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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방하착(放下著)

김병래시조시인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고 혼자 산속에 들어가 살다보니 어느 샌가 암 덩이가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를 더러 듣는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삶에 대한 미련조차 버렸을 때, 오히려 죽음이 비켜가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이 진리인 까닭이랄까. 예수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자기를 버린’ 기독교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물론 진정 하심(下心)을 가진 불교도를 보지도 못했다.텔레비전 종교방송에 나오는 유명 설교(설법)자들도 대다수가 덕지덕지 아집과 독선에 찌든 모습이었다. 입으로 청산유수 경전과 교리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집과 독선의 도그마에 더 깊이 빠져 있는 걸 보게 된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예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비록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고, 관자재보살은 오온(五蘊)이 다 공(空)임을 조견(照見)하고 일체고액(一切苦厄)을 건너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空)이고 무(無)인데 무엇에 집착을 하고 무얼 안다고 잘난 체 하는가,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교인들의 헌금으로 호의호식하고 치부(致富)하는 목사들, 정치적 이념에 함몰되어 사리분별을 못 하는 신부들, 주지자리를 놓고 유혈난투극을 벌이는가 하면 신도들 시줏돈으로 룸싸롱에 드나들고 도박판을 벌이는 승려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지렁이들보다 무얼 잘 안다는 자들이 사실은 예수나 붓다에게서 훨씬 더 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사랑이란 그저 사랑하는 것이고, 공(空)은 무(無)일 뿐인데 도대체 무얼 알고 뭐가 잘났다는 것인가, 일찍이 노자(老子)는 도(道)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도(道)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도니 법이니 떠들어대는 자체가 부질없다는 것이다.무얼 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속박이고 감옥이라는 걸 깨닫는 일은 쉽지가 않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보다도 더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안다’는 독선과 아집이다.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창녀나 도둑놈들이 목사나 승려들보다 오히려 예수나 붓다에 더 가까울 수 있는 까닭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처럼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진면목이 보이는 게 아닐까.종교계가 그럴진대 정치판이야 오죽할까. 권력에 눈이 멀고 당리당략에 함몰되면 아집과 파렴치의 화신이 되기 십상이라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권력의 칼자루를 쥐면 법이고 윤리고 다 팽개치고 자기편이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비호하고 밀어붙이는 후안무치가 판을 치고 있다. 검찰이 지난 정권의 비리에 칼을 휘두를 때는 박수를 치더니 그 칼끝이 자신들을 겨누자 온갖 협박과 중상모략으로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혈안이 된 정부와 여권의 작태가 참으로 악착스럽고 노골적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쯤에서 그만 내려놓기 바란다.

2020-07-02

속절없는 교육부 시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절기는 하지(夏至)를 지나 소서(小暑)로 향하고 있다. 소서를 글자대로 풀이하면 작은 더위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규칙대로 움직일 때의 일이다. 철을 잊은 인간 사회에는 더 이상 절기의 의미가 없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뉴스가 있다. 제목은 “겨울왕국 시베리아, 이상 고온으로 38도 폭염”이다. 제목만 보면 뉴스 제목이 아니라 환경 재앙 영화 제목 같다.“북극권에 속해 세계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꼽히는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40도에 육박하는 이상 고온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겨울철 기온이 영하 50도 밑으로 떨어지는 (….)”영하 50도에서 영상 38도의 온도 차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산술적으로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온도 차에 시베리아 지역의 생명체들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철 잃은 사회가 다시 절기에 맞춰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서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소서에 하는 대표적인 농사일은 논매기이다. 이때를 놓치면 논은 잡초로 뒤덮인다. 그러면 한 해 농사는 망치고 만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소서 때는 새 각시도 모심는다.”이다. 속담의 의미처럼 예전 소서 때에는 갓 시집온 새색시조차도 일을 거들만큼 바빴다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논매기라는 말이 참 낯설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조차 보기 힘든 광경이 논매기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는 하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자연의 순리대로 살던 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새로운 것에 대한 무 조건적인 거부는 있을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명 변화도 필요하다. 변화에도 규칙과 조화와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 만이 모두에게 행복을 준다. 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기형적이다. 그 기형에 지구와 인간이 불 파고 있다.최근 필자는 기형적인 뉴스를 보았다. 제목은 “교사들 아프면 쉬어라, 교육부, 학교에 지침 재강조”이다. 속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육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낼 수도 있다. 필자는 교육부에 묻고 싶다. 대안학교 교사도 아프면 쉬어도 되는지! 교육부의 답을 알기에 굳이 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 교육부 답은 “대안학교는 스스로 알아서 하세요!”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교육부의 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행정 명령을 어겼다고 엄포를 놓는 곳이 이 나라 교육부이다.문재인 정부의 국가 비전은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다. 이 말을 볼 때마다 “정의”의 뜻에 대해 생각한다. 정의(定義)! 과연 이 나라와 교육부에 정의가 있을까?벌써 7월이다. 다들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 덕분에 우리 사회가 그나마 지금처럼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감을 못 잡는 곳이 있다. 교육계이다. 무늬는 수업이지 실상은 학생들을 학교 대신 학원으로 내모는 괴이한 수업이 바로 온라인 수업이다. 가르침은 없고 과제만 있는 과제 수행 중심 온라인 수업은 수업이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도 교육부는 들을 생각이 없다. 소통은 없고 아집만 있는 교육부 시계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을 무색하게 만들며 오늘도 속절없이 잘 가고 있다.

2020-07-01

장원급제 납시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지난 주말 포항지역의 연일향교에서는 다소 특별하고 이색적인 백일장이 열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 백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같은 시문(詩文) 겨루기와 시상식 등을 옛 과거장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대과 과거제도의 형식을 빌어 치뤄진 백일장에 급제한 33명의 초등학생들은 갑과, 을과, 병과 등 수상 훈격에 따라 고유한 어사복으로 갈아입고, 특히 장원급제생에게는 연일향교 전교(典校)가 직접 교지(敎旨) 형태의 족자 상장과 어사화를 하사하는 등 시종 이채롭게 진행됐다. 또한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진 행사장 입구에서는 호패, 장명루(오색팔찌) 만들기와 가훈, 좌우명, 부채 써주기 등의 다양한 전통체험코너가 함께 열려 다채로움을 더했다.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은 문화재청이 2014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사)한국예절녹색교육원이 주관하고 포항시와 연일향교가 후원한 ‘과거제 재현 제1회 어린이 백일장’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이번 백일장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선비임을 재인식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포은 선생의 충효예의를 표상으로 하여 인성과 재능을 길러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기 위해 개최됐다.선현의 얼을 기리고 충효예절과 인성지도로 전통과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한국예절녹색교육원의 기획과 노력이 돋보인다. 한국예절녹색교육원은 수년 전부터 연일향교와 연계하여 충효예절학당, 선비체험, 시(詩)가 있는 야(夜)한 향교, 전통혼례, 인문학콘서트 등의 다양한 ‘살아 숨쉬는 연일향교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지역민들과 호흡하며 체계적이고 밀도 있게 추진하고 있다.향교는 조선시대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여러 성현들을 배향(配享)하며 한국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다양한 문화체험활동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일은 향교나 서원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현대에 맞도록 새롭게 재해석하여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옛것이고 오래된 것이라 해서 방치하고 보존에만 급급해하기 보다는 지역과 특성에 맞는 문화적인 아이템이나 콘텐츠로 개발, 접목하여 문화유산의 활용도와 가치를 높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전통이나 구습들은 지루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사회 전반에 참으로 가까이 와있고 깊게 스며든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전통이나 문화는 우리 스스로 아끼고 가꾸고 지켜나갈 때 그 가치와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 뿌리 약한 나무는 이내 시들고 말라버리듯이 전통의 기반이 취약해지면 저력과 자생력이 약해진다. 가뜩이나 움츠러들고 어려운 때, “장원급제 납시오!” 같은 외침이 가뭄의 단비 같이 지역사회의 문화마당에 울려 퍼졌으면 한다. 아울러 전통의 현대화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는 희망과 위안의 손길이 문화 속에서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2020-06-30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가르침

