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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무재칠시(無財七施)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얼핏 쳐다 본 TV에 ‘김정은 사망설’이란 자막이 보여 깜짝 놀랐다. 요즘은 워낙 가짜뉴스가 넘치는 터라 웬만한 뉴스는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고 마는데, 북한의 소식에는,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유고에 관한 뉴스에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사망설, 중태설, 식물인간 상태 등의 설들이 난무하는가 하면 근거 없는 뜬소문이라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 내부의 특이 동향 없음”을 공식화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김정은의 안위에 대하여 몇 차례나 언급했지만, 분명한 건 폐쇄국가인 북한의 수뇌부 사정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돌이켜보니, 학창시절에는 철저한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했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열린 반공웅변대회에서 연사들은 치를 떨며 북한을 성토했고, 주적인 북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학교 교육과정에도 ‘교련’이란 교과를 편성하고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그러나, 오늘날은 갈등과 대립 구도의 반공교육이 아니라 상생의 통일안보교육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남북 간의 평화 공존을 위하여 남북정상이 마주 앉았고, 특히 한반도의 비핵화를 기대하며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다.남북 철책의 상징적인 시설물이 철거되기도 하여 높기만 하던 남북 간의 장벽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 하였으며, 은둔의 왕국이던 북한의 30대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호감도가 아주 높아지기도 했다. 북한 지도자에 대한 호감의 팔할은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였겠지만, 그의 활짝 웃는 모습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믿는다. 독특한 헤어스타일, 비대한 몸집, 너무 젊은 나이 등이 절대 권력자의 면모와는 영 매칭이 되지 않았으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이 모든 것을 너끈하게 덮었고, 오히려 호감까지 느끼게 하였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화안시(和顔施)’가 따로 없을 듯하다. 이후 북미협상의 교착으로 로켓을 연신 쏘아대는 그의 모습은 딴 판이 되고 말았지만.어떤 이가 석가모니에게 물었다.저는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으니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요?그것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라 남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그렇지 않느니라. 무재칠시(無財七施), 가진 것이 없다 해도 남에게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있는 법이다. 첫째는 화안시,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대하는 것이요, 언시, 심시, 안시, 신시, 상좌시, 찰시이니라. 이 일곱가지를 늘 행해서 습관으로 굳히면 네게 행운이 따르리라.종교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여 신심을 말하기는 부끄러우나 절실하면 저절로 기도가 됨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막내 동생이 원인불명의 질환으로 생사까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을 때 난생 처음으로 간절한 기도가 되었고, 큰 슬픔에 빠졌을 때 보경사 법당을 찾아 삼배를 올림으로써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경험이 있으므로.이제 곧 부처님오신날이다. 부처님의 가피가 온 세상에 가득히 깃들기를.

2020-04-28

콜센터 선생님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사스(2002년)에서 신종플루(2009년)까지 8년, 신종플루에서 메르스(2015년)까지 7년, 메르스에서 코로나 19(2019년)까지 5년! 코로나19에서 다음 바이러스가 유행하기까지는?”이 글은 ‘학생 중심 온라인 수업 모델 개발의 필요성’이라는 필자 글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글에서 보는 것처럼 바이러스 유행 시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의료와 방역 시스템을 비롯해 바이러스 유행을 막기 위해 많은 사회 체제들이 정비되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대한 시급히 정비되어야 할 것이 교육시스템이다.필자는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기 시작한 2월 중순부터 온라인 수업 일지를 적고 있다. 또 다른 학교의 온라인 수업에 대한 분석도 진행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선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온라인 수업 유형은 절대 학교 수업이라고 할 수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다음은 어느 교사들의 대화이다. 이야기 전에 이 글은 전문 직업으로 콜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함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쪽 학교는 온라인 수업 어떤가요?” “과제를 많이 내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뭣합니까?” “단체로 교무실에서 전화로 학생들의 출석 등을 확인합니다. 콜센터 선생님 같습니다.”콜센터라는 말에 대화에 참여한 모든 교사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피었다. 교실에서 수업해야 할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단체로 전화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란? 그런데 이런 낯선 모습이 연출 된 것은 많은 교사가 온라인 수업 유형 중에 “콘텐츠 활용 중심 수업, 과제 수행 중심 수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들 수업에는 학교 수업 교사는 없다. 학교 교사 자리에 EBS 강사와 과제가 들어갔다. 이것이 교사들이 분필 대신 전화기를 들게 된 이유이다. “수학이 계산한 암울한 미래 ‘가을 코로나 대유행’”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뉴스대로라면 사회적 거리 두기를 느슨하게 하면 올해 가을에는 2차 코로나 대유행이 온다. 그럼 그때도 온라인 수업을 할 것이 뻔하다. 과연 그때도 지금과 같은 교사 출근용 온라인 수업을 할 것인가?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특히 교육계에서는 더 그렇다. 필자가 신규 선생님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첫 수업이 선생님의 정년 퇴임 때의 마지막 수업이 될 수 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지켜본 건 결과 학교의 처음은 대부분 그대로 틀로 고정된다. 대표적인 것이 수행평가이다. 수행평가가 처음 도입된 2000년대와 현재의 수행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수행평가는 지금이 훨씬 심하다.온라인 수업에 갈팡질팡하는 교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글이 있다. 이양연의 야설(野雪)이다. “눈을 뚫고 들판을 지나갈 때/모름지기 이리저리 어수선히 가지 마라/오늘 아침 내가 간 발자취는/결국 뒷사람이 따라갈 길을 만드는 것이니!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迹 遂作後人程)”5월에는 콜센터 선생님 대신 학교 선생님이 교실에서 수업다운 수업을 하길 기원해본다.

