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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랏돈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 사회에 “나랏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다. 나랏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줄줄 샌다는 뜻인데도 그런 나쁜 관행이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라 걱정이다.나랏돈은 엄밀히 따지면 국민이 주인이다. 국민 주머니서 나온 세금으로 국가가 살림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대신해 국가 공직자가 그 돈으로 나라 살림을 살아가는데, 알뜰살뜰 살지 않으면 국민의 부담이 커지는 구조다.국민이 낸 세금을 잘 쓰고 있는지 감시하고 감독하는 곳은 국민이 뽑은 국회다.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를 대표해 국민이 낸 세금이 적재적소에 쓰이고 있는지 행정부와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그 결과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우리나라 예산 규모도 이제 600조원을 넘었다. 선진국 반열에 들면서 복지비 등 쓸 곳이 많아진 탓이다. 하지만 규모가 큰 만큼 돈이 짜임새 있게 설계돼 필요한 곳에 제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운영하고 감시하는 국가 시스템이 잘 작동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 한다.감사원이 최근 정부 지원 비영리 시민단체에 대한 감사를 진행한 결과, 10개 민간단체 대표 등이 국고보조금을 임의대로 횡령하고 마구잡이 쓴 것이 밝혀졌다. 일부 민간단체는 대표자의 자녀 사업비나 주택 구입비로 국가 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고, 가족들은 그 돈으로 콘도나 골프를 했다고 한다. 또 정부가 사회보장 수단으로 지급하는 실업급여를 타내기 위해 편법과 도덕적 해이가 난무하면서 고용보험기금도 이제 바닥을 드러냈다고 한다.나랏돈 빼먹기에 혈안이 된 사회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5-30

성숙한 인공지능을 기다리며

이상산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장 인공지능의 시대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통해 학습한다.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는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 토대가 되었다. 학습에 사용할 데이터는 양적으로 폭발하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정보는 이런 데이터의 양과 다양성 증가에 일조하고 있다. 그런데 SNS에 게시되는 데이터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 노출하기에 편향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런 데이터에 매몰된 우리는 편향과 오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견해를 더욱 강화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인공지능의 시대, 특별히 생성형 인공지능이 열어놓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 발전의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술만능주의에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유의해야 한다. 인공지능 분야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더라도, 그 기술은 불가피하게 데이터에 의존하게 된다. 또한 효과적인 생성형 인공지능의 학습 과정에는 인간의 평가가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보여주고 싶은 것만 노출하는 SNS, 대화와 토론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온라인 매체들에 포위된 우리는 편향된 데이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데이터는 대상을 관찰하고 인식하는 주체의 관점을 반영한다. 편향을 줄이려면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의 한계로 관찰하지 못한 영역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직까지의 인공지능은 지식의 가공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접근 가능한 데이터에 의존하고, 모델이 예측한 결과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평가 또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신뢰도는 사용한 데이터의 품질과 평가에 참여한 인간의 수준에 따라 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최근 인공지능이 생성한 불완전하거나 악의적인 정보로 인한 사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국회에서 문체위 소속 이상헌 의원이 대표 발의한 ‘콘텐츠산업 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입법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 법률개정안은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콘텐츠를 공개할 때 인공지능에 의한 제작물임을 표기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입법 취지에 무책임한 생성형 인공지능의 오남용을 방지하려 한다고 밝혔다. 세계 각국에서 이와 같은 입법 활동이 활발하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 기술이 장기적으로 근거 데이터와 학습 방법을 밝힐 수 있는 책임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기술로의 발전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한다.오늘날 인공지능은 사용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데이터는 지식의 영역을 다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인공지능에게 공감과 지혜를 기대할 수 없다. 편향 없는 데이터에 기반하고 성숙한 인간이 평가에 참여해야 바람직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가능하다. 오늘의 인공지능은 힘은 세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춘기 모습이다. 기술이 견인하고 법과 제도가 틀을 잘 잡아야 균형 잡힌 인공지능이 가능하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내일, 성숙한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를 기대한다.

2023-05-30

5월을 보내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보리누름의 즈음에 초목은 더욱 푸릇푸릇하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온통 푸르름인데 군데군데 맥랑(麥浪)이 이는 들판엔 누렇거나 갈빛을 띄며 보리가 익어가니 이른바 맥추(麥秋)이다. 푸르른 초목의 캔버스에 누런 보리물결의 채색은 선명하면서도 대조적이다. 강물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게 보이고(江碧鳥逾白) 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타듯 더욱 붉게 보이는 것(山靑花欲然)처럼, 이따금씩 배경의 빛깔이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물과 대상이 두드러지거나 각광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강둑에 줄지어 서서 노란 웃음꽃을 피우는 금계국도 대조적인 인상을 준다. 연녹색과 초록의 줄기에 돋아난 잎들 사이사이로 샛노란 꽃을 아기자기하게 품고 피우며 가볍게 살랑거리는 자태는 앙증스럽기만 하다. 꽃이 피기 전까지는 길섶의 들꽃이나 야생초쯤으로 여겨져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하나씩 노란 꽃잎을 흔들며 길손을 반기고 온몸으로 환호하니 자연히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배경이 되거나 어쩌다가(?) 주연으로 부각되는 기회가 있기도 할 것이다.“더 열심히 파고들고/더 열심히 말을 걸고/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더 열심히 사랑할 걸….//반벙어리처럼/귀머거리처럼/보내지는 않았는가/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중어쩌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로 하루하루 자신만의 꽃봉오리를 피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풀과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꽃밭을 이루고 숲을 키워가듯이,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개성의 꽃’을 피우며 사회를 조화롭고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것이리라. 꽃을 피운다는 것은 에너지를 응축시켜 절정으로 치닫는 것이다. 노력하고 인내하고 도전하고 진취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재능을 한껏 불살라 꿈을 향한 도움닫기를 줄기차게 펼치는 것이다.불꽃놀이는 꿈의 결정체를 벅차고 강렬하게 터뜨려서 순간적이지만 스러져서 외려 아름다운 불꽃예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꿈이나 꽃이 피어나는 과정의 형상화를 불꽃으로 승화시켜 ‘찰라 예술’로 연출함으로써 생생한 감동과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주 형산강 둔치에서 4년만에 열린 ‘2023년 포항국제불빛축제’에 25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호응이 컸다. 명실상부한 전국 3대 불꽃축제의 면모를 보이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코로나19 태풍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 포항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불빛을 선사했다.감사와 사랑으로 5월을 마무리하며, 마침 6월부터는 ‘노 마스크’에 이어 ‘격리’도 해제되어 사실상 40개월만에 엔데믹(감염병의 풍토화) 전환에 진입하니 완전한 일상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 나누고 베풀며 아끼고 챙겨주는 배려의 꽃이 찬란한 기쁨의 폭죽으로 옴팡지게 터지길 기대해본다.

2023-05-30

‘대구경북 인공위성’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연구본부장 지난 5월 25일 오후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또한 우리 기술로 제작된 위성 8기를 싣고 고도 550㎞까지 진입하여 모든 위성을 목표 궤도인 여명-황혼 궤도에 분리했다. 곧이어 분리된 8기의 위성 중 주 탑재위성인 차세대 소형위성 2호와 쌍방향 교신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누리호 3차 발사 성공조건인 누리호의 목표 궤도 정상 진입과 주 탑재위성의 정상 작동을 모두 충족한 것이다. 이번 결과는 1993년 6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발사한 KSR-Ⅰ호 이래 30년 만의 쾌거이다.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1992년 초보 수준의 과학위성 우리별 1호이다. 이때는 5개월이나 지나 정식으로 궤도에 진입하여 작동을 시작하였으나 이번에 쏘아 올린 차세대 소형위성 2호는 바로 궤도 진입 후 작동을 시작했다. 이번 성공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실용급 위성의 우주 수송능력을 갖춘 미국, 러시아 등 6개 나라에 이어 7번째 국가로 우주강국 G7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독자적으로 지구를 비롯한 우주 전체를 실험하고 연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우주산업과 이와 연계된 비즈니스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이번 발사체 누리호와 8개의 인공위성은 상업용 우주선과 위성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 의미가 크다. 이번 8개의 인공위성은 북극해빙변화, 산림생태변화, 해양환경오염탐지 등 지구관측이나 우주의 날씨 변화, 방사능 분포 탐지 등 순수 연구목적이 대부분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운영하는 주요 인공위성은 KOMPSAT 시리즈(지상관측), 천리안 시리즈(기상 및 환경), KITSAT 시리즈(교육및실험), COMS(통신, 해양, 기상), 넷츠 시리즈(통신 실험), 아리랑 시리즈(국방, 지상 관측) 등 다양하나 상업적 활용은 제한적이다.상업용 인공위성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통신 위성, 위성 방송, 지상 관측 위성, 탐사 및 과학 위성 등으로 분류된다. 통신 위성은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인텔사트(Intelsat), SES 등이 주요 서비스 제공자이다. 위성 방송은 TV와 라디오 등을 위성으로 전송하여 방송되며, 디렉TV, 스카이 등이 대표적인 서비스 제공자이다. 지상 관측 위성은 기상 예보, 환경 모니터링 등에 활용되며, 랜드사트, 스푸트니크 등이 주요한 위성이다. 탐사 및 과학 위성은 우주 탐사와 천문학적 연구를 위해 사용되며, 히슬리 암스테드, 찬드라얀-1 등이 대표적이다.이러한 상업용 인공위성들은 지역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위성 통신은 지역 사회의 디지털 접근성을 높여 비즈니스,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혜택을 제공한다. 위성 방송은 지역의 문화 콘텐츠를 널리 보급하여 관광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촉진한다. 지상관측 위성은 자원 관리, 환경 모니터링, 재난예방 등을 통해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원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대구경북지역의 농림수산업 지원 및 도시 관리, 재난·재해 대응과 탄소 모니터링 등에 특화된 ‘DGSat(대구경북 인공위성)’의 운영이 기대된다.