김현욱 시인괴로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상태. 또는 그런 느낌’이라고 나온다. 유의어가 재미있다. 쓰라림, 어려움, 고통, 고충, 아픔, 고초, 곤란, 고(苦)가 괴로움의 비슷한 말이다. 괴로움의 옛말은 ‘고모’, 준말은 ‘괴롬’이다. 한설야의 소설 ‘황혼’에 “괴롬 많은 그 길을 걸어갈 근기가 있을까?”라는 예문이 나온다.뜬금없이 괴로움 이야기를 꺼낸 건 얼마 전에 읽은 기사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정신건강이 위태롭다는 내용이었는데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30세대의 공황장애는 2015년 3만1천674명에서 2019년 6만1천401명으로 93.8% 증가했다고 한다. 우울증도 2015년 12만3천339명에서 2019년 22만3천71명으로 80.8% 늘었고, 조울증은 2015년 2만6천915명에서 2019년 3만8천825명으로 44.3% 느는 등 매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단다. 정신과 진료 기록이 남을까봐 병원을 찾지 못하는 숨은 수까지 합하면 실로 놀라운 수치다.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괴롭다’라고 한다. 통계만 놓고 보자면, 우리 주위에 괴로운 사람이 너무 많다. 질리언 웨어링의 사진 ‘나는 절망적이다’를 보면 말쑥한 양복차림의 청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고 서 있다. 누구라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종이에는 “나는 절망적이다”라고 쓰여 있다. 어리둥절하다. 그의 밝은 모습과 그가 들고 서 있는 글귀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다. 사진작가 질리언 웨어링은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종이에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은 같지만 겉모습과 속마음은 이토록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않는가.나도 한때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괴로움의 나날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받아들이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 아프다고 표현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아프면 드러내야 한다. 상처는 숨기면 곪는다. 곪고 곪으면 정말 방법이 없다. 도려내는 수밖에.그리고 가장 중요한 깨달음. 감각적 욕망을 향해 미친 듯이 쫓아다니며 자기 자신을 소진하던, 어리석은 ‘나’를 이제야 발견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아프고 괴로웠던 게 내 인생의 전화위복이었는지 모르겠다. 크게 아프면 크게 성장한다. 2천500년 전에 괴로움의 실체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길을 깨달은 사람이 있다.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 핵심이다.수많은 청년들이 정신적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감각적 욕망은 행복이 아니고 괴로움의 씨앗이다. 불교는 극락왕생이나 부처님 가피를 바라는 종교가 아니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삶이 괴롭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시작하면 좋겠다.

2020-06-28

상기하자 6·25

김병래시조시인‘아아 잊으랴 ,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박두진 시인이 지은 이 노랫말을 곰곰이 새겨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고 원통했던가 짐작이 간다. 이 피맺힌 원한의 노래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금지곡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가사를 바꾸기도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밥술이나 먹고 살만해 졌다고 과거를 깡그리 왜곡하고 폄훼하는 어리석음으로 얻는 것이 뭐겠는가.상기하자 6·25!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에 외치던 구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잊지 말자는 것인데, 상존하는 북쪽의 위협을 환기시켜 민심을 단속하려는 구호였다. 그런데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금기시되고 잊혀졌다. 수백만의 사상자가 나고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한 민족 최대의 비극을 과연 그렇게 잊어버려도 되는 것일까?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6·25 동족상잔은 김일성의 야욕이 아니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참극이었다. 민족을 위하는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어찌 동족의 가슴에다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을 도발할 수 있겠는가.동족을 죽인 6·25전쟁을 강대국들의 대리전이니 뭐니 하면서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있다. 남이 시킨다고 부모 형제를 죽여 놓고 제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걸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남이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김일성이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스탈린을 찾아가서 애걸을 하지 않았던가. 강대국들에 의해 나라가 갈라졌으면 민족이 합심으로 다시 뭉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동족상잔의 구실과 핑계가 된단 말인가.김일성이 적화통일 야욕으로 전쟁을 도발한지 70주년이 되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6·25전쟁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고 거듭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은 천만 번 부관참시를 한들 만분지일도 풀리지 않을 원한일진대. 남북을 막론하고 전범 김일성을 호도하고 비호하는 자들은 모두가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투철한 반공정신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헐벗고 굶주린 오합지졸이었던 국민들을 결집시킨 구심력이었다. 누가 사악하고 해괴한 논리로 반공정신을 폄훼하는가. 공산주의는 수천만 명을 숙청 살상하고도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 반공의 정치적 악용으로 희생자가 없지 않았다 한들 그것이 어찌 반공의 탓인가.무오류 순백주의나 원리주의만으로 된 역사란 있을 수가 없다. 패망하지 않고 번영하였으면 성공한 역사요 자랑할 만한 역사인 것이다. 반공과 개발독재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북한 꼴이 되었거나 중구난방 분쟁이나 일삼다가 후진국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김일성의 망령이 들린 비뚤어진 좌파들에겐 이런 말인들 먹힐까마는, 김일성 일당이 자행한 천인공노할 동족살상의 만행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는 자들은 수백만 원혼들의 저주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2020-06-25

