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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말기 역사와 민중의 삶 생생하게 그려

구도소설 ‘만다라’로 유명한 김성동(71) 작가가 여섯 권 분량의 장편소설 ‘국수(國手)’(솔출판사)를 완간했다. ‘국수’는 1991년 한 일간지 연재를 거쳐 1995년 전체 4권으로 출간됐는데, 작가는 이번에 5권을 새로 쓰고 앞 1~4권도 대폭 개작해 전6권으로 완간해 내놓았다.‘국수(國手)’는 우리 고유 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역작으로써, 행간마다 우리말의 토속적이면서도 구수한 맛이 배어나는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로 평가되고 있다.‘국수(國手)’는 바둑에서 쓰는 말로 주로 알려졌지만 애초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본 이야기를 담은 5권과 별권 1권까지 전 6권의 소설 ‘국수’는 임오군변(1882)과 갑신정변(1884) 무렵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 예인과 인걸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충청도 내포지방(예산·덕산·보령)을 중심으로 바둑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년 석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난 화적이 되는 천하장사 천만동, 선승 백산노장과 불교 비밀결사체를 이끄는 철산화상, 동학접주 서장옥과 그의 복심 큰개, 김옥균의 정인인 기생 일매홍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김성동 작가는 “사람들이 전부 바둑소설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선은 말 하나 속에 여러 가지 뜻이 있었어요. 다층적인 거죠. ‘국수’는 손 수(手)자가 말하듯이 재주가 뛰어난 자에게 바치는 민중의 꽃다발입니다. 의술이 뛰어나도 국수, 그림을 잘 그려도 국수, 싸움을 잘 해도 국수예요. 바둑만 남고 다 사라졌어요. ‘국수’를 바둑소설이라고 하면 스스로 무식하다고 하는 것밖에 안 돼요. 바둑을 중요한 모티브로 끌고 가는 게 있지만, 각계각층의 이야기가 많아요.”라고 소개했다. 김 작가는 또 이 땅에서 사라진 우리 말을 작품 속에 되살리려 애썼다고 했다. 제6권에 해당하는 ‘國手事典(국수사전)-아름다운 조선말’은 1∼5권 작품에 사용된 풍물과 우리 옛말을 풀이해 담았다.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솔 출판사 대표는 이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사라지거나 오염되고 왜곡되기 전 조선의 말과 글, 전통적 생활 문화를 130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리며 생동감 넘치는 서사와 독보적이고 유장한 문장으로 그려낸 것은 실로 경이로운 문학사적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18-07-20

심리치유 에세이와 자기계발 워크북이 한권에

내면아이 치유, 그림자 껴안기, 감정과 욕구 돌보기…. 복잡하고 고단한 현대사회를 살아내기 위해 마음치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딘가에서 몇 번쯤은 들어본 말들일 것이다. 심리코칭 전문가 김은미의 신간 ‘마음성장학교’(한겨레출판)는 10여 년 현장 코칭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가를 찾아가지 않고도 홀로 마음치유 및 성장 프로그램을 해볼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책은 심리치유 에세이와 자기계발 워크북이 비슷한 비중으로 한 권에 담겨 있다. 전문가의 조언을 담은 ‘읽는 책’에 머무르지 않고 단계별로 직접 생각해보고 적어보고 느껴볼 수 있는 워크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각 장별로 치유와 성장으로 가는 목표를 제시하고,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펼쳐지고, 뒤이어 다양한 코칭 도구들이 삽입돼 있다. 심리치유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삶의 변화와 성장까지 이끌어준다.또한 어려운 심리학 이론 대신 저자가 직접 겪은 삶의 경험들을 상세히 녹여 독자들이 쉽게 감정을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현장에서 거창한 심리 이론을 설명하는 것보다 코치의 내밀한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을 때 참가자들도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에 따른 것이다.이외에도 10여 년간 현장에서 활용한 다양한 코칭 방법 중 참가자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둔, 검증된 도구들이 집약돼 있다. 독서, 글쓰기, 드라마 보기, 음악 듣기 등 손쉽게 실천해볼 수 있는 방법들을 포함해 존 브래드쇼의 내면아이 질문지, 자아인식도구인 ‘조하리의 창’이나 윌리엄 글라써의 욕구 강도 질문지, 모치즈키 도시타카의 보물지도 만들기 등 마음성장에 유용한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다.이 책은 ‘삶의 가치를 되찾는 8주 코칭’이라는 부제처럼 총 8주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므로 1주부터 순차적으로 읽고 따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희정기자