2023-05-29

비행기 비상구

홍석봉 대구지사장 여객기의 좌석은 중간 중간에 1열 정도 빈 좌석열이 있다. 통상 비상구를 내기 위해 비워둔 곳이다. 이 곳 뒷 자리는 자연히 공간이 넓다. ‘비상구 석’으로 불리는 이 자리는 항공 여행객들의 선호도 1순위다. 비상구 석은 앞 좌석이 없고 다리를 뻗을 수 있어 일부 항공사는 일반 석보다 비싼 값에 판매하기도 한다.대부분의 항공사는 이 좌석은 예약시 좌석 지정이 불가능하다. 비상구 옆 좌석이라 체크인 카운터에서 건강한 성인 남성 위주로 배정한다. 상당수 항공사는 비상구 좌석 배정 조건으로 영어에 능통할 것을 요구한다. 비상 사태 발생 시 이 자리에 앉은 승객이 승무원의 지시 사항을 알아듣고 비상구를 열고 다른 승객들이 비상구로 대피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고려한 것이다.지난 26일 제주에서 대구로 오던 아시아나항공 여객기에서 대구공항 착륙 직전 213m 상공에서 30대 남성에 의해 비상구 출입문이 열리는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외신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올 초 러시아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1월 이르아에로 항공 전세기가 러시아 동부 한 공항에서 이륙 직후 뒷문이 열려 회항한 사례가 있다. 민항기가 개문 운항한 사례는 국내 처음이다. 국내에서 두 차례 항공기의 비상구 개방 사고가 있었으나 모두 운항 중이 아닌 주기, 또는 지상 이동 중 발생한 사고다.항공보안법에 승객은 항공기 내에서 출입문, 탈출구, 기기의 조작을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시 출입문을 조작한 사람은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아시아나 항공은 사고 후 같은 기종의 비상구 옆 좌석 판매를 중단했다고 한다. 황당무계한 사고가 잦다. 요지경 세상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5-29

자본의 사생활, 편의점에 진열된 인생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표지. 동네마다 자리했던 슈퍼나 작은 구멍가게들을 대신해 어느새 전국 곳곳에 모두 같은 모양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는 편의점이 들어찬 시대가 되었다. 밤새 운영한다는 의미의 ‘편의(convenience)’는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젠 편의점 없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난 뒤 남아 있는 한국 사회의 풍경을 회고한다면, 아파트와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빼고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맞는 시대적 상징이 되는 공간이 존재한다면, 편의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공간인 셈이다.한국에서 편의점이라는 공간이 처음 생긴 것은 80년대 말이었다. 24시간 일용품을 구입한다는 편의점이라는 콘셉트는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분명 신기한 곳이었을 테지만, 그 신기함이 일상으로 바뀌지 않으면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어떠한 의미도 갖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한국에서 최초의 편의점은 실패하고 문을 닫았지만, 이후 90년대 초부터 편의점 공간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리 어디를 가나 편의점을 만날 수 있다.편의점에서 우리는 일상을 산다. 때를 놓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컵라면과 도시락을 사고, 힘들었던 하루를 소박하게나마 기념하기 위해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고, 급하게 필요한 물티슈나 칫솔 등을 사기도 한다. 가끔은 아무 것도 살 것이 없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러, 투플러스 원으로 파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봉지를 사들고 오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라는 것만큼 인간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면, 편의점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비싼 것 없는 것들 사이를 고민하는 현대의 인간의 소비야말로 현대 인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명품의 소비처럼 계층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우리는 일상을 사고, 일상에 머물기를 바란다.한국 사회에 문득 등장한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담긴 의미를 가장 본격적으로 관찰하고 의미부여했던 작가는 아마도 김애란일 것이다. 2003년에 발표했던‘나는 편의점에 간다’라는 소설에서 작가 김애란은 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의 관점에서 당시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한 편의점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살폈다. 바로 직전까지 친밀한 가족에 기반한 서로에 대한 관심의 시대를 보내왔던 한국 사회에서 편의점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 이외에는 쓸데없는 관심을 주고 받지 않는 산뜻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거대한 관대’의 공간이야말로 관계의 압박에서 질식해가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축복만 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 20년 전 한국은 집단적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로부터 개인들의 사회로 이전했으며, 이제 모두 외로운 섬이 된 인간들은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재작년 출간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작가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은 우리가 편의점이라는 공간 속에서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바란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 속에서 편의점은 서로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게 된 인간들이 서로에 대한 관심을 끝끝내 놓지 않는 공간이다. 편의점은 발주와 폐기 사이에서 일상이 존재하는 곳이고, 고객과 진상 사이에서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누구나 가야만 하는 곳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20년을 사이에 두고 나온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며, 편의점에 진열된 우리의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편의점과 또 다른 편의점 사이를 흘러가고 있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5-29

조선시대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

장심학의 문집 ‘강해집’중 ‘관등기’ 일부분.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의 총아, 고도서(https://book.ugyo.net)’ 4년 만이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 제한으로 조용히 지나갔던 부처님 오신 날, 4년 만에 방역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면서 마스크 없는 봉축 법요식이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열렸다. 오색 연등으로 뒤덮인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신도와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법요식을 치렀으며,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를 했다. 올해는 더구나 부처님 오신 날이 토요일이라고 대체 휴일이 주어짐에 따라 사흘 연휴까지 생긴 바람에 전국이 더욱 들썩였다. 비가 예고된 궂은 날씨였지만 사찰을 찾는 신도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나들이에 나선 차량으로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았으며,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공항은 북적였다. 오랜만에 ‘부처님 오신 날’이 축제 분위기와 함께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지나갔다. 물론 모두가 종교적 차원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황금연휴와 함께 시작한 부처님 오신 날이라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봉축 법요식을 지켜보고 또 축하했다. 1841년(헌종7) 음력 4월 초파일, 포항 출신의 장심학(張心學·1804~1865)은 서울에서 화려하게 열린 관등(觀燈) 행사를 다소 놀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 경험했던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을 기록해 ‘관등기(觀燈記)’를 남겼는데, 이 글은 장심학의 문집인 ‘강해문집(江海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장심학은 글의 첫머리에서 “임금 즉위 7년 신축(헌종7, 1841) 윤3월에 춘당대에 직접 나오셔서 인재를 선발했다. 시험에 떨어진 나는 한양을 구경하다가 마침 4월 8일을 만났으니, 풍속에서 이른바 석가(釋家)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라고 기록하며 자신이 서울에서 석가탄신일을 보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 해 윤3월 13일 헌종은 춘당대에서 경과정시(慶科庭試)를 설행(設行)하고, 문과(文科)에서 이호형(李好亨) 등 19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나경준(羅敬俊) 등 218인을 뽑았는데 안타깝게도 장심학은 이 시험에서 낙방했다. 37세의 청년 장심학은 이왕 먼 길까지 온 차에 서울을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장심학은 이어서 “신라나 고려의 사람들은 이날에 등을 달고 술잔을 올려 빌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였는데, 말세의 풍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고 기록했다. 숭유억불을 내세워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한 시대였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4월 초파일에 관등 행사를 치렀고, 이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심학은 계속해서 연등을 거는 장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연등의 모양은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지 그리고 연등이 무수하게 걸린 풍경은 어떤 모습인지를 아주 자세하고 또 실감나게 묘사했다. 석양 무렵 종로의 거리 양쪽에 남극과 북극이 하늘을 지탱하는 듯 서 있는 장대들과 그사이에 매달아 놓은 연등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것은 가로로 이어 연결하니 꿰어놓은 구슬 같고, 어떤 것은 수직으로 이어서 드리우니 매달아 놓은 옥 귀걸이 같았다. 어떤 것은 둥글게 묶으니 반짝이는 구슬 모양이 되며, 어떤 것은 연등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천세태평(千歲太平), 수복(壽福) 등과 같은 모양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날 장심학의 눈에 비친 서울 도성은 집마다 연등으로 장식하고 창문은 비단으로 꾸민데다가 시장과 기루(妓樓)의 주렴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낯선 광경이었던 것이다. 가장 압권은 도성의 남녀들이 관등놀이를 한다고 모여드는 순간이었다. 장심학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저녁에 도성의 많은 남녀들이 남북의 산 중에 높고 트인 곳에 올라 관등놀이를 하였다. 고운 옷에 향낭을 차고서 진홍색 비취색 옷으로 물들이며 구름과 안개처럼 무리지어 늘어서서 떠들썩하게 노래를 불렀다. 연하게 저민 고기 안주와 요란스럽게 울리는 현(絃)과 관(管)의 악기소리는 또한 하나의 태평한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었으니, 영남 사람으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지방 출신이었던 그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다. 그 규모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현재 우리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장심학은 서울의 화려한 모습과 수많은 인파에 그저 할 말을 잃고 압도되었을 것 같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1819년(순조19)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 저술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4월 초파일에 석가의 탄신을 기념해 연등을 만들어 매다는 풍속의 기록이 있다. 민가와 관청, 시장에서는 모두가 등간(燈竿)을 세워 연등을 매다는데 등간은 십여 길(대략 18m)이나 되는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등간 위를 비단 깃발로 장식한 후 갈고리 달린 막대기를 가로대고 갈고리에 줄을 얹어 그 줄의 좌우끝이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한 다음 그 줄에 연등을 매달고 밤이 되면 줄을 잡아올려 공중에 연등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등은 마늘, 외, 꽃잎, 새, 짐승 같은 형상의 것, 또 누대(樓臺)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각양각색으로 꾸며져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키는 어렵다고 했다.

2023-05-29

바다에서 새 희망을, 도약하는 대한민국

주낙영 경주시장 제28회 바다의 날 기념식이 31일 경주엑스포대공원 백결공연장에서 열린다. 바다의 날 행사가 경주서 개최되긴 이번이 처음이다.바다의 날은 해양자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해양수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국가기념일이다. 그간 경주는 역사문화유적으로 가득한 도시로 알려진 까닭에 내륙 도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하지만 경주는 북쪽의 포항과 남쪽의 울산 사이로 44.51km의 해안선을 따라 드넓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도시다. 부산이나 인천처럼 큰 항구는 아니지만, 2025년 개항 100주년을 맞는 감포항을 비롯해 12곳의 어항이 있고, 또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업인도 상당수다.또한 아름다운 해양경관도 자랑거리다. 천연기념물(제536호)로 지정되고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주상절리군’이 대표적이다.이곳은 과거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던 탓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해안초소가 철수하고 국민 모두가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됐다.특히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도 빼놓을 수 없다.이곳은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신라 30대 ‘문무대왕’이 영면해 있는 곳으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죽어서도 동해의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호국·위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는 2021년 4월 이곳의 행정구역 명칭을 ‘문무대왕면’으로 개명했다.또 이곳에선 문무대왕과 관련한 관광 및 성역화 작업도 한창인데, 그 첫 번째 사업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 중인 ‘문무대왕해양역사관’이다.이 뿐만이 아니다. 경주시는 경북도,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함께 문무대왕릉 인근에 오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비 6500억원을 들여 SMR(소형모듈원자로) 연구·개발을 위한 국책연구소를 조성하고 있다.이 연구소의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딴 ‘문무대왕과학연구소’다.이곳서 연구·개발하게 될 소형모듈원자로는 상용화 후 첫 번째 적용 대상은 선박과 해양플랜트가 유력하다.또 이와 연계한 45만평 규모의 SMR국가산단이 정부 주도로 오는 2030년까지 이곳에 조성된다.‘혁신 해양산업, 도약 해양경제, 함께 뛰는 대한민국’이라는 올해 바다의 날 주제가 딱 들어맞는 대목이다.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은 과거부터 바다에서 많은 것을 얻어왔고, 경주는 신라시대부터 바다를 통해 전 세계와 교류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하지만 여전히 국민 상당수는 해양의 중요성을 체감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 세계 해양산업의 부가가치는 급증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회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경주에서 열릴 제28회 바다의 날을 통해 가깝고도 멀었던 바다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국민 모두가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3-05-29