학교와 역사의 의미를 잃어가는 아이들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가 지났다. 시간은 동지(冬至)로 출발했다. 낮과 밤의 교대가 시작되었다.하지는 “모내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며, 더불어 늦보리, 햇감자와 햇마늘을 수확하고 고추밭 김매기, 늦콩 파종 등으로 논밭의 농사가 몰아쳐서 무척 바쁜 시기”이다.“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라는 속담처럼 자연의 순리를 아는 농부들은 자연이 더 내어준 낮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여름 뙤약볕도 잊고 일에 열중이다.코로나19에 갇힌 인간 사회와는 다르게 자연은 절기의 규칙을 철저히 지킨다.농부들의 모습이 건강한 이유는 바로 자연의 섭리를 지켜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땀방울이 키운 농작물이 세상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지사에도 농부들의 자세는 다르다. 할 일을 다 한 농부들은 겸손하다. 그 겸손에 자연은 풍성한 결실로 답을 한다.자연과 달리 우리 사회는 부자연스러움의 연속이다. 언제부터 그런 모습이 낯선 모습이 아니게 되었지만, 최근에 북쪽이 보여준 모습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민족상잔 비극의 날을 얼마 앞두고 이루어진 만행에 어이는 더 없다.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남쪽의 모습이다. 북쪽에 대해서는 왜 저리도 마음이 넓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 북쪽이 한 행동은 일방적인 폭거다. 그런 범죄적 폭거에 남쪽은 유감이라고만 하고 있다. 이런 남쪽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한국 전쟁에 대한 일선 학교의 교육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역시나 아닐까 한국 전쟁에 관한 내용은 부실 그 자체였다. 일본 정부의 역사 교육 왜곡으로 일본 학생들은 일제감정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모른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역사 교육이라면 조만간 한국 전쟁의 주범을 우리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뭐든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의미는 변질한다. 얼마 전 필자는 한 정당이 내건 가로 펼침막을 보고 매우 놀랐다. 띄어쓰기도 잘못된 그곳엔 “평화! 멈춰서는 안됩니다!”라고 적혀 있었고, 이미 역사 속 인물이 된 두 사람의 모습이 이미지로 새겨져 있었다.우리 현대 역사에는 아픈 숫자들이 많다. 그중 필자가 느끼는 가장 아픈 숫자는 6·25이다.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수많은 호국영령의 뜻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뜻이 퇴색되고 사라져 가고 있다. 평화도 좋지만 최소한의 양심적 사과부터 받으면 어떨까!한국 전쟁 추모 주간에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의미 없이 진행되고 있는 온라인 수업이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지금 격주로 진행되고 있는 중고등학교 온라인 수업을 학교 수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선생님, 제 친구들은 등교 수업 주간에 일부러 가정학습 내고 학교 안 와요. 그리고 저희 반 대부분 학생이 학원 다녀요. 차라리 학교 다니지 말고 학원만 다니겠다고 하는 친구도 많이 있어요. 선생님 이게 학교예요.”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제자의 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온라인 학습인지, 정말 과제 학습형 수업이 학교 수업인지 묻고 싶다. 학교가 없어질 날이 눈앞에 보인다.

2020-06-24

울릉도行 대체 선박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천혜의 비경이 돋보이는 울릉도를 다녀왔다. 지난 80년대 초에는 고교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처음으로 가봤고, 2011년엔 가족들과 함께 명소 관광과 산행, 독도 탐방을 겸해 갔으며, 이번엔 직장동료들과 함께 자전거 라이딩과 성인봉 등반을 위해 갔었다. 풍랑 등의 기상조건에 따라 계획대로 섬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쉽질 않은데, 근 40년 동안 큰 차질없이 세번을 다녀왔으니 그나마 다행스럽고 감사하기만 하다.여행의 반 부조는 날씨라고, 입도(入島) 첫날 약간 흐리고는 이틀 동안 쾌청해서 섬 일주 라이딩과 성인봉 등정을 하기에는 최적이었다. 더구나 시원한 바람의 결 속에 온갖 비경을 접하며 파도소리와 원시림의 녹음 추임새에 맞춰 페달을 밟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국토의 막내 울릉도는 약 250만 년 전 화산 활동에 의해 생긴 섬이다. 성인봉(986m)을 주봉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와 죽도, 관음도 등을 거느린 거대한 산 같은 섬이다. 전체가 하나의 섬이지만 화산성 물질의 분화로 험준한 봉(峰)과 유일한 나리분지가 형성되는 등 지질학적으로도 학술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부속섬인 독도는 고유한 우리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터무니없는 영유권 주장으로 외교적인 마찰이 끊이질 않는 민족의 자존심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지난 40여년 간 포항∼울릉도를 오가던 배의 운항에도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필자는 무려 11시간이나 걸리던 청룡호를 타고 갔다가 6시간 걸린 한일호를 타고 나온 적이 있다. 그 후 2천400톤급 썬플라워호를 타고 비교적 빠르면서 안정적으로 다녀올 수 있었는데, 지난 2월말로 선령을 채운 뒤 대체 선박 투입 문제가 연일 뜨거운 감자처럼 떠오르고 있다. 썬플라워호의 선령 만기가 벌써 4개월이 지나가는데도, 무슨 뒷북 치는 것도 아니고 사전에 운항사와 울릉주민, 포항해수처와의 협의, 조정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여태껏 난항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모름지기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이라 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휘호한 유묵의 글귀이기도 하다.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미래를 예견하고 통찰하는 안목과 지혜를 길러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준비와 계획, 대비와 기획을 잘 해야 한다. 그것은 곧 나무도 알고 숲도 볼 줄 아는 혜안이기도 하다. 근시적이나 임시변통식 대처는 소모적인 논쟁과 손실을 끼칠 따름이다. 타협과 조율의 퍼즐로 상생하는 기틀을 빠르고 신중히 마련했으면 한다.파고 탓인지 기존보다 1/4 정도로 줄어든 규모의 엘도라도호를 타고 포항을 출항하는 것부터가 상당한 고역이었다. 승객 대부분이 선체의 심한 롤링으로 인해 역겨운 배멀미에 시달리는데, 배가 작아 조금만 너울이 일어도 크게 흔들리고 기상악화에 결항이 잦다는 어떤 분의 씁쓸한 푸념이 울렁거림을 더하는듯 했다.