2018-07-20

기상천외한 상상력, 삶의 비극을 웃다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날렵한 유머 감각으로 삶의 비극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소설가 박형서(46)의 다섯번째 소설집 ‘낭만주의’(문학동네)에는 ‘권태’ ‘시간의 입장에서’ ‘외톨이’ ‘거기 있나요’등 6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소설은 어디서도 접해본 적 없는 흥미로운 사건을 구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삶의 권태로움을 알아차린 한 여자가 무심코 던진 불씨에 미국 대륙이 통째로 불타오르고(‘권태’) 무분별한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닭의 멸종이 임박하며(‘시간의 입장에서’) 난쟁이 신분으로 태어난 뒤 몸만 커져버린 ‘키 큰 난쟁이’가 아이를 여읜 슬픔을 ‘일반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써야 한다(‘키 큰 난쟁이’). 아내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자 비탄에 잠긴 남자가 연구를 거듭해 지구상에서 바다를 날려버릴 계획을 세우며(‘외톨이’) 미시우주를 만들어 문명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절대적인 힘의 유혹에 빠져 미시우주계의 신으로 군림하기도 한다(‘거기 있나요’).하지만 박형서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이런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들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작가의 놀라운 설득력에 있다. 예를 들어 ‘권태’에서 작가는 미국의 지형과 자연환경, 화염의 물리적 성질에 입각해 불길의 진행 경로를 치밀하게 설정함으로써 미국 전역을 남김없이 태워나간다.‘외톨이’에서는 보잘것없는 외톨이였던 재봉사의 아들이 과학 이론을 짜깁기해 시대를 뒤흔들 성과를 이룩했다고 익살스럽게 눙치는가 하면 그가 발명품을 완성하기까지 수행한 연구의 과정과 동원된 이론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채워넣어 아내를 잃은 한 남자가 장엄한 바다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친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가능할 법한 서사로 만든다./윤희정기자

2018-07-13

따사로운 햇살같은 한편의 휴머니즘

“바람개비가돌고 돌아초침과 분침이 숨차다바람개비가 내 어린날의빛바랜 기억을 돌리고 있다바람개비가 물레처럼 돌면내 어린날의 편린들이 그리움으로피어난다”- 양경한 ‘바람개비’전문대구의 중진 시인인 양경한 시인이 10번째 시집 ‘찔레꽃 피는 풍경’(북스리틀)을 펴냈다.수필가,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양 시인은 지난 40여 년 동안 시집 10권, 시조집 5권, 수필집 10권, 동시집 45권, 동화집 36권, 전기집 10권, 전래동화집 10권을 펴냈다.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85년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해 한국시문학상, 자유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아동문학상, 영남아동문학상, 전국교원예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제첩 파는 누이’, ‘감꽃 떨어지는 밤’, ‘저물어 가는 빗소리’, ‘배경이 되고 싶다네’, ‘꽃잎 지는 어느 봄날’등 총 5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번 시집에는 100여 편의 시가 실렸다.시들은 자연과 인간의 감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해 시가 깊은 삶의 경륜 속에서 섬세한 감성의 발현이 따사로운 햇살같은 느낌을 주는 한편 휴머니즘이 밑바탕을 이뤄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양 시인은 “비록 작은 시집이지만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18-07-13

삶의 통증을 앓아내고 얻는 것 ‘사람다움’