2020-04-27

익숙한 듯 낯설게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잎새달이다. 진초록 위에 연초록 잎새 겹쳐 피어나면서 나무들은 신음인듯 환희인듯 일제히 잎차례를 벌이고 있다. 혹한의 시련을 이겨낸 인고의 몸짓같은 여린 이파리들이 앙증스럽게 손 흔들며 약동하는 봄날을 환호하는 듯하다.몇 차례의 신열같은 꽃 잔치 속에 온갖 생물들은 저마다의 존재감으로 생육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새로운 싹과 잎사귀를 드리우고 곤충과 동물들은 본격적인 먹이활동을 시작하면서 번식과 생장의 사이클에 접어들고 있다. 이처럼 자연만물은 때가 되면 돋아나고 피어나고 나타나 익숙한 듯 새로운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은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 것이다. 초목은 차디찬 땅 속에서도 부단히 새봄을 준비하는 일손을 멈추질 않았고, 동면의 겨울나기 속에서도 생명체는 나름의 생존법을 익혀 왔었기에 새로운 싹과 꽃을 피우며 개체를 연명해가는 것이 아닐까?자연은 이렇게 자생적인 노력 없이 저절로 당연하게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온갖 만물의 존속과 조화,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해마다 낡은 것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익숙함을 보여왔었기에 생성과 소멸,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재까지 이르렀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새로운 것들은 낡은 것에서 싹트고 희망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 했던가.세상도 자연도 늘 변화하기 마련이다. 세월이 가고 오고 계절이 바뀌듯이 세상의 모든 유무형의 물질들은 시시각각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자연과 세상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사이, 작거나 크게, 느리거나 빠르게, 조금씩 변하고 확연히 달라지며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물론 변화하되 변함없는 것들도 있긴 하지만, 시대나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변화,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하고 퇴보함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고 흔히 보아왔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생과 존립, 진전과 확장을 위한 치열한 도전과 생명력 그 자체라고 여겨진다.변화를 두려워하면 성장과 발전이 없다. 최근 들어 걷잡을 수 없는 이변의 소용돌이 속에 고난과 질곡, 파란과 충격의 여파가 만만치 않은 듯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난마같은 코로나19를 탓하고 투표로 나타난 민심의 향배만 안쓰러워 할 것인가. 앞으로 어쩌면 그보다 더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최악의 딜레마에 휩쓸릴 수도 있음을 예단하고, 보다 지혜로운 대응과 만반의 조치, 유연하고 과단성 있는 변화의 길목에 나서야 한다. 급변하는 시대와 사회의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종전과 달라진 생활패턴과 새로운 의식의 지향 속에서 익숙한 듯 낯설게 움직이고 과감한 변신을 시도하여, 차별화된 새로움과 확고한 비전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목의 등걸에서도 새순이 돋아나듯이 경험과 시련을 통해 지혜가 자라고 내성이 길러진다. 진정한 변화는 전통의 배제가 아니라, 역사의 무늬가 응축되고 융화되는 그루터기 위에서 싹이 트는 창조적인 혁신인 것이다.

2020-04-26

정치공학

김병래시조시인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세계 167개국의 민주주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2018년 현재 75개국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53개국은 권위주의를, 39개국은 혼합된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노르웨이가 10점 만점에 9.87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대한민국은 8.00점으로 21위, 북한은 1.08점으로 꼴찌를 했다. 20세기 말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세계 각국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대세이지만 아직도 많은 나라들이 독재나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민주주의란 한 마디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이념과 체제’를 말하는 것으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규모가 커져서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물을 수는 없는 형편이라 각 지역의 대표를 뽑아서 민의를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이다. 지역의 대표 말고도 직능별 전문인을 확보하고 사표를 방지하려는 취지로 비례대표제를 겸하는 나라가 많다. 후보자 개인의 능력이나 인품보다는 소속 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당락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얼마 전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정책이나 비전은 실종되고 ‘정치공학’만 난무했다는 느낌이 짙다. 정치공학(政治工學)이란 학문적 뉘앙스와는 달리 권력을 유지하고 국민을 통치하기 위한 방법론을 말하는 것으로 구소련에서 쓰던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2년 대선을 전후하여 정치권에서 자주 쓰이기 시작했는데, 주로 ‘유권자들에겐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 형식적인 문제를 정치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행위’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말이다. 비례의석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과 그것에 대응한 자매정당 만들기 등이 바로 정치공학적 술수에 해당한다.정치공학은 일단 백성을 우민(愚民)으로 보는 데서 나온 발상이다. 정책의 진정성이나 타당성과는 상관없이 조삼모사식 꼼수로 진상을 호도하고 위장하는 것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현대의 선거전에서는 정치공학적 역량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계기랄까, 몇 가지 그럴싸한 포장이 될 만한 것을 내세우고 거기다가 금품공세까지 더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넘어가기 마련이라는 걸 실감하는 선거였다. 정부의 무능과 실책, 각종 범법의 피고인 신분인 자들의 후안무치와 적반하장도 정치공학적 포장과 포퓰리즘의 당의(糖衣)에 쉽사리 덮인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상대방에는 온갖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도 정치공학의 주요 메뉴다.아무튼 이제 완전히 좌파들의 세상이 되었다. 도처에 완장을 차고 죽창을 든 자들이 살기를 번뜩이며 설치고 있다. 자신들은 무슨 짓을 하든지 그것이 곧 법이고 정의라는 무소불위와 오만방자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제도권에 밥줄을 대고 있는 사람들은 행여 그 서슬에 베이지 않을까 전전긍긍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시국이다.

2020-04-23

이제 마인드를 바꿔야할 시기는 아닐까?

조현명 시인코로나19가 지나가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두 가지 의미다. 먼저 아직 그 때로 돌아가긴 이르다는 경고, 또 하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내다보는 시각이다. 나는 아직도 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정부는 고강도 거리두기에서 ‘고강도’라는 말을 빼면서도 매우 조심스럽게 거리두기를 실천하자고 당부하고 있다.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언제까지?’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학기 중 홍수가 나서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학생과 교사는 학교장의 결정에 기린목이 된다. 한명의 교사가 앞서서 학생들에게 “너희들 곧 집으로 갈 것이다.” 귀띔만 해도 술렁이며 난리가 난다. 학교장은 고민에 빠진다. 현재 상황이 학생들을 하교시켜야 할 정도인가? 고민이다. 하교를 늦추었다가 큰 화를 부른 적도 있다. 반대로 하교를 미리 단행했다가 학부모들의 항의에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사립학교는 윗사람의 눈치까지 봐야하니 매우 결정이 어렵다.매뉴얼이 잘 갖추어진 대한민국에서도 여기까지이다. 전염병의 방역에는 최대한 조심해야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현재 확진자를 줄이며 안심단계에 접어들게 했다. 그런데 당국은 생활방역으로의 전환 시기 결정을 ‘확진자 50인 이하, 감염원을 알 수 없는 확진자 5%이내’라는 당초의 원칙을 슬그머니 미루었다. 그것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후 확진자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그 난세의 영웅은 평상시에는 지질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이 말은 시기에 따라 성공적인 대응의 마인드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된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시기에는 ‘나는 이런 사태를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마인드의 소심한 관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막을 내리는 시기에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용기 있는 마인드가 필요하다.렘데시비르나 혈장치료제 혹은 그것보다 30배의 효과가 있다는 우리나라 제약 회사의 발표가 있기도 하다. 게다가 6시간 이내로 진단하는 진단키트를 가지고 있고 하루 900명이 넘는 확진자를 처리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당국은 아직 소심한 마인드를 보인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다. 난세의 영웅들이다.지금까지 잘 해온 것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단은 한참 후에나 가능하다. 이제 새로운 마인드로 접근해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올해 안으로 개학을 못할 수도 있다’는 발언에서 과거 홍수가 났을 때 하교를 늦춘 교장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단계적으로 경제활동을 실시하는 유럽과 미국의 선택이 나중에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치료약은 결국 사망자를 줄이고 집단면역을 만들어내는 효과로 건너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대응이 항상 옳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이제 마인드를 바꿔야할 시기가 된 건 아닐까?