2020-06-23

합리적인 예술인 고용보험이 절실하다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지난달 제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코로나19 관련법과 n번방 방지법, 구직자 취업촉진법, 예술인 고용보험법 등 민생법안들이 황급히 국회를 통과했다. 소위 고용보험 대상에 예술인을 추가한 ‘고용보험법’ 및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개정안이 새로운 제도로 법정효력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제21대 국회에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과 시행령이 제정되어져야하는 후속 조치는 아직 남아있지만 그 실효성에 관한 뒷이야기들은 문화예술행정가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올해 초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패닉상태에 직면한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고용보험법이란 제도가 과연 예술가를 위한 복지정책인지 아니면 증세를 위한 또 다른 세금정책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 고용보험법이 처음 도입된 건 1995년이다. 이 법은 근로자가 실직하였을 경우 실직한 근로자 및 그 가족의 생활안정과 재취업을 촉진하기 위한 근로자 복지제도로 , 실업보험이 실업급여 중심이라면 우리나라는 고용보험제도의 도입이라는 특수성을 갖는다. 즉, 실업 이후에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것보다 실업 그 자체를 예방하고 고용구조를 개선하는데 그 비중이 더 크다. 근로자의 직업능력 향상으로 전통적인 실업보험제도와 직업훈련, 고용 안정 사업 등이 결합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적극적 정책의 수단이 연계된 시스템의 개념이다. 일반 근로자의 경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회사의 폐업 등의 이유로 휴직 기간일 때는 고용보험의 적용으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체결한 예술인 역시 고용보험 적용대상이 되며 임금근로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실직시 실업급여와 출산시 출산전후급여를 지급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하지만 예술인의 경우는 이처럼 권고사직, 계약기간 만료, 정년, 회사 폐업 등 비자발적인 사유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새로운 현안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에는 130만 명 예술인들이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예총 이외 단체와 개인으로 활동 중인 예술인까지 모두 합친다면 300만 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자신들의 열정과 예술세계를 피력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 왔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문화행사가 취소 또는 연기된 사례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2천500건 이상, 피해액만 500억원대라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술인들의 보험계약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기획재정부에서는 “전 국민 대상의 고용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에 2022년까지 9천억원 정도의 재정을 투입하려 한다. 그리고 우선 예술인과 특고 대상자들의 고용보험 가입을 지원하고, 두루누리 사회보험료 지원사업과 구직급여 재정도 확충하고자 한다”는 정책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제도라도 일반직장인과 예술인과의 차별이 균등하게 이루어지고 분배되어진다면 예술인들은 상대적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내 예술노동 환경의 열악함을 무시한 일방적 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06-22

식물에게 말하기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멀쩡하게 잘 자라던 ‘뱅갈고무나무’가 하나 둘 잎을 내리더니 급기야 남은 잎들도 비틀어지는 꼴이 심상치가 않아 식물원에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처방으로 영양제 한 봉지를 주며 계절도 좋고 하니 당분간 밖에다 두고 신선한 바람을 맞히라 하였다. 반신반의했다. 전문가의 의견이니 존중해야겠지만, 내심으로 절반은 믿기가 어려웠다. 전원으로 이사하고 나서, 지난 20여 년 간 잘 키우던 식물에게 자연의 햇살을 보여주고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밖에 내놓았더니 불과 며칠 만에 죽어버린 것이 여럿이었고, 온실을 만들어 이번에는 잘 살겠거니 기대하며 두었다가 또 많은 식물을 죽게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온실 유리를 통한 따가운 햇살을 식물들이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집 안에서 키우던 식물이 죽는 일은 없었으니 선뜻 내놓기가 망설여짐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이미 시들고 있는 고무나무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흔히 보던 알갱이 모양의 영양제를 화분위에 뿌리고 물을 흠뻑 준 다음 햇살과 그늘이 적당한 밖에 내놓았다. 그동안 날씨가 좋았고, 두 번의 비가 내렸으나 비를 맞게 그냥 두었다. 며칠 전부터 놀랍게도 비틀어졌던 잎들이 곧게 펴지고 새잎들이 나기 시작했다. 자연의 치유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의 질서를 헤아려 잘 적응할 수 있게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자연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무한하다.이기심이 많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평소 나 이외의 타인이나 동식물에 대하여 비교적 무심한 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지독한 어둠에 빠져있을 때, 나를 건진 건 사색을 통한 자경(自敬)이 아니라 언제나 자연이었고, 동식물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언젠가도 지독한 회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식물과의 대화를 권하였다.“식물과 얘기하세요. 그들은 당신의 말을 아주 잘 들어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함부로 옮기지도 않습니다.”그때부터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식물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20여 년간 시시때때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해주며 보살펴서 한 포기의 식물도 죽이지 않았다.식물에게 좋은 음악을 틀어주면 성장이 촉진되고 병충해에 저항력이 생겨서 튼튼하게 자란다. 식물학자들의 연구에서 해충이 클로버 잎을 뜯어먹자 다른 클로버들이 서로 경고하는 신호를 보내고, 해충이 싫어하는 물질을 배출하여 벌레를 물리치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하였다 한다. 그래서 식물도 지적생물체라 하는가 보다. 식물은 말을 못할 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난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온 천지가 녹음으로 우거진 6월, 여전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면활동이 편치 않다. 가까운 식물원이나 솔숲, 자연을 찾아 식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떨지.

2020-06-21

감성을 젊게

김병래시조시인먹고사는 것에 여유가 생기면서 각종 노화방지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좋은 세상 만났으니 보다 젊게 오래 살고 싶은 걸 누가 말릴까마는 외모를 더 젊고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들의 욕구는 거의 필사적인 경우도 있다. 온갖 물리적 요법에서 식이요법, 약물요법에 수술요법까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그런 것에 너무 집착하다가 부작용으로 몸을 망치기도 한다.노화는 나이가 들면서 신체의 구조와 기능이 차츰 저하되고 질병과 사망에 대한 감수성이 증가하면서 쇠약해지는 과정을 말한다. 세포의 단백질 합성 능력이 감소하고 면역 기능도 떨어지며 근육은 작아지고 근력은 감소하는 한편 체내의 지방 성분은 증가하고 골 밀도가 감소하여 뼈가 약해지는 등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노화현상은 몸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온다. 젊게 살기 위해서는 피부나 몸매를 가꾸는 것보다 마음의 긴장과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 몸이 젊어야 마음도 젊어진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젊음이 몸의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이 더 타당할 것 같다.뇌의 노화방지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노화현상의 상당부분이 뇌기능의 저하에서 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뇌세포에 영양과 산소의 공급이 원활해야 함은 물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와 풍부한 감성이 뇌를 젊게 한다고 한다. 오감을 포함한 다양한 감각을 느끼고 지각하는 능력인 감성(sensibility)은 나이를 먹으면 무디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젊은 나이에도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백세 고령에도 아이와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다.감성의 젊음을 유지하려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늙을수록 고집이 세다는 것은 편견이나 아집,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가을이 되면 풀이 쇠어지듯이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이 바로 노화다. 사고가 넓고 유연해지려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습관을 가지고 문학이나 철학, 예술 등 인문학적인 교양을 쌓아가야 한다. 그래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능력과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정의감도 놓지 말아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자연현상에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계절을 따라 싹이 트고 성장하고 열매 맺고 월동하는 초목들과 친밀히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감성은 늙지 않는다. 지극히 미세한 것에서부터 광대무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자연이다. 지구의 생태계만 하더라도 생로병사가 수미상관으로 맞물려 생명의 역동성을 이어가는 것이고, 해마다 새 잎을 내는 고목처럼 늙을수록 감성의 잎이 더 무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감성이 메마르고 완악해진 마음을 꾸짖는 예수의 말씀이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감성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길일진대 마다할 이유가 뭐겠는가.