동시대의 문학과 풍경, 사람과 사건을 견고하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해온 이영광(53)의 다섯번째 시집‘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몸의 시학에 관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전위적인 실천으로 평가받았으며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수록된‘나무는 간다’(2013)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이영광은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이래 다수의 시집과 선집을 출간하며 시대와 존재의 고통을 체화한 시들을 선보였다. 시인 신경림이 “이 땅에 사는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섬뜩할 만큼 치열하고 날렵하게 형상화했다”(‘제11회 미당문학상 심사평’)라고 호평한 것처럼 이영광은 참혹한 현실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적 언어로 생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부단히 애써왔다.그런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이 지닌 한계이자 매개인 ‘몸’을 통해 ‘사람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이곳’에서 물러서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의 난폭과 몰이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은 “부서지지 않는 강인함이 아니라 막다른 곳에서 서서히 허물어지면서, 허물어짐으로써, 허물어지기 때문에 버티어내는 자의 강인함”(이장욱)을 연상시킨다. 이영광은 현실의 위협에 맞춰 변화를 꾀하기보다 자신이 지금 감지하는 통증과 몸의 언어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고통과 상처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비로소 사람다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끝없는’ 몸부림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사람’일 수 있다는 숭고한 시적 증명이자 실천의 결과를 이룩해낸다.이영광은 삶에서 일어나는 파문에 정직하게 괴로워하는 시를 써왔다. 이는 “견디면 견뎌지는 어떤 것을 조금씩 견”디며 사는 쥐의 입장을 쓴 시 ‘덫’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쥐는 “시궁창, 썩은 마음의 양식, 강철의 어둠”을 “달콤히 오독”하며 살아간다. “가도 가도 구멍뿐인 생”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끝내 “견딜 수 없는 덫”에 걸려든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통증이 그를 엄습”하는 순간 놀랍게도 그는 “너무도 큰 쾌락”을 감지한다.이영광은 ‘알 것 같은 어제’(과거)와 ‘알 수 없는 오늘’(현재)이 이루는 부정교합의 층위에서 시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눈에 띄는 점은 그가 성급히 희망을 움켜쥐고 미래로 나아가기보다 앎과 알지 못함의 간극을 골똘히 응시함으로써 마비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에도 “징역 살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함으로써 “이 신기한 지옥”을 쉽사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반복된다(‘무인도’). 이영광에게 삶을 제대로 실감하는 일이란, 즉 사람답게 사는 일이란 어떤 확신과 오만도 없이 현실의 괴로움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예전에, 수술받고 거덜 나 무통 주살 맞고 누웠을 적인데/몸이 멍해지고 나자, 아 마음이 아픈 상태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은/순간이 오더라고, 약이 못 따라오는 곳으로 글썽이며/한참을 더 기어가야 하더라고/마음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 물으면,/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그 눈물을 마음의 통증이라 말하고 싶어”―‘마음 1’ 부분시인에게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은 “눈물”이며 “마음의 통증”이다. 이처럼 이영광은 보이지 않는 마음, 우리가 타인에게 꺼내 보여줄 수 없는 의지가 결국에는 처절한 고통을 앓고 난 이후의 몸으로 발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능동적 통증’을 통해서만 사람이 사람이기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해설처럼 이영광은 “통증을 앓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로 한 자”이며 “수인의 숙명”을 타고난 자다.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추천의 말에서“오직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생과 겨뤄보고자 하는 이의 고아한 악력이 고스란히 시로 남았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그걸 먼저 하고, 그런 먼저의 시간이 시의 다른 문을 연다. 시인이란 말의 끝없는 의미는 이럴 때 새겨질 것”이라고 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7-13

핏줄과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비극 담아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66)의 장편소설 ‘빨강머리 여인’(민음사)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작가의 열 번째 장편인 이 소설은 자국인 터키 내에서만 40만부가 팔린 화제의 책이다.1985년 출간한 ‘하얀 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오르한 파묵은 이후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눈’, ‘소설과 소설가’를 출간하며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작가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터키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가를 넘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로 거듭난 그는 정치 소설, 민족주의 등 다양한 주제의 소설을 선보여 왔다.실험적이고 독창적인 구조로 동양과 서양의 문명의 충돌을 다룬 그의 문학은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문학적 토양에는 터키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있었다.그는 ‘빨강머리 여인’에서 가장 충격적인 서사로 꼽히는 그리스 신화이자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를 엮어 신화 속 아버지와 아들을 현대로 불러들인다.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된 한 중년 남자의 회고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을 통해 자아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여러 인물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수많은 은유적인 표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이스탄불의 모습과 핏줄과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비극적인 단면이 담겨 있다.이스탄불에 사는 주인공 화자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날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뒤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대학 준비를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옆집에 우물을 파러 온 기술자 우스타를 따라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으로 떠난다.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우물을 파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주고, 아들을 대하듯 갖가지 조언도 해주는 우스타를 따르게 되고 점점 그를 아버지로 느끼게 된다. 우스타 역시 그를 신뢰하며 ‘아들’이라 부르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또 주인공은 그곳의 시내에서 빨강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땡볕 아래서 일을 하는 내내 그녀를 생각하며 가까워질 기회를 노린다. 어쩐 일인지 그녀 역시 그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준다. 유랑극단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빨강 머리 여인은 30대 중반으로, 주인공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다. 그리고 어느 날 단둘이 있게 된 두 사람은 동침하게 된다. 다음날 수면 부족 상태로 우물 파는 일에 돌입한 주인공은 우물 꼭대기에서 흙이 꽉 찬 양동이를 놓쳐 버리는 예기치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이후 우스타와 있었던 일을 잊으려 애쓰며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학 엔지니어가 된다. 첫사랑인 빨강 머리 여인과 약간 닮은 또래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한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생기지 않고 부부는 자식을 키울 열정을 사업을 키우는 데 쏟는다. 함께 설립한 회사는 승승장구해 주인공은 부자가 되고 회사 광고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알 수 없는 인력에 끌려 다시 왼괴렌을 찾은 주인공은 빨강 머리 여인을 만나고,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에 얽힌 진실을 듣게 된다. 민음사 측은“‘빨강 머리 여인’은 풍부한 은유와 복잡한 복선이 점층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역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수수께끼를 집요하게 파고든, 미스터리의 궁금증과 스릴러의 긴장감을 주는 오르한 파묵 최고의 소설”이라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2018-07-06