심은 대로 거둔다

홍석봉 대구지사장 결국, 노조가 제 발등을 찍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다. 민주노총의 일탈에 정부가 메스를 들이댔다. 건설노조의 노숙집회가 계기다.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공공질서를 무너뜨린 행태”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국민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주 건설노조의 노숙집회로 서울 도심의 교통이 마비됐다. 집회현장은 쓰레기장이 됐다. 정부·여당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던 민노총을 손 볼 수 있는 호기가 됐다. 정부·여당은 불법 전력이 있는 단체와 출퇴근 시간대의 집회·시위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민노총 등의 불법 집회 및 시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확성기 소음, 도로 점거 등 국민이 참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문재인 정부 당시 집회 및 시위에 대한 제한과 고삐를 풀어준 탓이 크다. 집회 참가자들이 불법을 저지르고 공권력을 조롱하는데도 경찰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노조는 국민적 공분을 샀다. 법 위에 군림하며 공권력도 마음대로 손 대지 못했다. 경찰은 적극 저지도 않았다. 잘못하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칫 옷을 벗을지도 모른다. 슬슬 뒷걸음질쳤다. 그 게 현재까지의 모습이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경찰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정부의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건설노조의 집회가 노조에게는 부메랑이 됐다. 앞서 검경은 건설 현장의 비노조원 채용 방해, 뒷돈을 노린 업무방해, 갈취 등을 수사했다. 노조 간부 다수가 기소됐다. 정부는 관행이 된 노조의 횡포를 근절, 건설 현장의 정상화를 꾀하려 했다.정부·여당은 이참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개정하고 경찰의 공무집행 시 사고에도 면죄부를 줄 작정이다. 공감대도 이뤄졌다. 불법시위에 속수무책이었던 경찰을 보며 불법시위에 학을 뗀 국민의 질책이 힘이 됐다. 게다가 야간 옥외집회 및 시위 금지가 법률 미비로 사각지대가 돼 있었다. 노숙집회가 무시로 벌어졌다. 대응 방법은 없었다. 2015년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 사건 이후 관련 책임자들이 처벌받았다. 시위대응은 위축됐다. 살수차도 전량 폐기됐다. 마땅한 묘책이 없던 터였다. 건설노조의 노숙집회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노동계는 정부·여당이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훼손하고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며 반발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민노총이 보여준 퇴영적 모습과 불법시위에 지쳤다. 종북 바라기는 국민에 외면당했다. 더는 약자 코스프레가 통하지 않는다.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근로자들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것과 같이 집회 및 시위의 공포와 불편에서 벗어날 자유도 있다. 민노총은 이제 정치와는 절연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근로자의 지위 향상과 권익 도모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폭력 없이 말이다. 노조가 반국가적, 반사회적 단체로 주홍글씨가 새겨져서야 되겠나. 정부와 노조는 법질서를 바로 잡고 올바른 집회·시위 문화를 정착시키길 바란다. 다시는 국민 불편이 없어야 한다.

2023-05-25

연등(燃燈)

우정구 논설위원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의 연등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하는 불교의식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전국에서 행해지는 연등행렬은 연등과 관련한 대표적 불교 행사다. 우리나라는 신라 때부터 연등행사가 있어 그 역사가 1천200년이나 된다. 2020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됐다.불교서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지혜에 비유한다. 불상 앞에서 불을 밝히는 연등을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며 매우 소중히 여기는 문화다. 부처님 오신 날에 법당에 등불을 밝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무명을 밝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의 의식이다.불교 서적 현우경에 나오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은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하나의 등이 부자가 바치는 수많은 등보다 공덕이 크다는 것을 교훈으로 한다. “물질이 많고 적음보다 정성이 소중하다”는 부처님의 사상을 표현한 말이다.내일은 불기 2567년을 맞는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음력으로 4월 8일이다. 우리나라는 1975년부터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불교 종주국인 인도는 물론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도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히 열린다.과일 등을 팔아 평생 재산을 모은 할머니가 학교에 그 재산을 기부하고, 자신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소년소녀 가장의 살림을 돕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다. 꼭 내가 넉넉해야 어려운 이웃을 돌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빈자일등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도 꽤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지혜로 세상의 빛을 밝히는 사람이 있음에 우리 사회는 그래도 훈훈하다.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5-25

논 사잇길

강길수 수필가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뒤처질세라 엄마 치맛자락 따라 바지런히도 오르던 그 옛날, 논대로골의 다랑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다랑논 사잇길은, 두 사람이 비켜 가기도 버거운 길이었다. 그게 어제 같은데, 지금은 타향에서 승용차를 몰고 아스팔트 논 사잇길을 가고 있다. 세월은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텃밭 가는 길이다. 2차로 아스팔트 포장 지방도로다. 농사철이면 농기계들이 오가는 길이기도 하다. 걷는다면 반 시간은 걸릴 거리의 도로 양쪽으론 드넓은 논이 펼쳐진다. 길가에 몸 붙여 사는 식물들을 벗하며 텃밭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로수 없는 도로이지만, 이름 모르는 풀들이 열 지어 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응원단처럼 환호를 보낸다.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다니는 사람도 가끔 있다.철 따라 이곳저곳 야생화들이 피어나고, 이따금 작은 나무들이 함께 살기도 한다. 길가 풀, 나무들은 오가는 이들의 계절 묵시록이다. 길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들이 어우렁더우렁 잘도 살아가는 모습은 늘 희망이다. 삶이란 사람에게나 식물에나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자기 태어난 고향의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고향은 온갖 생명체, 나아가 모든 존재에게 부여된 운명이다.지방도를 벗어나 농로를 얼마큼 가야 우리 텃밭이다. 이곳 길은 오른쪽은 논, 왼쪽은 밭, 미곡건조장, 산 자드락, 논 등이 혼재한다. 요즈음은 도시 근교뿐만 아니라, 시골의 웬만한 농로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왕래가 편리하다. 원화의 환율 상승에도, 한국의 2022년 국민 소득은 3만2천661달러란다. 또 2022년 5월, 유엔 통계국은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하였다.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선진국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선진국이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많다고 본다. 눈에 안 보이는 것들과 보이더라도 국민이 느끼지 못하는 것들 가령, 사회 지도층의 국가공동체에 대한 의식 수준, 소득분배구조, 기초질서 같은 것들이다.우리 지역의 눈에 보이는 결점 중 지적하고픈 하나가 있다. 텃밭에 오갈 때 다니는 논 사잇길의 농번기 모습이다. 논갈이나 모심을 때면, 트랙터 등 농기계의 바퀴에 낀 논흙을 치우지 않고 도로에 나와 이동한다. 그때 제법 많은 논흙이 길바닥에 떨어져 다른 차량의 운행을 방해한다. 나도 흙덩이를 피해 곡예 운전을 하곤 한다. 비와 바람이 흙을 치워버릴 때까지 노면은 지저분하고 흙먼지도 펄펄 날린다.선진국에 이런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회의 구석진 문제들을 찾아내고 개선해야 할 책무는 누가 맡아야 할까. 당연히 공직자다. 그 많은 공무원과 기초, 광역, 국회의원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할까. 선진국이란, 윤택한 가운데 자유와 인권이 있는 사회, 작은 것까지 질서가 바로 선 나라가 아니겠는가. 선출직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우선 해야 할 것은, 사회의 작고 구석지고 어두운 곳들을 찾아 잘 보살피는 일이라 본다. 그럴 때, 농번기 논 사잇길도 흙덩이 없이 깨끗해질 테니까.

2023-05-25

부처님 오신 날 축제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27일은 음력 사월초파일, 불기(佛紀) 2567년 ‘석가탄신일’인데 2018년부터 ‘부처님 오신 날’로 되었다. 1975년에 공휴일로 되었고 올해부터 대체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음력 공휴일인 설날, 추석과 더불어 평달만 휴일이다. 그래서 올해는 27일부터 3일 연휴가 된다.불교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많이 믿는 종교이지만 석가탄신 기념일은 같지 않다. 한국 대만 중국 등은 음력 4월 8일이지만 태국 미얀마 베트남 등 남방 불교국가들은 각각 다른 날로 하고 있다. 일본은 불교 신자가 많지만 양력 4월 8일을 ‘하나마쯔리’라는 축제로 즐기고 북한은 공휴일이 아니란다.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외친 “하늘 위 하늘아래 나보다 존귀한 사람 없다.(天上天下 唯我獨尊)”라는 마음으로 6년간 수행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36세에 부처가 되었고 금강경과 법화경 등 불전으로 번뇌와 헛된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덧없는 인생을 가치 있게 살라는 완벽한 지혜를 주고 있다.초파일에는 많은 축제가 열린다. 연등회, 제등행렬, 관등놀이뿐 아니라 방생이나 탑돌이 등도 있고 민속행사로 확대되었다. 연등(燃燈)은 ‘불꽃을 태운다’는 의미로 석가가 가르친 깨달음, 즉 마음을 밝힌다는 뜻에서 제등행렬, 관등놀이 등 등불을 밝히는 지혜의 축제가 많다. 이 중 연등회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고, 무형문화재 122호인 가장 대표적인 행사인데 4년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올해부터 문화재 관람료가 없어졌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사찰을 찾아가서 오색 연등(蓮燈)을 달며 가족의 행복을 발원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이들 행사는 이미 시작하였는데 경주는 ‘형산강 연등축제’를 지난 3일부터 ‘마음의 평화, 지혜의 등불’이라는 표제로 금장대 부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고, 포항은 지난 13일에 장미꽃 만발한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연등축제를 봉행하여 용 코끼리 공작새의 커다란 등을 끌고 흥겨운 농악대 취타대와 함께 오거리까지 제등행렬을 한 바 있다. 왜 부처님 오신 날의 3일 연휴에 하지 않고 2주일을 당겼을까?부처님 오신 날 27일 앞뒤 3일간 ‘포항 불빛축제’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형산강 체육공원에서 개최할 예정인 국제불꽃축제는 ‘불과 빛의 도시, 포항’을 알리고자 2004년에 첫 불꽃을 터뜨렸는데 이번에도 포스코의 야경을 배경으로 필리핀 이탈리아 스웨덴과 한국이 참여한 국제불꽃 쇼가 부처님 오신 날을 더욱 빛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불꽃 쇼는 27일 밤 9시부터 1시간 동안 찬란한 불꽃을 하늘에 터뜨릴 것이고 마지막 ‘그랜드 피날레’는 한국이 장식한다. 26, 28일 밤에는 시민 디자인 불꽃 쇼가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어둠 속에서 분탕질이나 하고있는 정치계에 진정 밝은 깨달음을 주었으면 좋겠다.부처님 오신 날 탑돌이 행사는 부처님의 큰 뜻과 공덕을 기리는 민속행사로 확대되어왔으니 반듯한 석탑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개인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해 보자. 나무아미타불.