2020-06-18

선생님, 아파요!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등교 개학 2주가 지났다. 학교 구성원 모두가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계속되는 지역 감염 소식에 긴장은 오히려 더하다. 등교 후 매시간이 열(熱)과의 전쟁이다.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밤을 잊고 연구를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아직 인류와 타협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민간 우주여행 시대가 열렸다고 인류는 야단법석이지만,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마스크뿐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마스크에 유독 민감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학생에겐 어느 때보다 지도의 소리가 높다.예방이라는 최고의 백신 역할을 하는 마스크지만, 온종일 마스크 안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의 답답함도 답답함이지만, 마스크를 쓴 채 수업을 해야 하는 교사들에게 마스크는 벽이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벽을 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평소보다 훨씬 높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목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최근 코로나와 별개로 인후통을 호소하는 교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선생님의 수업에 대한 열정은 교실을 넘어 복도를 점령했다. 그래서 등교 개학 이후 복도는 쉴 시간을 잃었다. 복도에는 쉬는 시간에는 학생의, 수업 시간에는 교사의 소리로 가득하다.그 복도에 갑자기 학생의 외마디 외침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아파요!”처음에는 겨우 들릴 정도였으나 점차 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도 삼킬 정도로 커졌다.“선생님, 진짜 아파요. 아아!” 비명은 절규로 바뀌었다. “그래 소리 질러.” 비명 섞인 학생의 절규는 계속되었다. 교사는 멈추기는커녕 학생을 더 독려했다. 그냥 소리만 들으면, 누구라도 폭력 장면을 생각할 것이다.“그래 소리 질러. 아프면 소리 지르는 거야. 참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이 소리는 필자의 소리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단속을 하기 위해 학교를 둘러보다가 필자는 교실에 혼자 있는 학생을 발견했다. 학생의 표정은 어두웠고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경직된 몸을 좀 풀어줄 겸 해서 어깨 마사지를 해주었다. 학생은 손이 닿기도 전에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 대신 표정으로 아픔을 말할 뿐이었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극도로 절제된 소리로 아프다고 말했다. 그 소리에 자신도 놀랐다. 놀람 속에서도 학생은 뭔가 희망을 찾은 표정이었다. 늘 뭔가에 주눅 든 모습의 학생은 지난 학교에서 학교로부터, 교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입을 다물라는 강요부터 배웠다.“이 아픔을 가슴에 안고 어떻게 살았니. 이제부터는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선생님, 진짜 그래도 돼요?” 학생은 소리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어깨를 누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학생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줄세우기식 시험이 학생들을 옥죄는 6월, 우리 주변에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시험 점수 올리는 요령보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6월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0-06-17

사름하다

김현욱시인“그렇게 다양한 글감을 어디서 구해요?”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크게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얻는다. 첫 번째는 신문이나 잡지, 두 번째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세 번째는 생활 속 관찰이다.가장 유용한 것은 신문이나 잡지다. 매일 중앙지와 지방지를 합해서 4~5종을 훑어본다. 정치나 스포츠는 건너뛰고 사회, 국제, 과학, 문화, 칼럼을 정독한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요건 글이 되겠다, 안되겠다, 금방 감이 온다. 오늘 읽은 기사 중에 ‘아무 영상이나 보고 욕 배운 AI 어린이’는 동화로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크랩해두었다. 서너 달 열심히 신문을 보면 글감이 제법 모인다. 시, 동시, 동화 순으로 분류해둔 것도 제법 양이 많다. 그럼에도 엉덩이가 가볍다보니 진득하게 앉아서 초고를 못 쓰고 자꾸만 묵혀둔다. 생각지 못한 청탁이 와서 급할 때면 글감 폴더를 열어본다. 내겐 보물 상자 같은 것이다.월간 ‘좋은 생각’과 ‘샘터’, ‘작은 책’ 같은 잡지도 즐겨 읽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서 좋다. 잡지를 읽고 밑줄도 치고 블로그에도 가려 올린다. ‘좋은 생각’ 6월호에서 ‘달빛 스쾃’이란 글이 뭉클했다. 화물차는 모는 아버지가 자신의 처지에 맞게 화물차 좁은 칸에서 스쾃을 하는 내용인데 생각할수록 코끝이 찡했다. 춤을 소재로 한 영화의 주제가 ‘What a feeling!’도 처음으로 들어봤다. 단란했던 가정에 병마가 들이닥쳐 한순간에 남편을 잃었지만, 역경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러나 수기’도 시큰한 감동을 주었다. ‘아들은 예순 셋, 어머니는 여든여덟’에서 용돈보다는 자주 얼굴 보고 맛있는 것 많이 먹기를 실천하는 아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했다. 특히, “우리 모자의 점심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삼 년은 더 지속되면 좋겠다.”는 마지막 문장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월간 ‘작은 책’은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주로 담긴 책인데, 이번 달에 창간 300호 특별호가 나왔다. 1995년 1호를 창간할 때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고 이오덕 선생의 말씀을 잣대로 삼았다고 한다. 6월호에서 가장 좋았던 글은 30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의 ‘사름하다’란 글이다. ‘항공사 객실 승무원 30년차’란 말의 무게를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동생과 함께 너른 논을 다 채우면서 느꼈던 감동, 함께해서 이뤄 냈다는 성취감 같은 거. 오늘같이 힘든 비행이 끝날 때마다 함께 일한 동료들을 보면 그때의 감동이 문득 살아날 때가 많아요. 그때 난 동생과 모를 심고 ‘우리의 벼’가 자라는 동안, 내가 온전히 내 일의 주인이 되는 경험 같은 걸 했나 봐요. 저는 그런 순간들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혼자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함께 해내고 그런 감동을 순간을 기억하면 좋겠어요.”‘사름’을 하고나면 ‘모’는 더이상 모로 불리지 않고 ‘벼’가 된단다. 인생도 사랑도 ‘사름’이 필요하다.