빅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 역사학이 가야할 방향은?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21세기, 역사학의 길을 묻다’(문학과지성사)는 역사 대중화에 힘쓴 역사학자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일상화한 시대에 역사학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기록한 책이다. 김기봉 교수는 역사학을 학문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 사극, 역사소설 등 대중 역사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활발히 역사비평 작업을 해왔다.‘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에서 김 교수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가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데 대해 반기를 든다. 그는 역사를 과학과 진보 과정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한 카의 이론에 반박하면서 사실(史實)은 하나여도 담론은 여럿이라는 점에서 역사에는 문학성이 있다고 설명한다.그는 역사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누는 오래된 체제를 청산하고, 일국사(一國史)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역사 서술을 지식이 아닌 상상력으로 해야 역사학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조언한다.저자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그의 정의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임을 밝히며, 카를 비롯해 국가, 민족, 사회, 진보, 혁명, 계급 등 근대의 거대 담론 역사학 프레임에 대항하는 시도로 등장한 탈근대 역사 이론을 제2부에서‘오늘의 역사학’으로 소개한다.이와 더불어 저자는 제3부에서 유사 이래 가장 크고 빠른 문명사적 변화와 연관 지어 다각도로 ‘내일의 역사학’을 전망한다. 먼저 글로벌 시대와 다문화 사회를 맞아 일제 식민사학의 유산인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누는 3분과 체제를 청산하고, 민족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글로벌 한국사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마지막으로 새롭게 등장한 문명사의 유형인 ‘빅히스토리’를 통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도전에 직면하여 전환기를 맞은 인류 역사와 역사학의 미래에 관해 고찰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06

“설머리 먼동과 형산의 노을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항에서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동화(65) 시인의 첫 시집 ‘달빛 소리’(좋은땅출판사)가 출간됐다. 신동화 시인은 1980년대 초 포항문학의 출범기에 ‘형산강’ 연작시와 같은 서정성 높은 시들을 발표하며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저자가 향토 문화를 기반으로 쓴 시들을 수록해 시집을 발표했다.시집은 제1부 ‘형산강, 그 영원한 생명의 젖줄’, 제2부 ‘가을 민들레 하얀 홀씨’, 제3부 ‘바닷소리’, 제4부 ‘인연의 소리’로 구성돼 있다.시인의 ‘형산강 6-살아있는 목숨을 위하여’라는 시를 소개한다.“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제복에 묻혀 아침저녁/자전거 페달을 밟으며/강마을 강둑을 달리며/소리 없이 깊이깊이 흐르는 강물을 보네./온통 매캐한 냄새와/거대한 굴뚝마다 쿨럭쿨럭/제철공장 하늘을 덮는 구름덩이/자맥질로 하루해를 보내며/겨울 때 씻던 강은 아니지만/바람이 봄을 몰고 오는 강둑에는/강바람에 강버들 눈이 트고/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징용 나가 소식 없는/큰아들 생각만 하시던 할머니/저 강물에 한 줌 재 되어 흐르고/”(이하 생략)이 시는 1980년 대 중반 포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포항문학’에 발표된 ‘형산강’ 연작 시 중의 한 편이다.김만수 시인은 신동화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푸근하고 넉넉한 인간미를 바탕으로 지역의 정서와 정신을 절제된 언어의 교직으로 표현해 냈다. 시인의 감각적 사유(思惟)와 미학적(美學的) 감성(感性)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음을 본다”고 평했다.저자는 첫 시집을 내면서 “설머리 먼동과 형산(兄山)의 노을 따라 참으로 먼 길을 휘휘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돌아보니 아득하고 눈물겹습니다. 그리운 사람들, 정겹고 따스한 인연들 있어 행복했고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들 노을 속에 가만히 붉습니다”고 소감을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29