2020-04-21

올해부터 달라지는 유아교육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고자 모든 학교는 대면교육을 늦추고 온라인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유아교육에서는 초·중등교육과는 달리 놀이 중심의 하루 일과를 운영하므로 온라인교육이 적합하지 않아 개학이 미뤄지고 있다. 발달단계에 따라 적합한 교육의 형태가 다르다. 어린 연령의 아이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주변을 탐색하며 놀이를 통해 배운다. 초중등학교에서는 가장 추상적인 의사소통 기호인 언어로 교육하는 반면, 유아교육에서는 구체물을 활용하여 행동으로 체득하도록 교육한다. 이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개학을 보류해서라도 온라인 교육을 지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올해부터 유아교육은 놀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교육의 질 제고와 균등한 교육 기회 마련을 위해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정하고 있으며 국가수준의 유아교육과정을 누리과정이라고 부른다. 올해부터 시행될 누리과정은 한 차례 개정되었으므로 개정 누리과정으로 명명한다. 개정 누리과정은 유아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놀이를 지원하고 이를 위해 유아교육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놀이의 중요성에 대해서 교육의 역사를 통틀어 유아교육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으며 지금까지 놀이 중심의 교육과정이 운영되어 왔다. 개정 누리과정은 아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놀이를 하면서 세상을 배워나간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하여 유아의 놀이를 좀 더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진달래 꽃잎을 따다가 화전을 굽는다면 유아는 물질(찹쌀가루)의 변화, 전통음식(화전), 기본생활습관(손씻기), 도구(뒤집개)의 유용성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유아는 소꿉놀이를 하면서 가상의 때와 장소에 적절한 언어 사용, 실생활에서의 역할 시연, 또래와 갈등이나 의견 조율하기 등을 경험할 수 있다. 계몽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겨왔다. 성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미숙해 보이는 유아를 계몽과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교육 성과를 효율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유아 발달의 측정도구를 계량해서 유아를 일률적으로 측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9년 제1차 유치원 교육과정이 제정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전쟁고아를 포함하여 유아를 교육하는 일은 사회복지단체나 민간인의 주도로 이루어져 왔으며 유아교육 행정체계나 질 관리가 부재했다. 때문에 교육의 질 편차를 줄이고 각 유아교육기관을 일괄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교육의 질 관리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이지만 한편으로는 유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부족했음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있었고 이 반성이 누리과정의 개정으로 이어진 듯하다. 유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한 유아교육 학자와 교사는 유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능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올해부터 달라질 유아교육도 유아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유아를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놀이하며 세상을 배워나가는 존재로 재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2020-04-20

책 깊이 읽기 좋은 시절

김현욱 시인대한민국 교육 역사상 최초로 온라인개학이란 걸 했다. 더는 출석을 미룰 수 없어 취한 고육지책이다. 학부모도 학생도 교사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다. 온라인수업이 학생들의 ‘배움과 성장’에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가진 사람에게 온라인수업은 큰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푸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위기가 기회다. 온라인수업을 계기로 교육환경도 개선되고 미래 교육의 토대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코로나19가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5월에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현명한 부모나 교사들은 이 기회를 ‘책 깊이 읽기’로 활용 중이다. 학원도 학교도 자유롭게 못 가는 때라 아이들에게 시간이 많다. 이번 기회에 글밥이 많은 책을 선택해서 가족이 함께 읽으며 좋다. 읽어, 라고 시키면 안 된다. 같이 읽자, 라고 해야 한다. 오빌 프레스콧의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아버지’에는 다음과 같이 말이 나온다. “저절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누군가는 아이를 매혹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여야 한다. 누군가는 아이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우리 아이를 매혹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책의 세계로 이끄는 방법은 부모나 교사의 책 읽어주기 뿐이다. 우리 아이의 독서지도는 꾸준한 책 읽어주기를 통해 함께 읽기, 혼자 조용히 읽기(SSR) 단계를 거친다. 책 읽어주기를 통해 책 읽기에 흥미를 느낀 아이들에게 조금씩 혼자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책 읽어주기에서 자연스럽게 혼자 조용히 읽기로 가면 우리 아이의 독서지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독서교육 전문가 맥 크라켄에 따르면 혼자 조용히 읽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첫째, 교실이나 가정에서는 15분 정도가 적당하다. 물론, 아이의 상태나 상황에 따라 교사나 부모가 적절하게 조정한다. 둘째, 아이가 스스로 읽을 책을 선택한다. SSR 시간 전에 읽을거리를 고르고, SSR 시간에는 다른 책으로 바꾸지 못한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의 성향이나 흥미를 파악해 재미있는 책을 권할 수도 있다. 셋째, 아이가 SSR를 할 때 교사나 부모도 반드시 책을 읽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넷째, 일체의 독후감, 독후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SSR을 절차나 결과물, 성적에 연관시키지 않는다. 책 읽어주기의 최종 도착지가 바로 혼자 조용히 읽기(SSR)이다.단, 책 읽어주기를 통해 책에 흥미를 느낀 아이가 혼자 조용히 읽기를 할 수 있다. 독서에 흥미가 없는 아이에게 혼자 조용히 읽기를 시키는 것은 벌을 주는 것과 같다. 대안은 가족이 함께 읽는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하이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위기철의 ‘무기 팔지 마세요’,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 이현의 ‘푸른 사자 와니니’ 같은 작품들은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재미와 감동을 주는 좋은 책이다. 밥상머리 회의를 통해 읽을 책을 선정하고 1~2주 정도 책 깊이 읽기를 해보자. 그리고 모여서 가정 독서토론을 해보자.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배움과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2020-04-19