2020-06-16

생활 속 운동습관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한다. 천성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성격이지만, 습관은 어떤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질 때까지 반복함으로써 형성된다. 습관은 한번 깃들여버리면 타고난 성격과도 같아져 다시 바꾸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즉, 습관이 패턴으로 굳어진 후에는 그 반복되는 패턴 속으로 자꾸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어려서부터 들이고 나쁜 습관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삶은 습관의 연속이다. 먹고 입는 양식, 말하고 행동하는 버릇, 학습하고 일하는 방식 등 사람은 일생에 걸쳐 제 나름의 습관으로 이어지고 굳어진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개개인의 정서나 습관이 오랜 시간 축적되면 관습이나 풍습이 되고 그것은 곧 지역과 사회적인 문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습관은 의식주와 생활 전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몸을 움직여 신체를 단련하거나 건강을 도모하는 운동도 습관에서 비롯된다. 지구 상의 모든 생물체는 움직임이 있어야 신진대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자생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움직이고 활동해야 한다. 원활한 대사(代謝)작용과 활력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다. 운동은 움직임이나 자극을 통해 땀을 배출시키고 신체를 유연하고 활발하게 하며 심신의 활기를 더해준다. 또한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운동은 신체리듬을 활성화시키고 정신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운동을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걷기, 구기, 수영 등 운동의 방법도 무수하지만 필자는 수년 전부터 생활운동을 고수하고 있다. 매일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기, 하루에 계단 2천개 이상 오르내리기, 맨손체조 등 말 그대로 일상생활 자체를 운동처럼 여기며 실행하고 있다고나 할까? 바쁘고 각박한 시대를 살면서 운동을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기 보다 생활과 병행하는 가벼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어느새 습관화되어 심신의 긍정적인 효과와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최근 포항지역의 영일대 해변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서 이색적이다. 새벽같이 영일대 해상누각 주위에 약속처럼 나타나 모래의 감촉을 온 발바닥으로 느끼며 왕복 5㎞ 정도 2시간 남짓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어김없이 맨발걷기한지 벌써 106일, 삼삼오오 함께 걸으면서 그들은 찬란한 해맞이도 하고 파도소리의 추임새를 듣는 것을 흡족해하는 듯하다. 이에 포항시북구보건소에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실외에서 할 수 있는 손쉬운 생활 속 걷기운동이나 건강체조교실을 운영하고 장려하고 있어서 한층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운동이나 기타의 건강한 습관은 평소 스스로 실천하고 지켜나가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다만, 단발성이나 너무 과도한 생활 속 운동습관은 자신의 취향과 형편에 따라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반복과 지속은 기적을 낳는다. 습관이 무기가 될 때, 평범했던 자신을 최고로 만든 요체는 단 하나의 습관이 아닐까?

2020-06-15

대북 전단이 통일의 열쇠다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이 넘도록 통일을 노래했지만 아무런 진전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남북이 수차례 회담을 하고, 정상들이 만나고, 공동선언문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김일성일족의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기극에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 햇빛정책이니 남북교류니 하는 것도 세습독재를 연장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돈과 시간을 대준 것이 전부였다.통일이 우리 민족의 숙원인 까닭은 천만 이산가족의 해원이 그 첫째요, 압제와 기아에 허덕이는 북녘 동포들의 해방이 그 둘째고, 민족이 하나로 뭉쳐 더 부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 셋째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너무나도 절실한 것이 통일에 대한 염원일진대 도대체 무엇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어느 정권이 통일을 원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통일에는 딱 두 가지 방법밖엔 없다. 남북이 합의를 하거나 한 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일이란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남북이 정반대다. 북쪽은 어디까지나 적화통일이고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통일이다. 그러니 합의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고, 남은 하나는 흡수통일인데 국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남한이 북한에 흡수된다는 건 가당한 일이 아니다. 그런즉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방법밖엔 없는데, 그것은 곧 북한의 세습체제의 종식을 전제하는 것이다.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치고 북한의 세습체제가 존속하는 한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터인데, 지금 한국 정부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 남북이 이념적 노선을 비슷하게 맞추는 것이 통일을 위해서 분단의 간극을 좁히는 길이라는 생각인 것 같다. 일단은 남한이 사회주의 체제로 가야 한다는 속셈인데, 얼핏 들으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한의 경제가 망해서 북한과 비슷한 수준이 되게 하려는 것이나 다를 게 없는 수작이다.며칠 전 북한의 김여정이 대북전단을 날린 탈북인 단체와 남한 정부에 대고 온갖 쌍욕과 공갈 협박을 해댔다. 그렇게 발악을 하는 것은 대북전단이 그만큼 김정은 세습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얘기다. 외부에서 무력으로 북쪽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을 거라면 민중들의 봉기나 김정은의 조기사망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미국과 유엔의 제재로 계속해서 숨통을 조이고, 전단 살포 등으로 내부의 봉기를 유도하는 줄탁동기가 가장 유력한 통일의 방안임에 틀림이 없다. 꾸준하고 대대적인 전단 살포야 말로 김정은의 명줄을 단축하는 가장 효과적인 통일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북한 주민들의 사정을 잘 아는 탈북인들이 온갖 위협과 박해에도 목숨을 내놓고 북녘을 향해 전단지를 날리는 까닭이다.김여정의 공갈협박에 안절부절못하는 이 정부의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세습독재의 주술에 걸려있는 북한 주민을 깨우는 대북전단을 백해무익이라고 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들이야말로 이념의 망상에 사로잡혀 통일에 역행하고 민족에 반역하는 백해무익한 자들이다. 머지않아 역사의 심판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2020-06-11

재난 지원금으로 전국 학교에 코로나19 검사를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적막강산이던 학교가 드디어 활기를 찾았다. 5월까지만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교사들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메아리가 되어 돌아와야 할 학생들의 소리는 모니터 안에서만 맴돌았다. 교실이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학교에 아이들이 돌아왔다.물론 지금의 등교 수업을 교사라고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EBS 수업을 자신의 수업인 것처럼 제공한 교사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마스크 쓰고 수업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알기나 아나.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온라인에서 EBS 수업 틀어주고 학생보고 알아서 공부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차마 학교 수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온라인 수업이 이루어진 지난 몇 달 동안 학교는 교육수요자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필자가 만난 많은 학생의 이야기이다. “시험 기간에 학교에 가서 시험만 치면 되잖아요. 지금도 대부분 EBS 듣고 있어요. 학교에서 도와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학교에 오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이들 학생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말해주는 언론 보도 자료가 있다.“원격수업 방식은 기대만큼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부가 교사 22만4천여 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 쌍방향으로 원격수업을 한 교사는 5%뿐입니다. 독후감 등 숙제를 내주는 ‘과제 수행형’이 10%, EBS 강의 등을 보는 ‘콘텐츠 활용형’이 40%였습니다. 나머지 43%는 혼합형인데 과제형과 콘텐츠형을 섞은 교사가 대다수였습니다. (….)”교육부 자료가 말해주듯 지금까지 학교에서 해 온 온라인 수업은 수업이라고 할 수 없다. 교육부 어느 관계자가 필자에게 말한 것처럼 학습 도움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정부와 관련 있는 교육평론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당 언론은 기사 제목을 “한국 온라인 수업 짱”이라고 달았다. 웃기지도 않는다.“다른 나라 대비 굉장히 잘 됐습니다. 지난 3월 (….) 영국 고등학교를 둘러봤습니다. 쌍방향 실시간 수업을 잘하는 곳도 있었지만, 우리나라만큼 보편적인 교육을 제공하지 못했어요.”그에게 묻고 싶다, EBS 틀어주는 것이 보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인지?산자연중학교는 지난주 월요일에 전국에 주소를 둔 전교생이 모두 등교했다. 처음에는 우려도 컸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등교 다음 날 교육청의 도움으로 전교생과 강사 선생님을 포함하여 전 교직원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검사자 전원이 음성이 나왔다. 검사 전후 학교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검사 전에는 서로를 못 믿었다. 불신은 교육 활동을 위축시켰다. 하지만 검사 후 학교 교육 활동은 정상을 되찾았다.전 국민 재난 지원금 등 천문학적인 국가 돈이 풀리고 있다. 물론 모두 빚이다. 이왕 빚내서 하는 빚잔치라면 가장 시급한 전 국민 코로나 검사부터 하면 어떨까! 전 국민이 어려우면 전국의 학생과 교사, 학부모부터라도 하면 지금의 이 막연한 공포가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면 격주 등교 같은 해괴망측한 일은 안 해도 된다.