2023-05-25

축제도시, 포항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지역마다 축제가 있다. 하필 코로나19 탓에 몇 년 동안 숨을 죽였던 축제의 기운이 나라 안에 넘실거린다. 적지 않은 재원을 써가며 진행하는 축제는 무엇인가 거두어야 한다. 지역은 축제를 왜 하는가.포항은 4년 만에 포항국제불빛축제를 쏘아 올린다. 2004년에 자그마하게 시작했던 행사가 오늘만큼 성장한 일은 수많은 이들의 정성이 모아진 결과다.슬로건 “Light on 포항, 밤하늘을 비추다’에 맞추어 축제를 펼쳐 올린다. 다른 곳은 몰라도, 포항에는 이 축제에 분명한 까닭을 싣는다. 알려지기로 하룻저녁 불꽃놀이가 초점이라지만, 포항의 축제는 이름부터 다르다. 불과 빛, 도시의 열정을 한데 모아 ‘불꽃’을 터뜨리지만, 포항은 은은하고 꾸준한 희망의 빛이 넘치는 지역이고 싶다. 이 도시에 기대어린 내일이 있음을 밝히고 싶고, 사람을 모으는 정성이 환하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다. 시민들에게 젊은 가슴이 넘침을 확인하고 싶고, 멀리서도 찾아오는 외지인의 발길을 목격하고 싶다. 축제가 모든 이들에게 소망의 불씨를 살려내는 이벤트가 되었으면 하고, 사흘 축제가 지난 뒤에도 긴긴 여운을 남겼으면 한다.시민들이 손수 만드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이미 가지고 있었던 소양과 재능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지역의 스토리가 보란 듯이 무대에 올려져야 한다. 포항문화재단이 주관하지만,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축제를 구현해야 한다. 시민들이 ‘우리들의 축제’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으면 한다. ‘퐝거리퍼레이드’에 사람들의 열정이 보였으면 하고, ‘시민디자인불꽃쇼’에서 시민의 상상과 창의를 목격했으면 한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손길이 모아진 축제에서 지역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고 외지인의 부러움도 한껏 살아나지 않을까. 시민참여형 축제가 포항에서 불빛처럼 타오르길 기대한다.포항시는 축제를 도시브랜딩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지역에는 포항국제불빛축제 외에도 다양하고 풍성한 축제 프로그램이 있다. 예산을 소비하고 빈축만 사는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축제마다 독특하고 분명한 지향성을 확인하고 지역의 열정과 기대가 한데 어우러지는 마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포항에서만 발견하는 지역정체성을 확인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바다와 철강의 이미지를 살려야 하고 도시와 자연이 함께 호흡하는 분위기를 드러내야 하며 유구한 전통이 숨쉬고 싱싱한 내일이 꿈틀거림을 확인해야 한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행복한 도시가 되어야 하고 기꺼이 서로 도우며 함께 발전하는 지역임을 보여주어야 한다.‘축제도시 포항’에서 기대와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도시가 살아있음을 세상에 알려야 하고, 상생과 협력의 기운이 이 도시에 충만함을 자랑해야 한다. 메인이벤트인 불꽃의 향연에는 도시의 열정이 한껏 발산되어야 하고 지역의 탄성이 마음껏 터져나와야 한다. 축제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내는 시간이어야 하고 외지인의 관심이 지역으로 모여드는 계기여야 한다. 오래간만에 축제의 열기에 흠뻑 취하고 싶다!

2023-05-24

이슬람과 돼지고기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 북구 대현동 경북대 인근의 이슬람 사원 건립 갈등이 3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 혐오와 차별 정서도 함께 확산되고 있다.사원 건립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이 삶은 돼지머리를 전시하고 돼지고기를 나눠 먹는 등 인종차별과 인권 침해가 벌어졌다. 이슬람 사원 반대를 위한 ‘돼지머리 시위’는 이제 외신에 까지 등장,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경북대 학생들은 이슬람 혐오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인권위까지 나서 ‘이슬람 문화 비하와 적대감을 부추기는 행위’이자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소수자에 대한 전형적인 혐오표현’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무슬림은 이 계율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팎에서 철저히 지킨다. 돼지 사육조차 않는다.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이렇게 금지할까? 코란에는 돼지고기 금기가 명시돼 있다. 코란의 명령이다. 그 이유 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바로 중동지역의 환경설이다. 고대 중동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중요한 동물이 소, 양, 염소 세 동물이었다. 이 동물들은 풀, 짚, 나뭇잎 등 거친 섬유질 먹이를 먹는 반추동물이다. 인간이 먹지 않는 풀 등을 먹고 고기와 젖을 제공한다.반면 돼지는 잡식동물로서 되새김질을 하지않아 풀이나 짚 등 섬유소가 많은 식물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대신 섬유소가 적은 밀, 옥수수, 감자, 콩 등을 먹는다. 인간과 먹을 것을 두고 경쟁관계가 됐다. 또한 돼지는 건조한 중동 지역에 적합지 않다. 사육에는 시원한 그늘과 물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금기 동물이 됐다고 한다.자고로 음식 갖고 장난치는 법은 아니라고 했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5-24

신축일주

육십갑자 중 서른여덟 번째는 신축(辛丑)이다. 천간(天干)의 신금(辛金)은 잘 다듬어진 칼같이 날카롭고, 보석처럼 아름답다. 지지(地支)의 축토(丑土)는 계절로는 겨울이라 땅이 얼고 차갑다. 동물로는 흰 소다.신축일주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형상처럼 지혜롭고 머리가 뛰어나다. 기획력과 창의력은 탁월하다.눈치가 빠르며, 밤하늘의 별처럼 신비스러운 것이나 이상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 영감이나 꿈으로 미래를 잘 예측하기도 한다.천간과 지지가 음의 기운으로 냉철하며,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세밀하여 일처리가 빈틈없이 깔끔하다. 유행에 민감하고, 세련미가 넘치며, 타인을 사로잡는 능력도 탁월하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 시야가 좁고 외골수이기 때문에 편협함이 있다. 매섭기가 그지없으니 내면에 공격성이 숨어 있어 자기 눈에 벗어나면 독설도 서슴지 않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신축일주 남자는 재주와 재치가 있다. 맡은 일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다. 신의도 잘 지킨다. 배우자를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고, 고생시킬 수도 있다. 여자는 단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미인형의 얼굴이 많다. 또한 총명하며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자부심도 강해서 아량이 부족하게 보이기도 한다.중국 전한시대 유향이 지은 ‘전국책’ 진책2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 언덕에 있는 어떤 마을에 처녀들 몇이 있었다.그 가운데 한 처녀의 집이 매우 가난해 밤이 되어도 등불을 켜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밤이 되면 가난한 처녀는 여러 처녀들이 모여 노는 집으로 찾아가서 바느질을 하곤 하였다. 어느 날 여러 처녀들은 가난한 처녀를 더 이상 오지 말라며 쫓아냈다.그러자 처녀는 여러 처녀들을 보고 “나는 우리 집에 등불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 불빛을 빌려 써야 했지만, 그게 늘 고맙고 미안해서 언제나 제일 먼저 와서 방도 치우고 자리도 펴 놓았지. 그런데 너희들은 이 사방 벽에 비추어 남아도는 등불 빛 한 가닥이 아까워 나를 쫓아내는구나. 남는 불빛을 나에게 준다고 해서 너희에게 무슨 해가 되냐? 나는 스스로 너희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라고 말했다.여러 처녀들이 수군수군 의논하더니 가난한 처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오라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순화되어야 할 감정이 많이 숨어있다. 남의 어려움이나 불행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심을 느끼는 마음이다.신축일주는 하늘은 매섭고 찬바람이 휘날리는 신금(辛金)이지만, 땅은 소(축, 丑)다. 남들 보기에는 힘든 일도 소나 닭 쳐다보듯이 무심하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는 기운이다. 부지런하지만 결코 스마트하지 않는, 좀 늦고 떨떨한 신축! 재주도 메주도 별로 잘하는 것이 없는 신축! 거기다가 생각하는 것도 진취적이지 못하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우공이산(愚公移山)이고, 옆에서 보면 속이 답답한 경우이다.하늘이 살벌한 신(辛)의 기운으로 매서운 칼날을 들고 있지만, 땅인 소는 알고 있다. 그것이 보석을 나누어주기 위한 하늘의 이치라는 것을. 참으로 소의 커다란 눈망울 같이 순하고 순수하며 따뜻한 눈으로 보아주고 있다. 대체적으로 판단력이 좋고, 신속한 행동을 한다. 약간은 즉흥적이지만, 로맨틱하지는 않다. 남녀 모두가 소위 분위기 파악이 잘 되지 않는 성향이 있어 흠이 될 수 있다.소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고독하거나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빠지면 깊이 들어가는 기운이 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습관이 많다.신축일주는 물상으로 언 땅 위에 박힌 보석처럼 침착하고 매사에 신중하기에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해도 쉽게 화를 내지 않는다. 겨울의 차가운 환경에서도 봄을 맞이하여 뜻을 펼치기 위한 노력이 남다르다. 늘 불안하고 걱정하는 성격이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산다.재물과는 인연이 깊지 못하여 타고난 재능으로 인내하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 허나 시기 질투가 강하여 남과 비교하는 내향적인 성질이지만, 직감과 영감이 뛰어나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많아 종교생활에 적합하다.신축일주에는 효신살(梟神殺)이 있다. 올빼미 효(梟)와 귀신 신(神)을 써서 올빼미 신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동방불인지조(東方不仁之鳥)라 하여 새끼가 성장한 이후 어미 새를 쪼아 먹는 폐륜적인 새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다시 말해 남자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고, 여자는 시어머니와 갈등을 야기하기에 좋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지나친 애정과 간섭으로 생긴 문제다. 자신의 잘못된 점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단점만 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유향이 지은 ‘설원’ 담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비둘기가 올빼미를 보고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올빼미는 “나는 동쪽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다.비둘기가 왜 이사를 가려 하는지 물었다. 올빼미는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울음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비둘기는 올빼미에게 너의 울음소리를 고칠 수 있다면 이사를 가도 되겠지만, 울음소리를 고칠 수 없다면 동쪽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거기 사람들은 여전히 너의 울음소리를 싫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효장동사(梟將東徙)라는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올빼미는 자신의 허물을 고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탓하면서 단지 사는 곳을 옮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필연적인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애착, 대립, 관계, 이별, 상실, 성가신 뒤처리 등 사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다.물론 이런 문제에서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전력을 다해 마무리해야 한다. 그러면 그 모든 일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손대기 전에는 힘들었던 일이 생각보다는 가벼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은 회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3-05-24