풀 이름 부르기

김병래시조시인어느 시인은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구별하지 못하고 시인행세를 한 것이 부끄럽다고 했지만, 종자식물과 포자식물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인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가끔씩 시(詩)에다 ‘민들레 홀씨’란 말을 써먹는 게 그 예다. 이끼나 버섯, 곰팡이처럼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의 포자(胞子)를 홀씨라고 한다는 건 중학교 생물시간에 배우는 상식이다. 그것을 종자식물인 민들레에 갖다 붙이는 건 코끼리를 곤충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림없는 소리다. 남달리 사물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는 시인들조차 이 정도니 틈만 나면 휴대폰이나 들여다보는 아이들이야 오죽할까.이제는 어른들 중에도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밭에서 자라는 밀과 보리, 콩과 팥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좁쌀과 기장쌀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고. 그러니 한 술의 밥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거름 주고, 김매고, 추수하고, 타작하고, 말리고, 찧어서 익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들녘에는 음식이 되는 농작물만 있는 게 아니라 잡초라 불리는 온갖 풀들이 있다. 김매는 아낙들에겐 지겨운 일거리기도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듯이 지천인 들풀인들 어찌 소용이 없겠는가.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한 사막에 비한다면 잡초 우거진 이 땅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생기롭고 풍성하게 하는 낙원인가. 먹고 사는 게 어려울 때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채소나 곡식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잡초에도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곡식이건 잡초건 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요즘은 참 편리하게도 스마트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풀꽃의 이름과 정보를 알려준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면 손쉽게 풀꽃들과 친해질 수가 있겠다. 우선은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특별하거나 희귀한 것보다는 가장 가까이에 가장 흔하게 있는 것들이 우리 정서의 바탕이 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풀꽃으로는 이른 봄의 봄까치꽃, 냉이꽃에서부터 민들레, 제비꽃, 양지꽃, 여름의 개망초와 엉겅퀴, 클로버, 애기똥풀, 달맞이꽃, 가을의 여뀌와 물옥잠, 고들빼기, 씀바귀, 쑥부쟁이 등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꽃이다. 그 밖에도 꽃이 보잘 것 없는 뚝새풀, 겨이삭, 메귀리, 포아풀, 수크렁, 강아지풀 같은 벼과식물이나 방동사니, 하늘지기, 괭이사초 같은 사초과 풀들은 종류도 많고 구별도 어려워서 풀이름 공부의 중급과정은 될 것이다.그까짓 풀이름 따위 알아서 무슨 소용이냐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김춘수 시인도 말하지 않던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들녘에 피고 지는 수많은 풀꽃들 그 하나하나에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이 어찌 쓸데없는 짓이겠는가. 그들이 전해주는 거짓도 왜곡도 의혹도 없는 생명의 메시지가 한갓 부질없는 게 아니라면.

2020-04-16

온라인 수업과 PC방 등교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우여곡절 끝에 일부 학년의 온라인 학교 문이 열렸다. 개학이라고 해서 큰 기대를 했지만, 온라인 개학 전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 학교가 과제 수행 중심 수업을 택했기 때문이다. 휴업 기간 동안 학생들은 과제 폭탄에 허덕였다. 수업이라고 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학생들의 실망감은 크다. 간혹 선생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콘텐츠 활용 중심 수업도 있지만, 대다수가 인터넷 강의 재생 수준이다.달라진 것도 있다. 출석이 인정된다는 것과 교사 권위가 크게 상승했다는 것! 교사의 권위 상승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교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교사들은 온라인 개학 이후 수업 진행자라기보다는 절대 권력의 감시자와 점검자가 되었다. 특히 자신이 낸 과제에 있어서는 확실한 갑이다. 과제를 안 내는 학생에게는 벌점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는 교사들, 그들은 분명 거역할 수 없는 학기 초 “갑”이다. 속마음이야 학생을 위하는 것이겠지만, 학생들의 마음엔 불신과 분노만 자란다. 과제를 해야 할 이유에 관한 설명도, 또 시스템 점검도 없이 일방적으로 지시만 하는 교사들의 마음을 학생들은 모른다.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수업이 뭔지? 과제 수행 중심 수업을 정말 수업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필자는 수업이라는 자리에 “학습”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제 수행 중심 학습! 이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또 설사 이걸 수업이라고 한다면 분명 순서가 있어야 한다. 학생들은 과제 수행 전에 과제와 관련된 교사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생략되었다.일부 학생들은 과제 수행을 위해 PC방으로 달려갔다. “PC방 등교”라는 말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친정부 언론은 이를 두고 과제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악마의 편집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로그인 후 학생들은 무엇을 했을까? 온라인 개학, 교사들은 당연히 학생들이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교사들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당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학생들을 탓해야 할까? 그런데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교육부와 교육청, 그리고 학교와 교사가 온라인 개학의 최우선순위를 학생에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교사가 먼저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시간표이다.다음은 “체계적인 원격 수업을 위한 운영 기준안”에 나와 있는 “수업량”에 대한 내용이다.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중략) 적정 수업량을 확보하도록 노력하여야 함. 학교급, 학습내용의 수준, 학생의 학습부담 (중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탄력적으로 운영이 가능함”분명 기준안에는 학생의 학습 부담을 고려하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일선 학교의 온라인 수업 시간표에는 학생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학생을 위한 시간표가 아니라 교사의 수업 시수 확보와 NEIS 기록을 위한 순전히 교사 중심의 시간표이다.그러기에 일일 7시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시간표가 나왔다. 과연 교사들은 자신들이 짠 시간표대로 7시간 온라인 학습을 할 수 있을까! 온라인 개학에 결단코 학생은 없다!

2020-04-15

온라인 강의 병행(竝行)을 통한 대학의 활로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번역학 전공이달 초부터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이 시행됐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전의 사스나 신종플루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단체생활을 하게 되면, 대규모의 집단감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개학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이버 세계라도 없었다면, 개학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보화에 힘입어 가상의 세계가 열리면서 우리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기반 인프라가 사이버 공간에 의존한다.대학의 경우 정보화시대의 개막 이후 다양한 형태의 온라인 대학이 등장하면서, 학생들이 진학하거나 사회활동을 하는 성인들의 학위취득, 자격증취득 등 다양한 재교육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온라인 대학의 위상과 일반인들이 대체로 기존의 대학들이 주류라는 생각하는 데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이번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대학교 개학의 연기와 이에 따른 온라인 강의의 제공으로 온라인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그 역할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일반대학이든, 온라인 대학이든 그 운영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보완이 있어 준다면, 첫째, 대학진학 인구의 부족에 따른 학생모집, 둘째, 학생들의 취업을 제고하기 위한 전환, 셋째,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유학생 유치, 넷째, 사회인들을 위한 평생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대학이나 학과 및 전공들은 이미 축소, 통합, 폐지 등 존폐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대학교육도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는, 아니 시대의 흐름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는 방향으로의 교육시스템 전환이 시급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온라인에 기반한 교육으로서. 그 백미(白眉)는 바로 온라인에 기반한 다양한 융복합전공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온라인에 기반한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여 사회에서 즉각 필요로 하는 융복합전공을 주도적으로 설계, 운영해 나가도록 한다. 예를 들어, 내 꿈이 사이버 경찰이라면, 경찰행정과 전산, 정보보호 과목을 수강하면서 내가 융복합전공을 운영하면 된다. 국내에 베트남어학과가 개설된 대학교는 세 군데이다. 베트남어를 배우고 싶다면, 베트남어 과목을 제공하는 대학의 수업을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학점을 따면 된다. 그렇게 하나씩 스펙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다시 공부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없이 말이다. 온라인 로스쿨과 야간대 로스쿨은 민주당의 선거공약이기도 하다. 기대가 된다.앞으로 각종 오프라인과 온라인 교육을 상시적으로 병행, 내지 통합해 가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급변하는 사회가 생물(生物)이라면, 대학과 전공도 같이 생물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을 전통적인 하나의 학과나 전공이 모두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 학생도 생물이 되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사회와 현실에서 필요한 융복합적 지식과 전공을 통해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2020-04-13