2020-06-10

중심에서 벗어나기

최미경동화작가석 달 만에 서울에 왔다. 약속시간보다 2시간 정도 미리 도착한 터라 홍대 근처 카페에 들어가 밀크티를 주문했다. 일요일 오전 9시, 게으른 햇살이 카페 안을 기웃거렸다. 진동벨이 울리길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1층과 지하 1층으로 연결된 카페 안은 노트북을 앞에 두고 각자의 작업을 하는 젊은 청년층들이 대부분이었다.젊음, 그 찬란하고 불안한 시절을 건너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스쳤다. 그리고 창가 근처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나에게 불쑥 미련스러운 생각이 밀려든다.20년 전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결혼은? 아이는? 일은?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아닐까.그 짧은 물음이 나를 흔드는 사이, 잠들어 있던 내 안의 ‘만약’과 ‘혹시’와 ‘어쩌면’이 부스스 일어나 2020년 6월의 나를 2000년 6월의 나에게 데려다 놓았다.그해 6월, 나는 서울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선로를 타고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부산행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고 어린 나는 바닥에 있던 가방을 어깨에 매고 노란선 뒤로 한발 물러나고 있었다. 열차 문이 열리자 그녀가 터벅터벅 열차로 향했고 나는, 어느 틈엔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돌아보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안 가면 안 돼?내가 먼저 물었다. 그녀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스쳤고 반가움이 지나갔고 쓸쓸함이 머물렀다.-어때? 그곳은?그녀가 던진 뜻밖의 물음에 나는 혼란스러웠다.-너는 어떤데?/네가 더 잘 알잖아/잘 모르겠어. 안다고 생각했는데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어.내 말에 그녀는 푹, 하고 웃고는 작게 중얼거렸다.-그렇구나, 나는 그때도 여전히 헤매고 있구나.그녀의 말에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잠시 웃었던가.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다행스러웠던 걸까. 가 보지 못하는 길을 코앞에 두고 그녀는 내가 걸었던 그 길로 들어섰다. 그녀를 실은 부산행 열차가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문한 음료가 나왔음을 알려주는 진동벨이 울릴 때까지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그랬다. 서울을 떠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중심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었다. 그 중심이라는 것이, 타인이 만들어놓은 중심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했다. 그러는 사이,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했다. 첫째를 키우고 둘째와 셋째를 키우는 동안 나도 함께 커나갔다. 그렇게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밀려나고 주변이라고 밀어냈던 것들이 내 삶을 채워나갔다.물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안다. 내가 믿었던 중심이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유연성, 그걸 인지할 때 비로소 진정한 중심이 보인다는 걸. 학교를 졸업하고서 20년 만에 배운 것이다.

2020-06-09

군자와 소인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얼마 전, 지방 모 대학에 늦깎이로 교수 임용 막차에 오른 친한 동생 하나가 전화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연인즉슨, 얼마 전, 학과 회의를 했는데, 글쎄, 실컷 잘하고 헤어진 뒤,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업무분장 정리 톡을 받으니, 동생한테 은근슬쩍 까다로운 업무 하나가 끼워져 있더라는 것이다. 동생은 그래, 실수겠거니 하고서 단톡방에 이야기를 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은 당신이 맡기로 했다며 벌떼같이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일을 더 하고 덜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 기억 및 상황까지 조작하며 몰아붙이는 게 너무 황당해 조목조목 얘기하니 그제야 다들 ‘그럼, 말고’하는 식으로 수그러들더라는 것이다.일을 맡기고 싶으면 차라리 면전에다 부탁을 하든지 할 것이지,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잔머리를 굴릴 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는 동생을 보며, 문득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한평생 고민했던 춘추시대 공자가 떠올랐다.공자는 세상의 인간을 크게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한다. ‘군자’는 논어에 66번이나 나오는 만큼, 공자의 인간학을 이해하는 핵심 중 하나다. 논어 첫 편인 ‘학이 1장’과 마지막 ‘요왈’ 편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라 할 수 있고(人不知而不614D 不亦君子乎), 그렇더라도 천명을 알지 못하면 또한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군자는 논어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이다.보통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화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군자는 그런 데 개의치 않는다. 묵묵히 제 할 일 하면서, ‘천명’을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 뿐이다, 여기서 ‘천명’은 주어진 사명, 곧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책임감을 갖는 것은 군자의 기본이자 사실 인간의 기본이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인격이란 바로 책임 능력’이라 했고, 청말 사상가 양계초 또한 ‘음빙실(飮氷室)’에서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인간의 시작이요,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인간의 끝”이라고 설파했던 것이다.그런데 소인은 책임감이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잔머리를 굴려 책임을 피할까만 생각하고, 통수, 꼼수를 쓰며 이익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소인은 도량이 좁고 간사한 것이다. 공자가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으며(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남과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으나, 소인은 남과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는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이처럼 소인은 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편 가르기나 하면서도 이 세상을 잘 살아간다고 착각하곤 한다. 남의 고통·아픔을 이용해 수년간 사리사욕 채워 본들 뭐할까? 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데.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6월이다.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마무리되는 올 상반기, 이럴 때일수록 더욱 책임 전가, 통수, 꼼수로 무장한 소인 대신, 진정한 군자 되기 프로젝트에 한번 동참해 보면 어떨까. 아마도 삶이 이전보다 몇백 배나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2020-06-08