더 이상 문은 녹슬지 않는다

정미영 수필가 세상으로 향한 모든 인생길의 시작과 끝은 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자궁문을 열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한평생 온갖 종류의 문을 여닫기 반복하다가 마침내 삶의 종착지에는 장례식장에서 생의 문을 닫는다.인생 시계의 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무수한 문을 생각해 본다. 자동문처럼 쉽게 열린 적도 있었고, 굳게 닫힌 문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겨우 열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건너왔던 문들은 모두 나의 내력을 지녔다. 가끔은 추억의 빗장을 열고 그 문들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차마 잊지 못하고 머뭇대며 찾아가기를 별렀던 문을 보러 길을 나선다.학창 시절에 살았던 집 앞에 선다. 문간을 넘나드는 이들의 들숨과 날숨이 대문에 스며든 것만 같아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본다.내 눈길 끝에 예전의 문소리가 끼익 달려 나온다. 그 당시 우리 식구가 대문을 열고 닫을 때는 유달리 삐걱대는 소리가 잦았다.친정아버지의 평온을 유지하지 못했던 마음이 대문에 옮겨져 그 아픔의 무게에 짓눌렸던 연유 때문인지 돌쩌귀가 빠져 슬픈 울음소리를 냈다.사람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크든 작든 보증서는 일을 도맡았다. 어느 해,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어릴 적 친구를 위해 또 보증을 섰다. 신발 가게를 몇 군데나 크게 하던 소꿉친구였다. 일이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잘못됐다. 그는 끝내 부도를 내고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이 사실을 들은 어머니가 수소문해서 신발 가게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단다.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그 즈음 힘들게 겨우 장만했던 집을 내놓을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했다. 자식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집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동안, 아버지의 직장 동료들은 우리 집 형편을 마음 아파했다. 그들의 배려 덕분에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가 빛바랜 문 앞에서 선뜻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적이 많았던 때문이었을까.아버지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한다고 문고리를 붙잡고 미안해할수록 철문은 무시로 아버지의 울분을 받아들였나 보다. 문은 군데군데 녹이 슬고 주저앉을 것처럼 점차 위태롭게 보였다. 낡을 대로 낡은 문은 바람만 불어도 쩔걱거리며 사위스러운 소리를 냈다. 삭막한 아버지의 흐느낌과 문의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 내 불안은 커져만 갔다. 내 가슴에도 붉은 녹과 쇳소리가 선명하게 새겨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그런데 걱정의 종말이 보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파란 페인트를 사가지고 왔다. 비지땀을 흘리며 문고리와 문설주의 돌쩌귀까지 세심하게 덧칠했다. 아버지가 문을 페인트로 단장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무성한 마른 풀로 버석거렸을 아버지의 가슴에 새롭게 푸른 물이 돌았을 것이다. 생기가 돋아나는가 싶더니, 활기가 넘치는 날도 점차 늘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사람에게서 받은 상심과 삶의 고단함을 페인트칠하면서 부려놓으려 애썼던 것 같다.사람과 마찬가지로 문도 상처를 방치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데 힘썼듯이 내세울 것 없던 허름한 문도 녹슨 곳을 사포로 정성껏 문질러 매끈하게 만들자, 공간의 소중한 일부로 재탄생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때의 경험을 발맘발맘 따라왔더니, 가끔 생활에 드리워진 어둠이 걷어지고 환한 희망의 등불 하나 소담스럽게 문에 내걸 수 있었다.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비워줘야 했다. 아버지는 공무수행을 떠난 길 위에서 돌아가셨다. 가량없이 날선 세상에서 가족들을 지키려고 했던 아버지는 나에게 문(門)이었다.대문을 쓰다듬어 본다. 삶이 버거울 때 비바람 막아 주고 등을 기댈 수 있었던 문(門)과의 추억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제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 푸른 문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가 그리워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형상은 오롯이 기억될 것이다. 더 이상 문은 녹슬지 않는다.

2023-05-24

소통의 방식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다수의 국어국문학과에는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작품 속 배경이나 작가를 기념하는 문학관을 찾는 행사가 있다. 필자도 학부 시절 순천과 광주 일대를 답사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답사 프로그램은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문학 현장을 찾는 것에 대한 무용론이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주 학부생 40여 명과 목포로 2박 3일 문학답사를 다녀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중단된 문학답사가 부활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신청마감 3일 전까지 신청자가 10명을 넘지 않아서 취소하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졸업요건’을 강조하며 학생들을 독려한 끝에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애초에 대다수 학생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첫째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식사를 일찍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절반 이상이 빈자리가 되었다. 둘째 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식사를 마치면 같은 테이블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뿐만이 아니라, 둘째 날부터 일정이 빡빡하다는 말이 들려온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학생회장을 통해 들은 말은 이랬다. 우선 날씨가 문제였다. 2박 3일 일정의 첫날은 무더위로, 둘째 날은 비로 인해서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고 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쉽게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와 한 조를 이루어 이동하고 방을 함께 써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낯선 존재와 2박 3일 동안 가깝게 지내는 것이 불편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어색함을 참으며 타인을 알아갔다면, 지금 학생들은 스마트 폰에 의지해 그 시간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둘째 날, 우리 조 학생들과 이동 중에 소나기를 만나서 카페로 이동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우리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러자 학생들은 당연한 듯 각자의 스마트 폰을 꺼내서 무엇인가를 했다. 몇 분의 침묵이 흘렀을까.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순간 학생들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공기만은 또렷하게 떠오른다.현재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스마트 폰에 익숙한 세대로 낯선 사람과 만나서 자신을 드러내며 대화하는 방식이 서툰 것이 사실이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겪으며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니 어색함과 불편함에 성급하게 말을 하거나 혼내기보다는 잠시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 날 학교에 도착하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우리 조 학생들을 보니, 내가 2박 3일 동안 너무 조급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속도는 조금 늦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번 답사는 나에게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2023-05-24

자동차 사고와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살면서 크든 작든 보통 한번쯤은 겪는게 교통사고다. 뒤에서 차가 와서 부딪히거나 차선변경 중 혹은 교차로에서 차끼리 부딪힐 때가 있고 횡단보도나 일반 길에서 차가 사람을 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크게 다치진 않으나 심하게 다친 사람은 뼈가 부러지거나 뇌출혈 등의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자동차 사고가 나면 요즘은 대부분 한의원에 내원해서 치료를 한다. 상태에 따라 침과 부항으로 어혈을 제거하고 근육을 풀어 줄 뿐만 아니라 약침과 추나 거기다가 어혈을 제거하고 면역을 높일 수 있는 한약까지 21일분 처방이 가능해서 한방 치료를 받으면 교통사고의 통증과 후유증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을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다.대부분 환자는 사고시 충격으로 몸이 순간 앞으로 쏠렸다 뒤로 휙 제껴지면서 경추와 흉추 등이 과도하게 신전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목과 어깨 쪽의 척추 근육 인대 등이 손상되고 심한 경우 허리 척추의 인대도 손상된다. 이를 채찍질 손상 혹은 편타 손상이라고 하는데 보통 목이 뻐근하고 아프고 심하면 목을 돌리지 못한다. 또 어깨가 뭉치고 심한 경우는 날개뼈에 담이 결린 것처럼 몸을 돌리기가 힘들어진다. 일반적인 담과는 다르게 교통사고로 인한 목과 어깨 통증은 가만히 놔두면 낫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목과 어깨가 굳어가면서 더 심해진다. 허리도 우리하게 아프고 심한 경우 골반쪽으로 날카로운 통증이 생길 수 있다. 목이 너무 심하게 충격 받은 경우엔 두통과 어지럼 구토증도 일시적으로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 목을 풀어주고 치료한약을 같이 복용하다 보면 1~2주 내에 두통 어지럼 구토증은 사라지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교통사고로 인한 통증은 잘 낫지 않아 사고가 나면 바로 한의원에 내원하는 것이 좋다. 치료기간은 심하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는 2~4주 정도 꾸준히 치료하면 좋아지고 심한 경우는 3달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치료는 우선 부항으로 사혈을 해서 어혈을 빼주고 침으로 뭉친 근육과 인대 회복을 돕는다. 그리고 약침과 추나 등의 추가 치료로 더욱 확실하게 근육을 풀어주고 한약처방으로 면역력 강화와 근육을 강화 시켜 치료의 마무리를 한다. 환자가 꾸준히 2~4주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대부분은 90% 이상 회복이 된다. 물론 일부 골절 환자 같은 경우엔 뼈가 붙고 나서도 많은 시간을 투자 해야 한다.남자들이 보통 근육이 많고 튼튼해 아픈 것도 덜하고 회복도 빠르다. 몸이 약한 여성의 경우엔 별로 심하게 사고가 나지 않았어도 상당히 심한 통증과 심적 고통을 호소한다. 실제로 교통사고가 나면 한동안 잠도 못자고 밥맛도 없으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운전대를 다시 잡기가 너무 겁난다는 사람도 많다. 이런 경우라도 한약 처방이 무료로 가능하니 한달 내로 대부분의 증상은 좋아진다. 교통사고로 통증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근처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후유증을 예방해 건강한 생활을 빨리 되찾자.