강물을 보며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거의 매일 형산강 하류의 물을 본다. 근 10년째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형산강 둑에 조성된 자전거길을 달리며 강물과 물빛을 대하게 된다. 가끔씩 물안개가 피어나는 아침과 노을이 얼비치는 저녁 무렵에 바라보는 형산강은 시시각각 형색을 달리하지만, 언제나 유유히 바다를 향해 쉼없이 흘러가고 있다.하류의 형산강은 여유롭고 넉넉하기만 하다. 강폭이 넓고 완만한 물길 탓인지 강물은 흐르는 듯 멈춘 것 같고 멈춘 듯 흐르는 것 같다. 발원지에서 약 60여km를 밤낮없이 달리고 부지런히 흘러와 지척의 종착지를 앞두고 안도하면서 가뿐 숨을 고르는 듯하다. 형산강 하류에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흐르는 물결따라 다수의 동,생물이 서식하고 철새가 도래하는가 하면, 둔치에는 갈대와 억새를 비롯한 무수한 초목이 자생하고 있다. 구비구비 흐르면서 너른 들을 적신 후 하류에서는 마치 배려와 포용의 가슴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생명을 생장시키고 더불어 공생하는 터전을 마련해온 듯하다.지난 3월 말경 섬진강 종주 자전거 라이딩을 다녀왔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섬진강댐을 기점으로 전남 광양시 배알도수변공원까지 이르는 총 153km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아들과 함께 달리면서 한껏 유쾌함을 누렸다. 강진~순창~남원을 지나는 상류는 거의 계류(溪流) 수준으로 간혹 협곡 사이의 강폭이 좁고 천탄(淺灘)을 군데군데 드러내며 빠르거나 늦은 유속으로 산골과 물가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어 곡성~순천~구례 주변의 지류와 하천, 작은 강과 합류되는 중류는 강의 너비와 수량, 수심이 변하면서 완급의 물길로 접어들었다. 이윽고 구례~하동~광양으로 이어지는 하류지역에서는 너른 강바닥에 모래톱을 밋밋하게 펼쳐놓고 서두름없이 산과 들과 마을을 휘돌아가며 바다에 이르고 있었다. 호남정맥 계곡을 타고 흐르는 청정한 섬진강 언저리를 봄바람 속에 달리니 신나기 그지 없었고, 특히 구례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70리 벚꽃길은 덤으로 누리는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물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면서 많은 것을 느낀 여정이었다. 세찬 여울이나 협곡을 거침없이 흐르는 상류의 물살은 청년의 패기처럼 보였고, 합류와 집수로 더디거나 빠르게 흐르는 중류의 굳센 강줄기는 중년의 왕성함으로 여겨졌으며, 여유롭게 휘돌아가는 하류의 수면은 인생행로의 달관과 초탈을 겪은 노년의 느긋한 몸짓으로 비춰졌다. 그러면서 앞서기를 다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水流不爭先)을 보며 나를 되비춰 보고, 파란만장한 삶의 여로에 주야장천 흐르는 물(川流不息)처럼 과연 나 자신도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는지 성찰해보기도 했다.물(水)이 흘러(去) 법(法)이 되었듯이 물은 순리이고 이치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막히면 돌아가고 패인 곳을 채운 뒤에 나아가는(盈科後進) 물은, 기꺼이 낮은 곳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세상 만물에 생기를 주고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같은 물이 고맙고 경이로울 따름이다. 때때로 윤슬로 화답하는 물을 닮아가며 오늘의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2020-04-12

선택

김병래시조시인사람은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산다. 무얼 먹을 것인가, 무얼 입을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음식 메뉴를 고르는 것 같은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배우자나 진로를 결정하는 일생일대의 선택도 있다. 인간의 모든 선택이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결정론적 요소가 내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사람의 일생이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질고 올바른 선택으로 덕업을 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탐욕과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자신을 망치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선택을 하는 사람도 많다. 좋은 선택이란 좋은 성품과 인격과 지혜에서 나오는 것일진대 부단한 자기성찰과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들에게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민의 선택에 따라서 안정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도 하고 혼란과 패망의 길로 몰고 가는 정권이 들어서기도 한다. 어떤 인물이나 이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인 것이 정치적 선택이라는 걸 역사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20세기 초 히틀러의 나치를 선택한 독일국민들은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만행으로 인류에 막대한 해악을 끼쳤고,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선택한 러시아인들이 수천만을 숙청하면서 세운 소련은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지금도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몰락과 패망의 길에 접어든 나라가 한 둘이 아니다.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나라치고 잘 된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그렇고 최근 십여 년 사이에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베네수엘라가 그렇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밀고 간 차베스와 마두로 정부는 얼마 못가서 파탄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도 정책의 실패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대신 야당 탄압과 언론통제, 포퓰리즘 정책을 펼쳐 얻은 지지를 기반으로 헌법을 고쳐 장기집권을 하는 데만 열중했다. 더구나 미국과의 관계악화로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으며 국가혼란으로 치안은 악화되고 정치,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며칠 앞으로 다가온 이번 총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좌·우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좌파가 승리할 경우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급물살을 탈 것이다. 윤석열 총장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검찰마저 완전히 장악을 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반대파들을 제압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들 것이다. 반대로 우파가 승리를 하게 되면 좌파들의 전횡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고수하는 실마리를 잡게 될 것이다. 지금의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이 불안하고 초조한 기로에서 국운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오로지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2020-04-09

과포자에서 공포자까지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수업은 EBS 강사가, 월급은 학교 교사가”온라인 개학이라는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른 숨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실한 말의 힘 앞에 다른 숨을 찾을 수가 없었다.“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가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T.S 엘리엇 ‘황무지’)시구처럼 2020년 4월은 필자가 지금까지 직접 경험한 4월 중 가장 잔인한 달이다. 멈추기 직전의 세계 경제 소식이 그렇고, 가택 연금 수준의 자택격리 중인 사람들의 소식도 그렇지만, 필자를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학생 없는 학교에 가득 핀 꽃 소식이다. 그 꽃들은 망부석처럼 색과 향을 잊어버렸다. 벌들도 흥을 잃었는지 빈 교실 앞에서 요란하기만 하다.그런데 필자를 진짜 아프게 하는 것은 교육부와 교육청, 그리고 학교와 교사들이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하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다. 아니 학생들에게 혼란만 주고 있다. 학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교육부가 온라인 개학이라는 미봉책을 내놓으면서부터이다.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큰 부작용과 피해가 뒤따른다.학교에는 이미 그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교사 간 의견대립과 책임회피와 같은 학교 자율성을 상실한 이 나라 교무실 민낯이 그것이다. 그 결과는 공교육 불신 가중이다. 다음은 EBS 뉴스(‘한 주간 교육현장’ 2020. 01. 24.)다.“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는데요.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학부모들은 교사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98%에 달하는 학부모가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킨다는 (…)”이것이 바로 정부의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 권고에도 학원들이 문을 닫을 수 없는 진짜 이유이다.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교육부가 제시한 다음의 원격수업 유형이 과연 모두 같은 수준의 수업이라고 생각하는지? “① 실시간 쌍방향 수업, ② 콘텐츠 활용 중심 수업, ③ 과제수행 중심 수업, ④ 기타 교육감 또는 학교장이 별도로 인정하는 수업”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이 네 가지가 같은 수업으로 인정되는지 정말 모르겠다.“선생님, 저 과포자 됐어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공포자가 정말 많아요.”졸업생이 전해온 현 교육의 현실을 나타내는 신조어를 듣고 필자는 봄꽃보다 온몸이 더 붉어졌다. 과포자는 과제 포기자, 공포자는 공부 포기자다. 온라인 개학 이야기가 나온 이후에 이런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이 늘었고, 자신은 공포자가 안 되기 위해서 학원을 간다고 했다.얼마나 많은 학생이 과포자와 공포자가 되어야 할까? 더 이상 과제다 뭐다 해서 학생들을 괴롭히지 말자. 교과 진도를 나가지 않을 바에는 괜히 등교 개학 이후에 학생들을 잡도리하지 말고 차라리 온라인 개학 주간을 수행평가 주간으로 운영하자. 그러면 최소한 의미 없는 과제에 가위눌려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댓글도 교사들의 노력을 인정해 줄 것이다.