나무와 숲을 보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어느새 신록이 짙어 녹음을 드리우고 있다. 이른바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낫다는 때다. 온통 푸르름으로 일렁이는 산과 들에는 싱싱한 기운과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세상이 코로나19의 난마로 어수선해도 계절은 차분하고 왕성하게 풀과 줄기, 잎사귀를 흔들며 초여름을 노래하고 있다.벌써 한 해의 절반을 지나고 있는데, 세상만사는 희대의 요지경처럼 여전히 복잡다단하기만 하다. 이 또한 멀지 않아 가닥이 잡히고 순순히 지나가겠지만, 여파와 상흔은 좀처럼 가시지 않을 듯하다. 자연현상의 경외함과 세상살이가 만만찮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예기치 못한 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유연해지고, 각자도생의 방편을 꾸준한 각도로 추스려 나가야 하는 지혜를 얻었다고나 할까?햇볕이 뜨거워지는 여름날이 다가오면 시원한 그늘을 찾기 마련이다. 커다란 느티나무나 굴참나무 아래면 더 좋을 것 같고 간간이 잎새 흔드는 바람마저 불어온다면 한결 낫다. 그러한 곳에서 여유롭게 쉼을 누리거나 한가롭게 낮잠을 즐긴다면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을 정도다. 여름날에 흔하게 느끼거나 접할 수 있는 풍경, 그러한 쉼과 여유를 통해 사람들은 일상의 찌든 때를 털고 마음을 정리하며 보다 평온함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쉼이란 무엇일까? 한자를 풀이해 보면 사람(人)이 나무(木) 옆에 있는 모습(休)으로, 글자 그대로 나무 옆에 머물며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이다. 예컨대,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지만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집을 떠나 나무 그늘 아래서 그냥 쉬거나 몸과 마음을 느긋하고 편안하게 두는 것이다. 굳이 나무 그늘이 아니더라도 숲길이나 들길을 거닐다 보면 번잡했던 일상이 정리되고 마음이 안정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쉼이란 그런 것, 마음과 정신의 각박함을 접어두고 잠시나마 영혼의 안식처를 찾으며 일탈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그러나 나무와 함께 즐기는 것이 쉼이라면, 숲이나 산, 강과 바다와 함께 하는 누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무에서 느껴지는 디테일도 맛보고 숲이나 물에서 풍기는 그윽함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각기 다른 맛과 느낌이 있겠지만, 세밀하게 느끼는 멋과 유장하게 젖어드는 울림이 보다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춰야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아무리 일상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코로나19의 엄습이 있을지라도 나무와 숲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길러야 한다. 즉각적이고 근시적, 장기적인 대응과 원시적인 방안을 유효 적절하게 입안하고 운용해야 한다. 이미 신속한 초기 대처와 효과적인 방역, 검사체계로 세계의 정평이 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나무와 숲은 결코 단기간에 자라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축적 속에 나름의 생리와 섭리로 지금까지 존속해왔고 영속해 나갈 것이다.

2020-06-07

그들의 민낯

김병래시조시인“정대협이 발족될 당시인 1990년 11월 16일. 당신들은 정대협 간판을 내걸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한일 간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정대협을 발족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역사에 묻혀 숨죽여 살아온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 구호처럼 들려왔는지 지금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면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겹도록 흘린 눈물은 당신들의 본래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들춰지면서부터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대협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발족의 변에서 밝힌 바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는 정반대의 길을 달려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정대협 관계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빌미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좀 더 거칠게 말자면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인 것입니다”2004년 1월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인 세계평화무궁화회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이다. 정대협의 위선과 비리가 낱낱이 적혀있는 장문의 이 성명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당시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고도 16년이나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해온 정대협은 후신인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의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씨가 지난 번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두 차례에 걸쳐 윤 씨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어서 지난 1일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해체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있었다.일제가 저지른 만행 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열 서너 살 소녀들까지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성욕해소의 도구로 삼은 짓은 천인이 공노할 악행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해서 전쟁이 끝났지만 그 때 끌려 다녔던 소녀들은 평생을 씻지 못할 치욕과 피맺힌 원한을 안고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협상 타결로 한·일 정부 간에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일단락 지었으나, 당시 야권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논란이 계속되다가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는 원천무효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담당해온 사회단체인 정의연이나 나눔의 집 관련자들은 정작 피해 할머니들의 치욕과 통한을 공감하고 위무하기는커녕 또 다른 수모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 피해 할머니들의 주장이었다. 정의연의 경우, 처음의 취지와 의도가 어떻든 간에 결과적으로 저들 단체의 이념적 목적과 수익을 위해 할머니들을 이용하고 정계진출 등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모금한 돈과 정부의 지원금을 자의로 유용하거나 착복한 혐의에 대해서는 지금 수사 중이니 그 진상이 밝혀지면 그들의 민낯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2020-06-04

양치기 2주와 벌점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앞으로 2주 코로나 확산 고비”이 말은 최근 몇 달 동안 언론을 통해 전 국민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이 말이 반복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2주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분명 우리 사회는 2주라는 마법에 걸렸다. 그 마법을 풀 수 있는 주문은 없을까!주문을 찾기 위해 고비의 뜻부터 찾았다. 사전은 고비를 “일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나 대목. 또는 막다른 절정”이라고 정의했다.어떤 일이 완성되려면 반드시 절정의 순간을 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은 설익은 밥이 되고 만다.예전에 마라톤을 한 적이 있다. 출발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서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사람이 조금만 더 참고 달리면 숨이 터질 것이라고 했다. 그땐 너무 힘든 나머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오기가 발동하면서 어떻게든 조금만 더 참고 힘을 냈다. 그랬더니 목에 걸렸던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비록 결과는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필자는 완주했다. 그때의 기억은 필자의 마음에 오뚝이 심장을 심어주었다. 필자는 그 심장으로 지금까지 왔다.지금 우리 사회에 딱 필요한 말이 “숨을 트다”라는 말이다. 코로나 19는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 19라는 출제자의 출제 의도를 정확히 분석해낸 듯했다. 그 결과는 세계에 모범 답안으로 제시됐다. 그래서 나온 말이 K-방역이다.그렇다면 K-방역은 세계를 공포에 빠트리고 있는 지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근본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찾고 있는 해결책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동원하고 있지만, 바이러스는 분명 인간의 기술력을 능가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변이(變異)이다.그런 자신들을 정복하겠다는 인간의 오만 앞에 바이러스는 그저 웃을 뿐이다. 눈앞의 성과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들, 그들은 분명 2주를 양아치로 만드는 주범이다. 그런 양치기 정신으로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양치기는 교육계에도 많다. 어느 학생이 심각하게 필자에게 말한다.“우리 학교는 마스크 벗으면 벌점 10점이래요. 점심시간 빼고는 물도 못 마신 대요.”물론 이 말을 한 교사의 의중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협박 수준의 공갈로 입학도 하기 전인 학생들에게 공포 정치를 하는 교사들, 그들은 분명 교육계의 양치기들이다.어느 교육청은 한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일선 학교에 뿌렸다.“등교 수업 이후에 학교 출입자에 대해 발열 검사를 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실시하여 학교 내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해당 학교를 엄중 문책할 예정이므로 (….)”어떻게 가면 갈수록 교육계에는 양치기만 늘어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양아치가 되는 날, 이 나라 교육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2020-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