2023-05-24

공공기관 억대 연봉을 보는 눈

우정구 논설위원 연봉 1억원대는 샐러리맨들의 꿈이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기업의 수익이 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직원 평균연봉이 1억원을 넘는 직장이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최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을 통해 공공기관의 기관장 연봉이 밝혀지면서 고액 연봉을 둘러싼 뒷얘기가 무성하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공기관의 기관장 중 29명은 지난해 대통령(2억4천64만원)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소기업은행과 한국투자공사 기관장의 연봉은 4억원을 훌쩍 넘었다. 국립암센터, 한국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등 연봉 3억원이 넘는 곳도 많았다.또 연봉을 공시한 공공기관 340곳 중 300곳의 상임기관장 연봉이 공공기관을 관리 감독하는 정부부처의 장관 연봉보다도 많았다.연봉은 그 기관의 운영실적과 기관장의 능력 등을 종합해 지급하지만 억대가 넘는 연봉은 서민층에게는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특히 공공기관은 기업특성상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측면도 많아 지나친 연봉은 국민의 눈총도 받는다.많은 국민이 고금리로 허리가 휠 때 금리 인상의 수혜자인 은행들이 대규모 성과급 잔치를 벌여 여론의 비난이 된 것도 국민 정서에 반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적자를 낸 한전이 설립한 한전공대의 교수가 전국 4년제 대학 정교수 평균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연봉으로 치면 1억5천만원에 상당하는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도 세비 만큼 일을 해야 국민의 눈총을 받지 않게 된다.억대 연봉을 받는 공공기관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국가발전과 지역사회 기여에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5-23

글로컬대학이 ‘지방대학의 생존모델’

심충택 논설위원 대학간, 전공·학과 간 경계를 허무는 ‘글로컬 대학’이 곧 탄생한다. 현재 대구·경북을 비롯해 비수도권 대학은 글로컬 대학 신청마감(31일)을 1주일 앞두고 응모준비에 한창 바쁘다.‘글로컬 대학’은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을 합친 용어다. 말 그대로 로컬대학을 국제적인 일류대학으로 육성해보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정책이다.교육부와 글로컬대학위원회는 다음달 중 15곳 안팎의 예비 지정 대학을 발표한다. 그 후 세부적인 심사를 다시 거쳐 오는 9월까지 10곳을 글로컬 대학으로 최종 선정한다. 선정되는 대학은 앞으로 5년간 1천억씩 지원받는다. 돈 가뭄에 시달리는 지방대학으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다. 정부는 오는 2026년까지 모두 30곳의 글로컬 대학을 선정한다. 지방대가 글로컬 대학이 되면 국립대 교수들에게도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줄 수 있고 대기업 인력을 겸임교수로도 활용할 수 있다.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경산에 있는 경일대-대구가톨릭대-대구대가 공동응모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재단인 영남대와 영남이공대, 계명대와 계명문화대, 그리고 안동대(국립)와 경북도립대도 응모를 논의중이다. 국립대인 안동대와 금오공대의 통합논의는 무산됐다. 경북대와 대구교대의 통합에 대한 관심은 컸지만, 학교구성원들의 반대로 논의가 중단됐다. 반면 부산대와 부산교대는 통합에 합의해 글로컬대학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커졌다.교육부가 글로컬 대학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이유는 지방대학을 국제적인 대학 흐름에 합류시켜 생존력을 높여보자는 취지다. 정부가 글로컬대학 선정과 관련해 제시한 주요 가이드라인도 응모대학들이 국제적인 추세에 맞춰 지역·산업 간, 그리고 학문 간 경계를 허물어서 새로운 차원의 대학모습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다.응모대학들이 일단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다양한 방법의 통합을 통해 규모를 키워야 한다. 그래야 여러 영역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고, 학생들의 연구분야와 역량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 다양한 학문 간 협업도 가능해진다. 지금도 국내외 일류대학들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한 전공에 갇히지 않고 여러 분야를 탐색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있다.글로컬 대학 출범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방대가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긍정론이 있는가 하면, 일부 지방대만 살리고 나머지 대학들은 고사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가든 개인이든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과거와는 다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IT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대학의 교육 방법과 내용을 당연히 새롭게 짜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현재 모든 지방대학이 체감하고 있겠지만, 머뭇거리다간 바로 도태된다. 학생 개개인도 하루하루 자기혁신을 하면서 대학생활을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글로컬 대학 정책이 취지대로 이행되면, 현재 심각한 소멸위기를 겪는 많은 지방대학의 생존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3-05-23

MBTI 덜어내기

관계란 참 어렵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일을 하다 그 사람과의 마찰이 생길 때, 또는 타인을 처음 마주할 때 어떤 MBTI 유형일지 궁금해진다.MBTI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미국 심리학자 캐서린 브릭스가 그의 딸인 이사벨 마이어스을 가르치던 중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성격유형 이론을 근거로 만든 심리검사이다.캐서린 브릭스가 구분한 성격유형은 ‘에너지 방향’, ‘인식 기능’, ‘판단 기능’, ‘생활 양식’의 네 가지 경향으로 구성되며, 4쌍(8가지)의 지표 중 검사 결과를 조합하면 총 16종류의 성격 유형이 나온다.인터넷에 MBTI를 검색해보면 ‘MBTI별 00일 때 반응 모음’, ‘MBTI 별 성격 차이’ 알아보기, ‘유형별 궁합’, ‘유형별 완벽주의 순위’ 등의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만회, 141만 회 등 높은 조회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어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MBTI 관련 콘텐츠는 늘 끊이지 않는 밈을 생산해내며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슈를 통해 무분별히 정보를 수집하여 수용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크다. ‘판단 기능의 F’는 무조건 공감을 잘 할 것이고, ‘생활 양식의 J’는 무조건 계획을 잘할 것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또는 나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특정 엠비티아이를 선호하거나, 또는 상극이라는 이유로 나와 맞지 않다고 속단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MBTI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개별의 지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해버린 것이다.한 구인사이트에는 ‘열정적이며 혁신적’인 ENFP를 구한다는 마케터 모집 공고가 올라오기도 했고, 일부 기업은 특정 MBTI 성격 유형은 지원하지 말라거나, 혹은 특정 유형을 선호한다는 모집 공고를 올려 논란이 된 바 있다. 개인의 능력과 잠재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단순 MBTI의 검사 결과지를 통해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여 특정 MBTI를 우대한다거나, 선호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차별과 오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실은 나 또한 MBTI 과몰입러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처음 만날 때 MBTI를 물어보게 됐다.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에 대해 파악했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타인을 알아가려는 여러 시도와 노력, 대화가 아닌 MBTI에 맞춰 간편하게 그들을 알아가는 쉬운 속단의 방식을 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MBTI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여길 때 오히려 타인에 대한 무시와 배제를 쉽게 선택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며, 나도 모르게 특정 MBTI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며 계속해서 비좁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단순 콘텐츠로 즐기며 유머러스하게 소비하는 것은 좋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을 함부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함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타인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모든 인간관계가 조금 더 간편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건 실은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타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늘 긴장감이 맴돈다. 하지만 그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든 행위는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만든다. 여러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며 탐구하려는 노력은 결국 더 다양한 세계를 포용할 수 있게 한다.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관계를 일찍 끊어버리고 단정지어 버린 몇몇 타인들이 있다.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흥미로운 관계를 놓쳐버린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편견, 그리고 너무 MBTI의 틀에 맞추어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나를 알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때문에 MBTI를 통해 획일화된 나의 모습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나를 오해하기 쉽고 넘겨짚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면서 다양한 내면을 가졌으므로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어렵고 복잡한 일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MBTI에 몰입하여 구분지어 버리는 과장을 덜어내야 한다.

2023-05-23

록키와 김남국의 실존주의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 록키는 3회전짜리 삼류 복서다. 좋은 선수가 될 재능이 있음에도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인생을 낭비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무패의 세계 챔피언 아폴로와 타이틀 매치를 갖게 된 것이다. 예정된 상대 선수가 부상을 입어 이탈했는데, 누구도 선뜻 대체자로 나서지 못하던 와중에 록키에게 기회가 왔다. 무명 선수도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에 광대 역할로 부려진 록키가 과연 1라운드라도 버틸 수 있을까.서른 살이 되도록 삶의 동기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진지해본 적 없는 록키는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적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한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눈물겨운 훈련을 다 마치고 마침내 시합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밤거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와선 애인인 애드리안에게 토로한다.“랭킹에도 들지 못하는 내가 뭘 하겠어. 열심히 훈련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가 내 머리를 부숴버려도 상관없어. 15라운드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누구도 그와는 끝까지 못했지.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냈다는 걸 알게 될 거야”록키는 챔피언 아폴로와 명승부를 펼친다.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난다. 15라운드가 끝나는 순간, 록키는 두 발로 선 채 마지막 종소리를 듣는다. 아나운서가 록키를 인터뷰한다. 질문이 이어지는데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만 부르짖는다. “애드리안! 애드리안!” 울부짖는 그를 향해 애드리안이 멀리서 달려온다. 아폴로가 근소한 판정승을 거뒀다는 결과가 발표되지만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링 위로 올라온 애드리안이 “I love you!” 외치며 록키를 끌어안는다. 영화는 챔피언벨트, 돈, 대중의 관심, 명예 따위 세상이 쳐주는 가치들 대신 15라운드를 버텨낸 무명 복서의 개인적 승리를,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생의 목적과 가치를 증명한 사내의 뜨거운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는 연인의 환한 미소를 비추면서 페이드아웃된다.니체는 죽음이라는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아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허망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거기에 자기존재를 다 던져 몰두하는 사람을 ‘초인’ 혹은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록키’는 실존주의적 영화고, 록키는 초인이며 영웅이다. 질 것이 뻔한 시합에서 자기 승리를 발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애드리안과 끌어안을 때, 록키는 관중들의 환호성이나 카메라들이 터뜨리는 플래시 등 경기장의 온갖 소란과는 완전히 독립된 그만의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린다. 자기 삶의 동기를 이데올로기나 신앙 등으로부터 명령받아 타자가 요구하는 가치의 도구로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개척하면서 그 과정에 자신을 있는 힘껏 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록키는 승리, 명예, 돈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무소속 김남국 의원의 자유가 궁금하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중에도 코인 거래에 열중한 것을 보면 자기가 정한 가치에 몰두하는 실존주의자가 맞는데, 가난을 장신구로 걸치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온 걸 생각하면 모순적이다. 그냥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은 돈”이라고 떳떳하게 밝혔다면 그도 편했을 것이다. 돈 말고도 권력이니 명예니 바라는 게 많으니까 두려울 것도 많고, 두려운 게 많으니까 자유롭지 못하다. 당적을 벗었지만 여전히 매여 있는 사람 같다. 무소속인데 오히려 더 강하게 소속된 느낌이다.‘정치적 실존’ 말고 진짜 실존을 위해 의원직까지 다 벗어던지는 게 어떨까. 그리고 코인 거래를 하면 된다. 그래야 돈이 실존인 삶에 다른 눈치 안보는 자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2023-05-23