2020-04-08

명랑한 문화도시

류영재포항예총 회장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것이 감정표출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감정표현이 서툰 나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못할 때가 더러 있다. 기쁨의 표현이야 다소 부족해도 그만이지만 슬픈 일을 당하여 울어야 할 때 눈물이 나지 않으면 여간 당혹스런 일이 아니다.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이른 봄날, 평소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는데, 문제는 한 번 슬피 울고 난 그 다음부터였다. 외아들인지라 십대의 철부지가 상주가 됐고, 집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곡하라면 ‘애고애고’ 곡을 했고 절하라면 절했다. 조문객이 올 때마다 곡을 하면서 마음의 고민이 조금씩 깊어졌다. 곡을 하면 당연히 눈물이 함께 나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빈소에서 간단없이 곡을 하며 할아버지 별세 때 상주인 아버지께서 상을 치르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굴건제복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구슬피 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선명히 기억됐다.천성적으로 감정표현이 서툴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보고 느낀 것, 배운 것은 세월이 가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일희일비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배워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 기쁨도 슬픔도 절반만 표현, 나머지 절반은 삼키고 만다. 사나이는 세 번 운다. 세상에 올 때 울면서 태어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울고, 나라가 망했을 때 한 번 운다던가? 하여간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한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정작 울어야 할 자리에서 눈물이 나지 않는 경우는 몹시 난감하다.그런데 언제부턴가 눈물이 많아졌다. 세상사 가슴 아픈 일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현상이 노화의 일부라 한다. 나이가 들면 남자는 여성화되고 여자는 점차 남성화된다.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조금만 감동하여도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특히 부모님이나 치매에 관한 내용일 경우 더욱 심하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는 펑펑 울었다. 아마도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 되어서일 것이다. 하여간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당혹스럽다. 감동할 일만 많다면 그까짓 눈물이야 얼마든 쏟을 각오가 되어 있으나, 정치판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코앞이다. 정치는 감동이다. 약속을 하고, 약속을 지키며 국민들을 감동시키는 과정이 정치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는 공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문화의 시대에 문화예술에 관한 공약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가 어렵다. 포항 송도해변에 서 있는 ‘평화의 여신상’ 하단에 1968년도 포항시정지표가 새겨져 있다.1. 명랑한 문화도시, 2. 건전한 항만도시, 3. 풍요한 공업도시.배고픔의 해결이 지상과제였던 60년대에도 ‘명랑한 문화도시’가 시정지표의 첫 번째였다. 지금 보아도 얼마나 멋진가!문화가 미래의 성장동력인 시대, 일상이 문화가 되는 포항을 약속한 선량은 누구인가? 두 눈 부릅뜨고 살펴서 그에게 표를 주자.

2020-04-07

찬란한 슬픔

조현명 시인봄이 되니 지천에 꽃이다. 벚꽃은 벌써 지고 개나리 철쭉이 산천에 잔치를 벌인다. 꽃이 피니 세상이 밝아지고 아름답다. 바람에 꽃잎이 휘날려 밝은 빛이 내린 듯 열기가 가득하다. 그야말로 신천지다. 헉 여기에 신천지가 나오다니.그러고 보니 세상은 양면성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좋은 뜻을 담고 있는 단어가 온 세상의 지탄이 된 사이비종교의 명칭이었다니….코로나19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우한’과 ‘신천지’ 등이다. 우한의 봄에도 꽃이 필 것이고 신천지의 교단에도 꽃을 장식하고 꾸미는 헌화가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이 꽃 잔치를 슬픔과 죽음의 상가로 바꾸었다. 바깥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고 기쁨의 빛이 넘쳐흘러도 코로나19로 집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림 속의 덧없는 풍경일 뿐이다.몇 해 전 젊은 조카가 세상을 떠났다. 어찌 되었건 그해 봄날 벚꽃아래에서 웃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누나는 오열하고 만다. 벚꽃아래에서 웃고 떠들던 그 음성조차 잊지 않고 기억나고 지워지지 않는다. 벚꽃만 피면 그 찬란한 슬픔 때문에 꽃구경은커녕 눈물로 적신다고 했다.올해 봄 코로나19로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역시 이 꽃 잔치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찬란한 슬픔이라고 이름 지어도 괜찮을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꽃이 아름다워 마음속에 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람 세상의 꽃은 어린이, 젊은이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순간에 더러워지고 추해지는 것이 꽃이기도 하다.목련이 필 때의 아름다움보다 목련이 지고 난 뒤 그 시체들의 추함을 나는 주목한다.물론 그것도 곧 바람에 쓸려나가고 말테지만 꽃들은 다 죽음을 안고 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사람들은 추한 것은 가까이하지 않고 밝고 예쁜 것을 가까이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꽃이 진자리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은 꽃이 진자리가 진면목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확대한 모습을 보면 마치 꽃 같다. 물론 왕관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코로나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 같다. 저들의 사멸과 결국은 똑같을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 말이다.모질지만 사람은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난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숙명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꽃들은 다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부터 꽃을 그대로 보지마시길…. 저것들이 저마다의 깊은 슬픔을 안고 아름답게 꾸미고 나와서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을…. 저것들이 짐짓 세상의 슬픔은 혼자서 다 감당하겠다고 찬란하게 폭발하고 있음을…. 미당은 시 ‘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복사꽃 픠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봄’ 전문

