꽃이, 오늘 같은 봄날에도 한치 부끄럼 없이 대자연에 녹아들어 대자연의 꽃처럼 아름다워야 할 일이다.

2022-04-27

대형산불 속에서도 불평등은 있었다

오낙률시인·국악인 삼월이 꽃망울이라면 사월은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계절은 그렇게 기후의 변화를 통해 형형의 색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만물의 생사를 관장한다. 해마다 사월이면 수많은 종의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흐드러져 핀다. 많은 종의 식물이 한 톨의 씨앗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꽃들의 전쟁, 그 현장이 봄이 아닌가 싶다.봄이라는 계절은 조금의 편협함도 없어 마치 무슨 종목별 경기를 진행하듯 유사 종의 꽃들끼리 같은 시기에 피게 하여 수정을 경쟁하게 한다. 벌 나비의 도움으로 수정이 이루어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봄바람에 의해 수정이 이뤄지는 꽃도 있고 그 수정의 방법 또한 다양하다. 수정이 잘 이뤄진 꽃은 예쁜 열매를 얻고, 그렇지 못한 꽃은 떨어져서 그냥 꽃이었던 기억으로 소멸하고, 그 사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예년 같으면 벌도, 나비도, 산새도, 우리네 인간도, 한창 꽃 잔치에 어울려 분주히 행복을 만끽할 시기이다. 그러나 봄꽃은커녕 생명의 새싹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있다. 대형산불로 폐허가 되어버린 동해안의 봄은, 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검어,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하다.동해안 대형산불에서도 민초의 설움이 있었다. 울진 금강송 군락지를 지키느라 소방헬기와 진화 인력이 한곳으로 집중되었고, 덕분에 금강송 군락 주변의 잡목림은 버려진 잡목이 되어 서러운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순차적 진화에 희망을 걸었다가 귀족림 보호라는 명분에 진화 인력과 장비를 빼앗기고, 절망하며 사라진 잡목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은 생각과 함께 가슴 한쪽이 먹먹하다. 인간의 이용 가치라는 잣대로 보면, 일부에 해당하는 금강송 군락지가 삼림 대부분을 차지하는 잡목 군락지보다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림을 먼저 구하느라 차등의 순위로 밀려서 희생된, 그보다 몇 배나 더 넓은 서민림을 생각할 때,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사람이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땔감이 귀하던 시절/많은 종의 나무들이 잡목으로 낙인찍혀/땔감으로 사라지던 시절이 있었다. //오직 소나무만이/산야에서 보호받으며 살던/그런 시절이 있었다…. 계절이 넘나드는 길목/성법령에 올라/발아래 산경(山景)을 보니/아서라/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잡목이라 이름 지어져 핍박받던/오리나무, 물박달나무, 상수리나무, 층층나무,/자작나무, 때죽나무, 왕 버드나무. /수많은 종의 나무들이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밀림을 이루고 있다//이제는 그들이/우리네 강산을 지키고 있다.” -오낙률 시 ‘이제는 산천에도 봄이 들었다’ 전문아름드리 금강송이 자라는데도 수십 년, 아름드리 참나무나 버드나무가 자라는 데도 수십 년, 금강송이거나 잡목이거나, 아무 탈 없이 삼림 그 자체로 존재할 때는 그 군락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산불이 나고 보니 확연히 그 신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아마 인간의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다.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