촉각으로 감상하는 포스아트 옛 그림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코로나의 터널을 벗어나선지 최근들어 축제나 공연, 전시 등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화창해진 날씨에 싱그러운 신록의 물결 따라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볍고 표정도 밝아 보인다. 인근의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는 발길도 많아져서 그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참고 미뤄왔었던 전시회나 문화강좌, 학습모임 등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부담 없이 누리고 즐기는 모습들이 넉넉하기만 하다.요즘은 굳이 미술관을 찾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이나 편의, 위락시설 등지에 설치된 조형물이나 조각상 등의 예술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예컨대 길거리 간판이나 가로등, 공원 벤치, 운동시설, 시설 구조물 등에 예술성을 가미해 이색적인 새로움을 주거나 낯선 반가움을 느끼게 하는 이른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미술이나 예술작품은 이렇듯 일상에서의 향유와 실생활에 접목될 수 있을 때 보다 능동적이며 그 의의와 가치가 커지지 않을까 싶다.대부분의 예술작품이나 미술품 등은 원작의 보존성을 위해 취급이나 감상에 엄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작품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손으로 만지거나 접촉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기에 ‘눈으로만’ 감상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갤러리 내의 전시품을 실외의 공공미술품 마냥 직접 만져보며 촉감이나 질감을 느껴볼 수 있다면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의 폭과 깊이가 한결 커질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벽 없는 전시개념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프로그램은 손끝으로 미술작품을 보고 상상하며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시각장애인도 얼마든지 촉감으로 작품을 인지,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사려깊은 ‘촉각전시’인 셈이다.최근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배리어 프리 전시회’가 포스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어서 일반인은 물론 특히, 시각예술에서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포스코의 고해상도 프린팅 원천기술인 ‘포스아트 기술’을 활용해 친환경 철강재 위에 ‘풍속도’‘세한도’ 등 조선시대의 명화를 적층인쇄기법으로 재현한 작품 83점을 6월 중순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와 연계해 지난 주에는 ‘포스아트’의 기술로 평면이지만 입체적으로 구현된 옛 그림의 원본 이미지를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의 ‘옛 그림을 보는 눈’ 주제의 초청특강이 성황리에 열렸고, 생소한 전시회 관람을 희망하는 도내 22개 지역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전문 도슨트의 그림 설명과 함께 손길을 통한 관람의 편의와 안전하고 유익한 작품감상이 되도록 세심히 배려, 지원하고 있다. 기업시민 포스코의 두드러진 기업메세나 활동이 아닐 수 없다.아직은 전시분야에서 배리어 프리의 장벽이 높다 하지만, 작은 생각과 배려들이 일상 속에서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면, 예술작품을 누구나 모두가 똑같이 감상하고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역할과 혜안이 아닐까?

2023-05-23

인공지능, 나의 해방일지

전재영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일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예제 코드와 데이터를 사용해서 인공지능을 직접 만들어본 사람들조차도, 꽤 괜찮은 인공지능 서비스가 만들어지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적, 재정적, 환경적 비용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거나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코딩대회에서 사람과 경쟁하며 문제를 푸는 AI를 만들어낸 딥마인드의 한 관계자에게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수백 대의 기계를 사용해 AI 모델을 단 한 번 훈련시키는 데만도 꼬박 2주가 필요하다고 답해주었다. ChatGPT 운영비용은 한 달에 최소 300만 달러가 필요하며, 초기 버전에 탑재 되었던 GPT-3 모델을 훈련시킬 때 약 502톤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이는 뉴욕발 샌프란시스코행 항공기 한 대가 방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의 500배에 달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그런데 이런 비용 말고 더 중요한 다른 비용이 있다. 바로 인간비용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건널목 신호등을 가리키며 빨간불일 때는 멈춰야하고 파란불일 때는 건너도 된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기계에게도 인간이 일일이 각 상황에 맞는 정답을 알려주며 학습시키는 것을 지도 학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각의 주어진 상황에 정답을 부여하는 작업을 보통 레이블링이라고 한다. 오늘날 기계가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고, 120개에 달하는 강아지의 품종을 하나하나 사람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이유는 막대한 양의 레이블 작업을 수행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선정적이고 부적합한 콘텐츠를 걸러내기 위해서도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물론 ChatGPT도 예외는 아니다.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 위치한 한 기업과 계약을 맺었고, 수백 명의 케냐 사람들은 9시간 교대 근무 형태로 레이블링 작업을 수행했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다. 시간당 2달러가 채 되지 않는 임금은 사실 나중 문제다. 레이블링 작업이라는 이름하에, 여러 형태의 폭력, 강간, 사형, 아동학대 등의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 이들이 정신 이상 증상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착취공장이었고, 인공지능을 등에 업고 가는 현대판 노예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에 열광하고 있다.사실 이러한 레이블링 작업은 고등의 전문교육의 기회를 접하지 못한 최빈국 사람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X-ray 사진을 보고 폐렴인지 정상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AI, 눈 사진을 통해 백내장을 판별하는 AI도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레이블링이 필요하다.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였던 에릭 프롬은 말했다: “과거의 문제는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래의 문제는 사람들이 로봇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는 로봇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사실 우리는 여전히 이런 저런 형태의 노예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여전히 해방일지를 쓰고 있는 중이다.

2023-05-23

춘풍추상 vs 내로남불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인들은 흔히 ‘춘풍추상(春風秋霜·타인에게는 부드럽게, 나에게는 엄격하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행태를 보인다. ‘춘풍추상’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가 어렵고, ‘내로남불’은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반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민주당의 경우 문재인정부가 약속했던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는 내로남불이었다. 조국 전 장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문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선물한 ‘춘풍추상 액자’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지금도 대장동사건을 비롯한 각종 의혹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대표, 돈 봉투 선거로 수사 중에 있는 송영길 전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 청년들을 기만한 김남국 의원의 ‘코인의혹사건’ 등 그 어디에서도 춘풍추상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국민의힘 역시 마찬가지다. 내로남불을 타파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공정과 상식’도 선택적이었다. 아·가·패(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패밀리)정부이자 검찰공화국이라는 비판은 ‘인적 편향성’을 말해준다. 편향성은 공정성을 해치는 주범이다. 당대표를 제거하기 위해서 ‘체리따봉’ 문자를 보냈고, 당대표 선거에 개입하여 당내민주주의를 훼손했다. ‘민심’과 ‘당심’ 위에 군림한 ‘윤심’은 결코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이처럼 여야의 정치행태는 모두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상대에게는 혹독하다. 의회권력을 가진 민주당은 입법독주를 하고, 집행권력을 가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 책임은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니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이(利)가 아니라 의(義)’를 위해 행사되어야함을 망각한 까닭이다.여야는 이분법적 흑백론을 버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은 ‘흑백론이 아니라 회색론’이다.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중간적 존재’인데 서로가 ‘나는 천사고 당신은 악마’라고 우긴다. “나만 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내로남불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그 누구도 내로남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중종이 도덕정치를 역설한 조광조에게 내린 죄목은 “뜻이 맞는 자들하고만 어울리고 맞지 않으면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군자’, 반대파는 ‘소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언행이 일치되지 않았으니 위선자로 본 것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이중기준이 허용되는 것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춘풍추상이다. 남에게 관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한다.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政敵) 아이아스(Aias)의 명예를 회복해줌으로써 양분위기에 있던 그리스 군을 통합할 수 있었고, 엄격한 자기절제로 바다요정 칼립소(Calypso)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춘풍추상의 리더’를 만날 수 있을까?

2023-05-22

국가보안법이 문제라고?

홍석봉 대구지사장 표현의 자유와 국가 안전이라는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 지난 19일 ‘야학 선동·국보법 위반 유죄’ 판결을 받은 대구의 60대가 40여 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법원은 “불법 구금상태서 신문조서 작성, 압수물 불법수집해 증거능력 없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복역한 작곡가 윤이상의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 사건 발생 56년 만에 재심 결정을 내렸다.반면 검찰은 최근 북에 ‘충성맹세’를 한 민노총 전 간부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피고인들이 노동단체를 외피 삼아 북한 지령에 따른 정치투쟁 등에 집중하도록 주도한 것”이라고 밝혔다.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키 위한 목적으로 1948년 제정됐다. 하지만 2023년 5월 현재 9건의 헌법소원과 3건의 위헌법률심판청구건이 올라오는 등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라는 ‘폐지론’과 국가 안전을 위한 안전판이라는‘유지론’이 팽팽하다. 국보법수호연대는 얼마 전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보법 폐지는 공산혁명투쟁에 고속도로 깔아 주는 격”이라며 폐지 반대론을 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이 위헌이면 자유 대한민국도, 헌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폐지론자들은 철 지난 색깔론과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간첩몰이 공안탄압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6명이 ‘국가정보원의 간첩 수사권’ 및 ‘국가보안법’ 유지에 찬성했다. 공산 혁명에 동조하는 일부 민노총의 행태까지 한 묶음으로 봐 줄 수는 없지 않나./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5-22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마블의 대표적 프랜차이즈 영화다. 지금까지 총 세 편이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기발하면서도 삐딱한 상상력으로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해체해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은 사명감에 불타는 전형적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우주의 부랑자에 가까운 그들은 각각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지녔으며, 냉소적이거나 유머러스한 태도로 슬픔을 감추고 있다. 슈퍼맨처럼 완벽한 초인이 아닌 이들도 팀으로써 힘을 합치면 우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1편과 2편이 신적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태어난 스타로드의 이야기를 통해 혈연의 폭력성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유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얼마 전 개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볼륨 3’는 공감의 대상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확장한다. 3편의 주인공은 ‘말하는 라쿤’ 로켓이다. 완벽한 생물을 창조하기 원하는 생명공학자 ‘하이 에볼루셔너리’는 동물의 신체를 개조해 지성을 부여하는 실험을 지속하였고, 로켓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다. 그 개조 과정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끔찍하게 묘사되며, 부작용으로 인해 미쳐 버리거나 죽는 동물들도 많다.영화에는 인간에 의해 희생당한 또 다른 동물이 나온다. 우주로 보내졌던 개 ‘라이카’를 모델로 한 ‘초능력 개’ 코스모이다. 미소 간의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 소련은 유인우주선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인간 대신 개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을 태운 우주선을 발사했다. 발사와 대기권 이탈, 우주공간 진입의 과정이 동물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동물들은 모두 발사과정 또는 우주 진입 이후에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안전하게 데려올 계획 자체가 없었다. 우주 왕복선이나 달 착륙, 우주정거장 같은 우주 개발의 성과들은 이 동물들의 죽음 위에서 빛나고 있다.지금 우리가 누리는 과학문명은 수많은 다른 종들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구게의 피가 꼭 필요한데, 피를 뽑힌 뒤 방생된 투구게는 약해진 탓에 상당수가 죽게 된다고 한다. 또한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백신 수요가 급증하며 투구게를 남획한 탓에 개체수가 급감하여 멸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그 밖에도 의약품 개발이나 다른 과학적 목적을 위해 희생된 실험동물의 수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중장기적으로는 동물실험 없이도 인체에 안전한 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에 앞서, 과학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희생된 동물들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갖도록 하자. 인간에게는 다른 종들을 이용하고 죽일 권리가 없다. 우리의 필요와 이득을 위해서 그렇게 합리화할 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수탈자에 가깝다. 이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2023-05-22