비밀 있으신가요… 비밀에 의해 유지되는 일상

▲ 김인숙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내게 이 소설들은 시간이다.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거기, 멈춰 있는 것. 조용한 문장을 쓰고 싶었으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지 못할 때가 많았다. 혼자 쓰는 글보다 혼자 하는 말이 더 많아졌다. 질문들. 부당한 것에 대해. 여기, 나, 사람들.”김인숙(55) 작가가 신작 소설집 ‘하루의 영원한 밤’(문학동네)을 출간했다.제12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빈집’을 비롯해 표제작과 ‘델마와 루이스’, ‘빈집’, ‘토기박물관’,‘아홉번째 파도’ 등 8편이 담겼다. 올해 등단 35년을 맞은 작가의 원숙한 세계를 보여준다.등단 이후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방황과 자유에 대한 희구를 그렸던 작가는 이후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으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응시하는 작품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왔다.이번 소설집은 삶의 매서운 진실을 묘파해내는 김인숙 소설의 매력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작가가 새롭게 개척해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는 평이다.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통쾌함과 뜻밖의 스릴러적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최근 김인숙 소설의 특별한 변화”라고 설명했다.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는 노쇠해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가는 노교수가 등장한다. 삼십 년 전 어느 하루의 일탈로 제자에게 사생아를 낳게 한 뒤, 제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던 모욕과 평생을 싸워온 그에게 남은 기억은 이제 삼십 년 전 그날 하루뿐이다. “최후의 생존을 위해 남겨놓을 수 있는 만큼만 남겨놓은” 그 기억을 붙든 채 노교수는 희미한 숨을 쉬고 있다. 삶을 감내하다가 결국 스러져가는 노교수를 지켜보는 또다른 제자 ‘그’의 삶에도 창피하고 모욕적인 순간들이 얼룩처럼 묻어 있다. 어느 밤, ‘그’는 자신의 삶과 노교수의 삶을 겹쳐 보기 시작한다. 생의 통증을 느낀 그 밤이 노교수의 마지막 기억처럼 사는 동안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자신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델마와 루이스’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의 두 자매가 가출을 감행해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목에서 보듯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소설은 영화와 달리 두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년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델마와 루이스가 중년의 식당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을 만나 이뤄내는 여러 세대 여성들 간의 유쾌한 연대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델마와 루이스의 자식들은 노년의 일탈을 황당해하기만 할 뿐 이들이 왜 가출했는지는 영영 알지 못하고,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자매의 마지막 여행은 우리에게 뭉클한 여운으로 남는다.‘빈집’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증오심을 느끼곤 하는 한 여자가 그럼에도 삶을 그러안기로 결심하는 결말 뒤에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덧붙인다. 여자가 본 남편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남편이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 소설은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비밀의 무한성을 독특한 공간으로 형상화하면서 비밀에 의해 일상이 유지되는 역설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토기박물관’은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는 나이든 여성 ‘미라’와 ‘제니’가 어느 오후 우연히 토기박물관의 전시를 관람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로 요약되지만, 읽다보면 곧 정밀하게 계산된 구성임을 체감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노년 여성의 가벼운 히스테리처럼 읽고 지나온 문장들이 어느새 사랑과 고독의 증세로 다시 읽히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김인숙 작가는 20살때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받았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6-29