2020-04-06

우리 아이 독해력

김현욱 시인위리안치가 따로 없다.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집과 집,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어른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이 무슨 죄인가.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집콕’했던 것도 억울한데, 이번엔 코로나19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 갇혀 시름시름 앓는 중이다. 그런데다 온라인 개학까지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컴퓨터나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수업을 들어야 한단다. 원격수업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웬만한 동기와 의지가 아니고서는 꾸준히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을. 하물며, 아이들이야! 아이들의 온라인 수업은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곁에서 추임새를 넣어줄 고수나 페이지를 넘겨줄 페이지 터너가 필요하다. 엄마나 아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곁에서 거들어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담임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초등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독서와 글쓰기다. 초등교육의 핵심은 독서와 글쓰기의 기초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중에 한 가지만 고른다면, 단연코, 독서다. 독서를 통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독해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아이의 독해력 수준은 어떨까? 지난주에 초등 3학년 딸과 탈무드의 ‘마법의 사과’를 읽고 토론, 글쓰기를 했다. 원문은 ‘탈무드’를 찾아 읽어보면 좋겠다. ‘탈무드’는 초등학생 자녀와 읽고 토론하기 좋은 책이다. 자녀와 함께 다음 글을 읽어 보자.“어떤 왕에게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병에 걸려 위급했다. 왕은 딸의 병을 고쳐주면 딸과 결혼시키고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포했다. 그때 먼 지방에 삼형제가 있었다. 그들 형제는 각자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형은 어느 곳이라도 볼 수 있는 마법의 망원경을, 둘째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법의 양탄자를, 막내는 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는 마법의 사과를 갖고 있었다. 그들 중 첫째가 그 소식을 알고는 공주의 병을 고쳐주자고 말했다. 삼형제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 마법의 사과를 공주에게 먹였다. 공주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 왕은 매우 기뻐 삼형제 중 한 사람을 사위로 맞겠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난감했다.만일 여러분이 왕이라면 누구를 사위로 맞을 것인가?”‘마법의 사과’를 읽고 요약할 수 있는가? 모르는 낱말의 뜻을 짐작할 수 있는가? 육하원칙 질문, 만약에 질문, 왜 질문 등에 답할 수 있는가? 우리 아이의 독해력 수준을 가늠해보려면 책 읽어주기를 통해서 점검해야 한다. 독해력은 꾸준한 독서토론, 글쓰기를 통해 향상된다. 딸은 마법의 망원경을 가진 첫째가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가 아니었으면 공주가 아픈 걸 몰랐을 거라며. 책에는 마법의 사과를 가진 셋째와 결혼해야 한다고 나온다. 셋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토론을 통해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왕이 아니라 공주가 삼형제와 각각 데이트를 해보고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누구의 공이 더 큰가보다 누가 공주의 취향이나 성격에 잘 맞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코로나 19로 자녀와 독서토론 할 시간이 늘었다. 그건 고맙다.

2020-04-05

서버 터지다, 대학 입시 일정만이라도!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봄꽃은 터지는데, 학교에는 학생의 웃음꽃 대신 서버가 터졌다. 그사이 3월이 속절없이 갔다.“선생님, 접속이 잘 안 되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안내문 잘 읽어보세요.” “선생님, 다시 해도 잘 안 돼요.” “안내문 잘 읽어보라니까!”붕어빵과 같은 온라인 과제 학습 방침에 서버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터진 것은 서버뿐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분통도 터졌다. 교사들 또한 답답해서 속이 터졌다.사전 설명은커녕 개학 후 검사를 하겠다는 엄포와 함께 제시된 온라인 과제 학습. 만약 필자가 지금의 학생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마 지금 학생들처럼 서버가 터지도록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모르겠다, 지금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했을지도! 그때는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서 학생들에게 의미 없는 과제를 하명하는 교사들보다 제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당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바이러스와 싸우는 선생님들이 많으셨기 때문이다.온라인 개학 때문에 또 말이 많다. 가정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교사나 교원단체들이 온라인 개학에 대해서 하는 말들은 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필자는 3월 19일 칼럼(노트북과 코로나 19, 그리고 학교)에서 이미 낡은 노트북 한 대로 아주 효과적으로 온라인 대면 수업을 하는 산자연중학교의 이야기를 소개했다.또 교육부와 교육청에 화상 수업을 수업일수에 포함해 줄 것을 건의하는 민원(3월 17일)을 제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답을 3월 22일에 교육부에서 받았다.“(….) 초중등교육법 제64조에 따르면 ‘휴업명령’에 따른 휴업 기간 중에는 수업과 등교가 중지됩니다. 우리 부에서는 현재 휴업 기간 중 학습 공백을 예방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의견수렴하여 마련 중에 있음을 안내드립니다.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안다. 그래도 필자는 교육부와 교육청의 답글을 보고 속이 터졌다. 3월 27일 교육부가 발표한 ‘원격수업 운영 기준안’을 보고서는 당황스러웠다. 온라인 개학이라는 말을 보면서 반가웠지만, 갑자기 바뀐 교육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온라인 수업 시범학교를 운영하겠다는 말에 3월 둘째 주부터 쌍방향 온라인 대면 화상 수업을 하는 산자연중학교는 존재를 잃어버렸다.화상 수업을 4주째 운영하는 필자로서는 시범학교 운영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 또 어떤 시험의 대상이 될지, 거기서 또 얼마나 큰 혼란을 느낄지 학생들에게 미안해졌다.지금 최고의 혼란 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말이 고3이다. 아니래도 힘든 고3들에게 지금과 같은 의미 없는 붕어빵 과제가 말이나 되나! 개학 일정도 중요하지만, 고3들을 위해 정확한 대입 일정만이라도 먼저 제시하자. 이대로 가다간 서버가 터졌듯이, 고3 유권자들이 터질 날도 멀지 않았다.