스승의 날을 보내며

김규인수필가 그냥 지나쳐도 그만인 스승의 날이 지나갔다.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소프트볼을 하며 자축한다. 이제는 감정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가르치는 노동자들의 초라한 시간이 흘러간다. 선생들만의 스승의 날 행사가 벌써 몇 년째 이어진다.우리 사회가 요구해서 만들어진 학생 인권조례로 이제는 생활지도는 없고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실이다.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 윤리가 필요 있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래도 세상은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은사님의 말씀을 학교에서 더는 들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챗GPT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는 요즈음 알량한 지식을 파는 일도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가 없다. 챗GPT에 “너희들이 선생의 자리를 대신할 날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어쩌면 신이 나서 바로 지금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집안의 밥상머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에 대한 교육이 사라진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기를 살리고 아이의 소중한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부모는 아이를 보는 시간도 줄여가며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맛있는 햄버거와 두툼하게 집어주는 용돈으로 부모는 미소 짓지만, 차가운 휴대전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사람다움을 잃어간다.학교에 떠맡겨진 사람 교육은 학생인권조례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고, 열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법의 심판을 기다린다. 교육학을 공부하며 교사로서의 의지를 불태우는 선생이 점점 사라진다.매스컴에서는 연일 학교에 관한 기사가 올라온다. 동물의 세계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학교폭력은 끝이 없고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을 고소하고 다시 선생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대응한다. 학생과 학부모의 눈에 선생이 안 보이는 일이 너무나 잦다. 교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어가지만, 학교의 현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갈라버린다. 내가 보는 것이 옳고 상대방은 틀리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몰아버린다. 이럴 때면 어떻게 살아야 바른 것인지 헷갈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그래도 세상은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에 의하여 돌아간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기만 한다.그렇다고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간다고 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같이’를 찾고 싶다. 그래도 교실에는 아직 선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학생들이 있고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이 있음을 느끼며 살고 싶다.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이 있는 한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웃음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슬픔과 처진 후배들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한다. 선생의 옆에는 학생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교육은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가 만들어 내는 하모니임을 아직도 믿는다. 학교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퍼져서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우기를 바랄 뿐이다.

2023-05-22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의 혁신 : 천장 구조의 변화

11세기 초 출현한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은 고대 로마 건축을 닮았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어 옛적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클뤼니에 세워진 수도원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위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우선 로마네스크 교회는 크고 높고 우람하다. 로마네스크를 뒤따르는 고딕은 더 높고 더 웅장하지만 육중하거나 우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돌의 무게를 극복하고 시각적으로 상승하는 듯 보인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건축을 올린 방식과 꾸미는 장식이 달랐다.고딕이 공학적 기술력으로 높이를 추구할 수 있었다면 로마네스크 건축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고딕교회의 겉은 마치 피부에 문신을 새긴 듯 갖갖이 문양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로마네스크는 그렇지 않다. 아주 단순하다. 자전거 바퀴 창살모양의 큰 창이나 외벽에 움푹 들어간 벽감을 마련하여 조각 작품을 올려놓은 정도다. 고딕교회는 섬세하고 복잡하고 현란한 문양으로 빈틈없이 꾸며졌다. 로마네스크는 기껏해야 완만한 아치 장식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로마네스크는 화려하지 않다. 그 대신 명료하다. 단순한 만큼 정갈하다. 나름의 규칙을 지킨 꾸미는 요소들에서 잔잔한 리듬감도 전달된다.중세건축은 암호화된 상징코드이다. 지상에 세워진 하늘의 집. 죄악 된 세상을 이긴 승리의 상징이자 죽음의 해방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런 의미가 녹아 있는 교회건축은 위엄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로마네스크 교회가 우람하고 견고한 요새의 모습을 지닌 이유다. 강한 요새, 안전한 피난처, 악과 맞서 마침내 거머쥘 승리와 구원의 약속. 중세 교회건축에는 이러한 상징과 메타포가 담겨 있다. 기독교의 종교성을 집약적이고 종합적이고 직관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높고 웅장한 건축이 필요했다.제한된 기술로 높이 있는 건축을 완성해야 한다면 벽을 두껍게 쌓고 굵고 튼튼한 기둥으로 하중을 바치는 것 이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로마네스크 건축가들도 이 방법을 취했다. 높이 올릴수록 벽은 두터워졌고 벽이 두터워진 만큼 지탱하는 기둥의 크기 역시 비례해 늘어나야 했다. 그 결과 로마네스크 교회는 육중한 무게감과 우람한 몸집을 가지게 되었다.앞선 시대와 비교했을 때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에서 관찰되는 큰 변화 중 하나는 천장이다. 로마네스크 이전에는 주로 평평한 목조천장이 사용되었다.어떤 경우 천장 없이 지붕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경우도 자주 있다. 이런 천장은 로마네스크가 완성한 장엄한 석조 건축에 어울리지 않았다. 석조 건축의 보임새에 걸맞는 천장이 필요했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석조로 된 교차 궁륭(groin vault)이다. 궁륭은 둥그스름하게 만든 석조 천장을 말하는데 이미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에서 반원통형 궁륭이 사용되었다. 교차 궁륭은 좀 더 발달된 것으로 반원통형 궁륭 두 개를 서로 교차 시켜 만들어 졌다. 건축의 여러 요소들은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다른 요소들의 구조적 변화를 야기한다. 건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적 안정성이다. 형태나 구조의 변화는 역학적 변화를 수반하고 새로운 힘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관계된 요소들에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천장의 형태 변화는 벽면 구조의 변화 그리고 건물 층의 분화에 영향을 주었다. 건축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가들이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기본적인 힘은 하중이다.석조 궁륭으로 천장이 바뀌면서 또 다른 힘이 중요해 졌다. 좌우로 팽창하는 힘은 물론이고 기온 변화에 따른 재료 성질의 변화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까지 예측해야 했다. 십자형 교차 궁륭의 하중은 네 모서리로 집중된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분산하기 위해 건물 내벽과 외벽에 벽기둥이나 부벽이 마련되었고 그 결과 로마네스크 교회의 보임새 또한 달라졌다./미술사학자 김석모

2023-05-22

군위 화본마을, 낡은 것의 온기

사람 사는 온기로 낯선 방랑객을 맞이하는 마을이 있다. 낡은 것·오래된 것·별것도 아닌 것을 보고 만지고 체험하면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작고 아담한 마을이 품은 온기 한 자락으로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을 쉬어가게 만든다. 군위의 산성면 화본마을은 도시와는 다른 독특한 경관과 문화와 생태 속에서 옛 정감을 방랑객에게 제공한다. 근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화본역 일대와 6~70년대 풍경을 재현해 놓은 ‘엄마 아빠 어릴 적에’ 전시관, 우보면의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를 돌아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낡은 것이 품은 온기가 방랑객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다. 도시민이 바라는 ‘농촌 판타지’, 농촌의 자연 치유력과 재생을 통한 힐링을 군위 화본마을에 가면 찾아볼 수 있다.화본마을로의 여행은 무궁화호를 타고 화본역에 내리는 것에서 시작하면 좋다. 작고 아담한 플랫폼에 발을 디디면 증기기관차의 냉각수확보를 위해 꼭 필요했던 급수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법 커다란 급수탑은 화본역이 근대에 지역의 거점으로서 활발히 운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천이나 대구, 안동 등으로 나가 농산물을 판매하고 생계를 유지하던 당시, 화본역은 이 지역의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고 전해진다.화본역은 1936년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938년에 기차 운행을 시작하였다. 운행 시기에 맞춰 설치된 급수탑 안에는 내부 물탱크와 파이프 관, 환기구와 ‘석탄정돈, 석탄절약’이라는 문구가 당시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있어 근대 소도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오래된 기차를 활용한 레일카페에서 차 한잔하고,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일본식 관사(지금은 숙소로 활용)를 돌아보면서 옛 정취에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아쉬운 점은 이 역이 2024년 12월까지만 기차가 운행되고 마감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의 플랫폼에 발 디딜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느림의 대명사인 무궁화호를 타고 여행하는 낭만은 ‘역’으로서의 기능을 멈추면 박물관 유리 속에 장식된 유물과 다름이 없어질 것이다. 화본역 부근에는 재밌게도 실제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체험형 전시관이 하나 있다. 1953년에 지어져 2009년까지 학생들이 다녔던 산성중학교 건물을 ‘엄마 아빠 어릴 적에’라는 기억 재현 공간으로 활용한 것이다. 유리 속 장식품이 아닌 실제로 만져볼 수 있는 물품과 체험할 수 있는 옛 놀이로 채워진 이 장소는 주로 가족과 단체 방랑객이 가보기에 좋다. 메인 전시관에서는 방앗간·시골 찻집·전파상 등 향수를 부르는 60~70년대 화본마을의 거리를 볼 수 있으며, 당시의 학교 교실 속 풍경이나 가정집 등의 생활공간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역민의 손때묻은 생활 소품과 포니 차량도 전시되어 있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꼬마 기차를 타보고, 양은 도시락을 먹고, 달고나를 만들며, 제기나 팽이 놀이도 즐기고,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보고 만지고 즐기다 보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10월 초에 가을 축제와 12월 초 김장 축제로 지역민과 한시적으로 융화되어 농촌 생활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다. 화본마을은 빡빡한 도시 생활에 상처 입은 영혼이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다. 이렇게 도시민이 바라는 추억과 향수는 전시관의 유리 밖에서 소소한 힐링이 되었다.지친 도시민의 소소한 힐링 이야기라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를 빼놓을 수 없다. 우보면에 있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로 찾아든 방랑객은 영화에서 받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한다. 푸근하고 정겨운 고향마을, 추억과 낭만이 있는 동네 친구들, 자연의 따뜻한 감성이 녹아든 음식,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등 영화에서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고향마을에서 친구들과 보내며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방랑객들은 실제 촬영지에서 주인공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보고, 요리하던 주방을 살펴보고, 2인용 자전거를 타보면서 영화 속 장면을 되새김질한다. 빡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농촌만의 느린 감성이 힐링을 바라는 도시민에게 ‘농촌 판타지’가 되어 치유와 재생을 전달하는 것이다.낡은 것·오래된 것·별것도 아닌 것은 재해석되기 전에는 쓸모없는 것·외면받는 것·버릴 것에 불과했다. 어느 날 주민들 스스로 이러한 장소와 물품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겨운 것·추억이 담긴 것·치유와 재생이 깃든 것이 되었다. 화본역과 ‘엄마 아빠 어릴 적에’ 전시관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와 마을 곳곳의 벽화들을 통해 주민들이 만들어 낸 ‘낡은 것의 온기’가 방랑객을 부른다. 온기가 그리운 도시민이라면 응당 그 부름에 취해 방랑객이 되어 보는 것도 좋겠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