바르샤바-그단스크-크라쿠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안이다. 지나쳐 온 바르샤바에서는 쇼팽 기념관에 갔었다. 그는 마흔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심장은 고국으로 운반되어 성 십자가 교회에 안치되었다고 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쇼팽의 음악이 흘러 넘친다. 한국의 KTX 비슷한 EIP가 바르샤바 역에 다가갈 때면 우리가 민요를 들려주듯 쇼팽의‘야상곡’이 들린다. 이 나라는 국토의 90퍼센트가 평원이라고 했다. 지금 EIP는 세 시간째 산 없는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렇게 평지투성이라면 외적을 막아내기도 몹시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단스크는 시가지가 세계제2차대전 때 파괴되는 바람에 ‘전부’ 전후에 그림, 사진을 보고 복구했다고 했다. 그단스크 올리바 역 바로 옆에 있는 공원은 중세 때부터 조성해 온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했다. 무릇 파괴되지 않는 것, 오래 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크라쿠프 근처에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겨울에 조르조 아감벤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감명 깊게 읽었었다. 그때 나치 장교가 수용된 유태인들에게 말했단다. 너희들의 소식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알려진다 해도 사람들은 사실이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프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계 유태인 작가가 살아남아 문학으로 자신이 겪고 보고 들은 것을 남겼다. 아감벤은 거기서 인간의 새로운, ‘최저’ 윤리학을 구축했다.태평양 전쟁 때 성노예로 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당한 일을 말하자 일본 정부는 국가가 직접 시행한 그런 일은 없다 했다. 한국의 어떤 사람이 그를 ‘뒷받침’하는 책을 내자, 한 시절을 한다 하던 사람들이 조심성 없이 박수를 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세상에 기가 막히는 일은 옛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일이 아우슈비츠처럼 ‘비밀’로, 없던 일로 간주되듯, 오늘날의 수용소들도 불문에 부쳐지려 한다.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한국에 오셔서 땅에 입을 맞추시며 평화를 기원해 주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로 올 때보다 크라쿠프로 가는 길은 더 평평해 보인다. EIP에서는 커피를 무료로 서비스해 준다. 공항에서 바르샤바 시내로 들어올 때는 버스표 때문에 값비싼 수업료를 물었건만.요즘에는 파스칼의‘팡세’를 읽는다.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어 흔들리는 차안에서 읽기 좋다. 파스칼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만 신에 의한 구원을 간절히 찾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 한둘을 잠깐 여기에 옮긴다.110. 세 접대자 영국 왕, 폴란드 왕, 스웨덴 여왕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은신처나 피난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겠는가.120.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찾는데 유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데는 유용하다. 이보다 더 옳은 일은 없다.폴란드에 와 있다. 하지만 폴란드 왕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말을 규제해야 한다. 늘 그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눈만은 그래도 똑바로 떠야 한다. 이제 크라쿠프 쪽은 땅이 높아졌다. 아우슈비츠가 가까워지고 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6-22

나의 정체를 추적하는 집요한 탐구과정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73)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거리’(문학동네)가 출간됐다.그의 작품은 기억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모호하게 뒤섞으며 인간 생의 본질을 조망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열번째 장편소설인 ‘잃어버린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활동이 무르익기 시작한 1984년 발표된 작품으로, 1988년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책세상)라는 제목으로 맨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그동안 모디아노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온 문학동네에서 ‘현재’의 독자들의 감각에 맞춰 보다 산뜻하고 새롭게 번역을 다듬고 옷을 갈아입혔다.번역자 김화영 교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닮은 데가 많다”고 말한다. 사물보다 빛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 인상주의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행위보다 그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대상을 각기 다른 시간에 반복해 그리는 행위를 통해 항상 변하는 빛 그 자체를 그리려 노력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모디아노 또한 비슷한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포착해내려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인물의 행위는 시간의 힘을 드러내고, 삶을 담는 그릇, 공간을 드러낸다.모디아노의 많은 작품이 언뜻 엇비슷해 보이면서도,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저마다 마력과도 같은 고유의 힘을 갖는 이유는 모디아노가 “어떤 장소의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살려내는 천재”(김화영)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모디아노 특유의 나직하고 억제된 슬픔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세계”(김화영)에 어느새 깊이 빠져들게 된다. 제각각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상주의 회화 작품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앰브로즈 가이즈는 7월의 어느 일요일, 이십 년 만에 파리를 찾는다. 집필해오던 시리즈와 관련한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이곳에 온 그는, 문득 자신이 스무 살 때까지 파리에 살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폭격을 피해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도시에서, 중년의 앰브로즈 가이즈는 다시 이십 년 전 장 데케르라는 이름의 스무 살 프랑스 청년이 돼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나간다. 옛 추억을 더듬던 그에게 찾아드는 파리의 수많은 거리와 반딧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얼굴들…. 폐허가 된 과거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그는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자기 인생의 수사관이 된다.모디아노는 초기작에서부터 한결같이 ‘아이덴티티’에 천착해왔다. ‘나’의 정체를 묻는 집요한 질문은 추리소설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관심을 잡아둔다. 다만 범행 동기나 범죄자를 쫓는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추적의 대상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속 ‘나’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잃어버린 거리’ 역시 ‘나’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한다. 소설 속 장 데케르라는 화자 역시 “스스로 수사관이 되어” “기억이라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과거를 추적한다.이 탐구의 과정은 시간의 파괴력 때문에 곧잘 ‘절망적’인 것이 된다. 이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파리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앰브로즈 가이즈는 문득 장 데케르의 모습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라는 두 시점 사이에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놓여 있고, 그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삭막한 도시에서 이 거리를 건너지르는 행위는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아득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22