2020-04-02

버들피리

김병래시조시인‘월사금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쫓겨 가면/ 보리밭 김매는 엄마 먼발치로 보이는/ 냇가에 숨어 앉아서 버들피리나 만들었다// 엄마 가슴 에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버들피리 불며 가는 시오리 보리밭길,/ 말갛게 뜬 낮달처럼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졸시 ‘버들피리’이 시의 배경은 1960년대 초반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불 미만이어서 외국의 원조 없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절대빈곤의 시절이었다. 국민학교로 불리던 초등학교에도 매달 몇 십 원씩 납부금을 내야 했다. 육성회비란 말이 있기 전에는 그걸 월사금이라고도 했다.납부금이 몇 달씩 밀리면 담임은 고육책으로 조회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성미가 고약한 교사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마도 납부금 거두는 실적이 좋지 못하면 담임이 문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돈을 두고도 일부러 납부금을 안 내는 게 아닐진대 매질을 하고 집으로 돌려 보내봐야 당장은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다그쳐야 우선 급한 불부터 끈다고 조금이라도 더 실적을 올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닌 아이들에게는 그게 새삼스럽게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넓은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서는 동안 쫓겨난 아이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텅 빈 집 부엌에서 냉수나 한 사발 들이켜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가 되짚어 학교로 가는 게 고작이었다. 쫓아내면 쫓겨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서 곧 준다더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위의 시는 그러던 어느 봄날의 추억이다. 시냇가 버들가지에는 연둣빛 새잎이 돋고 파랗게 자란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높이 떠 종알거리는 봄날이었다. 보리밭 고랑에 웅크리고 앉아서 김을 매는 엄마가 저만치 보였지만 엄마 앞에 가서 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 왔다는 소리를 할 만큼 철부지는 아니었다. 냇가에 숨어 앉아서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연필을 깎으려고 산에서 주운 기관총 탄띠를 펴서 만든 주머니칼이 요긴하게 쓰였다. 잘라낸 버들가지를 비틀어 껍질과 분리된 속 줄기를 빼내면 굵은 빨대 같은 껍질이 남는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한쪽 단면의 겉껍질을 조금 벗겨내면 그것이 떨판 구실을 해서 입으로 불면 소리가 난다. 불어보지 않아도 굵고 길면 낮은 소리가 나고 짧고 가늘수록 고음이 난다는 것쯤은 잘 알았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산모롱이를 돌아와서야 버들피리를 불었다. 버들피리소리는 꼭 울음소리 같다. 버들피리를 마음껏 불어대면 속엣 것이 다 후련하게 뽑혀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시인은 이 시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서럽고도 막막한 상황에 대처하는 어린 소년의 마음이 참 의젓하고 꿋꿋하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거나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리라. 틈만 나면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시다. 하루쯤 아이와 함께 가까운 교외로 나가서 버들피리도 만들어 불어보고 이 시도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

2020-04-01

2020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며칠 전이었다. 개강 준비를 마치고 연구실에서 나서는 길, 주차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캠퍼스를 잠시 거닐었다.시원한 바람이라도 잠깐 쐬면서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스트레스를 좀 달래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모처럼 햇살이 좋아서 소독이라도 하려는 듯 온몸에 받았다. 하늘과 잔디밭도 푸르게 빛나 눈이 부셨다. 어느 새 봄이 온 모양이었다. 우연히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가르마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학창시절 즐겨 외우던 시구가 떠올랐다.‘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기분이 좀 풀린 듯한 느낌도 잠시, 기억을 되감아 그 시의 첫 구절을 읊조리고는 이내 울컥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흉포한 바이러스의 침략으로 한 달 넘게 지척의 부모님, 가족들과도 화상통화만 하던 설운 내 마음속으로, 빼앗긴 조국의 들에서 피눈물로 그 시를 썼을 시인의 마음이 훅하고 빨려 들어와, 백년의 시간을 넘어 절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새해 들며 슬며시 쳐들어와 저 들을, 거리를 텅 비워버린 바이러스는, 우리에게서 2020년의 첫 두어 달을 ‘순삭’시킨 후 이제 봄까지 빼앗으려 넘보고 있으니, 그 시절 무도한 침략자들과 무엇이 다를까.옷자락을 흔드는 바람,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는 종다리,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 민들레, 제비꽃, 부드러운 흙….봄이 온 기쁨을 만끽할 수조차 없었던 시인은 빼앗긴 들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고맙고 따스한 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푸른 웃음 푸른 설움으로 뒤범벅된 그 심란한 마음을 달랬으리라.시인의 봄 신령이 옮겨 지폈는지, 평소라면 IT기술과 AI로 코로나와 전쟁에 뛰어든 기업들의 이야기만 찾았을 공학자도 인터넷을 뒤져 불안만 키우는 뉴스들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담들을 찾아내며 기뻐한다.전국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의료진들, 보호구 자국을 얼굴에 훈장처럼 새긴 거인 같은 그들의 미소, 개점휴업 중인 식당의 식재료를 소진해 주고 의료진의 식사를 챙겨 보내는 사람들, 침침한 눈으로 손수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는 어르신들, 앞 다투어 이어지는 기부행렬, 포항의 드라이브 스루 횟집, 이탈리아의 발코니 음악회, 노인을 비롯해 건강에 취약한 이들이 편안하게 생필품을 살 수 있도록 1시간 먼저 문을 열기로 한 착한 상점들….우리의 그런 노력들이 어우러져 마음까지 얼려버릴 듯한 팬데믹의 시대를 훈훈하게 덥혀 줄 것이다.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의문문은 머지않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구나!’라는 감탄문으로 바뀔 것을 믿는다.

2020-03-30

마음의 방역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밤새 안녕’이 부쩍 실감나는 요즘이다. 코로나19 여파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듯한 시기에,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인사나 위로해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정겹고 따듯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살가운 마음을 나누듯 다정한 인사와 대화를 건네면 어떨까?세상이 미증유의 감염증으로 요동쳐도 계절은 어김없이 새봄의 바퀴를 부지런히 굴려가고 있다. 메말랐던 땅과 앙상했던 가지에 돋아나는 새싹과 피어나는 꽃들이 세상에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 듯하다. 만물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봄 마중도 하고 해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들에게 눈인사라도 건네야 하는데, 암울한 장막같은 바이러스가 길을 막고 불안감이 발목을 잡으니 속절없을 따름이다.인사는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이다.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루를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마무리한다. 인사는 서로가 알아보는 관계의 첫 출발이자 반가움과 공손함을 드러내는 예(禮)이기도 하다. 상대방에게 관심과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도, 마음의 문을 여는 것도, 상호 간의 소통도 인사를 나눈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일상에서 만나거나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는 감사의 마음이기도 하고 넉넉한 정(情)이기도 하다.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되면서 ‘코로나 블루(Corona Blue)’라는 사회적 우울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일상이 움츠러들고 바뀌면서 사회적인 단절로 인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안하면 몸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피한 요즘이지만, 이웃과 동료들 간에 주고받는 인사와 따뜻한 말 한마디는 자연스럽게 이어가야 평온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불안하고 우울한 마음도 심리적으로 전파된다고 한다. 슬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 같이 슬픔의 늪에 빠져 힘들어하기 보다는 서로가 마음으로 다독이고 보듬으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장기화 조짐의 코로나 사태에 봉착해서 몸이 지치지 않도록 마음의 방역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른 바 ‘심리 방역’이라고 하는 마음의 방역이란 감염병 유행 시기에 생기는 마음의 고통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것이다. 다가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처해 있는 상황에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을 실천을 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뜸했던 사람들에게 전하는 안부 인사나 SNS를 통한 소통과 교감, 긴장을 풀어주는 가벼운 운동, 마음의 휴식을 위한 명상,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온정과 봉사 참여 등으로 마음의 안정감을 찾고 무력감을 달래 나간다면 그 자체가 방역이고 면역인 것이다.특별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봄 햇살같이 따뜻한 시선과 위로의 말로 나누는 인사가 지쳐가는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져줄 것이다.모두가 어려운 때 긍정과 희망, 배려와 격려의 나눔이 마음의 거리를 가까이 하고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가꿔나갈 것이다.

2020-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