모르는, 몰랐던 사람들끼리 알아가고 이해하며…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조경란(49)이 새 소설집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일요일의 철학’이후 단편소설집으로는 5년 만이다. 조경란은 1996년 등단 이후, 그간 여섯 권의 소설집을 포함해 총 열다섯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한국의 대표 중견 작가로서의 자리를 지켜왔다.표제작을 비롯해 ‘매일 건강과 시’, ‘11월 30일’, ‘오래 이별을 생각함’ 등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이번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문장과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고백 조의 어조를 통해 작가가 지난 4년여 의 시간 동안 고민해온 삶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수록 작품 중 다수에서 사람 사이의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풀어내며, 개인과 타인의 문제를 각자의 삶과 연결해낸다. 더불어 조경란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가족의 형태에 관한 문제를 섬세하게 파고드는 탐구 의식 역시 이번 소설집에서 이어진다.온전히 나로서의 나, 가족 속의 나, 혹은 사회 속의 나 등 수많은 개인 ‘나’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할 수도 있는 소설 속 삶의 여러 모습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문학평론가 황예인은 “작가는 ‘어떻게’에 짓눌려 그 한 걸음을 망설이는 이들의 등을 가볍게 떠밀어주는 듯하다. 목적지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대신 그저 걸으라고, 이미 그것만으로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고. 목적지를 몰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속아왔던 과거가 떠내려간다”고 해설했다.작가는 책 말미에 수록한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을 이렇게 설명했다.“소설집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끼리’로 하자는 말이 편집부와 오갔을 만큼 모르는 사람들, 몰랐던 사람들끼리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단편들이 모였다. 많은 사건들을 통과하는 동안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횔덜린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떤 경우에도 삶이 먼저고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소설의 출발도 거기에 있으리라 믿고, 오늘은 오늘의 글을 쓰고 내일은 내일의 글을 쓸 뿐이다. 누군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과장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고 조용한 빛을 발산시키는 그런 책을 쓸 때까지.” /윤희정기자

2018-06-22

불안을 잊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 진실인가 속임수인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자신만의 확실한 문학 세계를 공고히 쌓아나가며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최정화 작가의 신작 소설집 ‘모든 것을 제자리에’(문학동네)가 출간됐다.최정화 작가는 2012년 ‘창작과비평’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해 소설집‘지극히 내성적인’, 장편소설 ‘없는 사람’을 출간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2016 제7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인터뷰’, 페미니즘 테마 소설집‘현남 오빠에게’에 수록된‘모든 것을 제자리에’등 단편소설 8편이 담겼다.그동안 예민한 시선으로 온전해 보이는 세계에 스민 균열을 포착해내는 데 초점을 맞췄던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세계가 내포하는 불안을 섬세하게 그려낸다.최정화가 펼쳐놓는 8편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큰 폭으로 진동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표제작인 ‘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붕괴된 건물의 내부를 영상과 이미지로 남기기는 일을 하는 ‘율’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지웠다고 생각하고 엉망으로 파괴된 공간을 기록하지만 그것을 재현하고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 날 자신이 남겼다고 ‘생각한’ 영상과 기록된 영상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잘못 촬영됐다고 여겨 다시 찾아간 그녀는 그곳에서 뜻밖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또한 단지 푸른 코트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편이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고 있다고 믿는 인물(‘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 자신을 피하는 친구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대는 인물(‘전화’), 새로 이사온 집에 누군가가 계속 잘못 찾아오고, 심지어 그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인물(‘잘못 찾아오다’), 사고를 당한 뒤에 자신이 너무 늙어 보인다고 믿게 된 인물(‘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자동 반죽기를 샀을 뿐인데 오 년의 시간이 흘러버려 길을 잃어버린 인물(‘오 년 전 이 거리에서’) 등을 만나게 된다.마치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최정화 소설 속의 인물들은 우리와 멀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의 소설을 읽은 우리는 우리가 불안을 잊기 위해 만들어내는 우리만의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15

한국적 정서로 다시 읽는 바이런의 시

피천득의 번역 시 선집 ‘착하게 살아온 나날’(민음사)이 출간됐다. 본래 ‘내가 사랑하는 시’(1997)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이번 개정판에서 제목과 목록 구성을 바꾸고 미발표 번역 시도 수록했다. ‘착하게 살아온 나날’은 본문에도 수록된 바이런의 시 ‘그녀가 걷는 아름다움은’의 한 구절로, 피천득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시의 마음과 시인의 자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을 누르고 이겨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시는 사실 잘 읽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오히려 시를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온 나날’은 피천득이 여유와 기쁨이 사라진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건네는 다정하고도 다감한 선물이다.“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소, 연한 얼굴빛은착하게 살아온 나날을 말하여 주느니모든 것과 화목하는 마음씨순수한 사랑을 가진 심장”―조지 고든 바이런‘그녀가 걷는 아름다움은’부분많은 사람들에게 수필가로 알려져 있으나 피천득은 시로 문학을 시작했고, 그 기저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애송했던 동서양 유수의 시들이 있다. 피천득의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순수한 동심”과 “맑고 고매한 서정성”의 발현은 그곳에서부터다. 1부 ‘천사도 아니지만’에는 피천득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가운데서도 가장 애송하는 시편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것과 새롭게 윤문한 것이 함께 수록돼 있다. 한국 정서에 맞게 14행 정형시를 3·4조와 4·4조로 번역한 ‘셰익스피어 소네트 다시 쓰기’는 피천득의 번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2부 ‘사랑이 기울 때’에는 피천득에게 시인의 꿈을 심어 준 바이런, 워즈워스, 예이츠, 디킨슨 등 서양 시인들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번에 추가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세 편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명시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부 ‘돌아가리라’에는 도연명, 두보, 보쿠스이, 타고르 등 동양 시인들의 시가 수록돼 있다. 사사로운 감정을 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행간들을 천천히 좇다 보면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의 여유와 한 줌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르다가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산 공기가 석양에 맑다날던 새들 떼 지어 제집으로 돌아온다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느니▲ 피천득말하려 하다 이미 그 말을 잊었노라” ―도연명‘음주(飮酒)’이처럼 “그 어떤 현실의 속리와도 결탁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위대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 위해 피천득은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시인이 시에 담아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을 것. 둘째, 우리나라의 시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역할 것. 그는 ‘정서의 번역’을 염두에 두고 한국 독자들이 세계 명시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정호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는 피천득의 번역을 “영문학자나 교수로서보다 모국어인 한국어의 혼과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토착적 한국 시인으로서의 번역”이라고 평가하며 “그는 번역을 부차적인 작업으로 보지 않고 문학 행위 자체로 보았다”라고 말했다. 번역 시를 읽고 있음에도 우리말로 쓴 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좋은 것은 모름지기 나눠야 한다는 깨끗하고 천진한 마음으로, 그는 ‘사랑의 수고’를 자처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15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그때 그 일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그때 그 물건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더 열심히 말을 걸고/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더 열심히 사랑할걸….//반벙어리처럼/귀머거리처럼/보내지는 않았는가/우두커니처럼…./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한국 현대 시단의 ‘거목’정현종(79) 시인이 1989년년 펴낸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가 복간됐다.이 시집은 출판사 세계사에서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05년 2판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후 절판돼 서점에서 구해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판권을 가져와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로 이번에 새롭게 펴냈다.이 시집은 정현종 시인의 네 번째 시집으로, 대표작 중 하나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비롯해 시 64편이 담겼다. 1980년대 폭력과 저항, 공포와 죽음이 압도하는 가운데 생명의 가치와 인간의 사랑을 강조한 시들로 높이 평가받는다.‘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은 그 기저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에 한층 각별하다. 이 시집의 시들은 시대의 공포와 죽음을 목도한 시인이 1980년대를 휩쓴 폭력과 거친 세상을 비판하는 한편, 나아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감싸 안으려 한 흔적이기도 하다.▲ 정현종 시인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첫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얼마전 방영된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다뤄져 더욱 널리 알려졌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정현종의 시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는 1970년대의 ‘섬’(‘나는 별아저씨’)에서부터 지난해 연말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방중 때 낭송됐던 ‘방문객’에 이어, 등단 50주년인 2015년 발표한 ‘그림자에 불타다’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53년 시 인생. 그 허리께쯤 위치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정현종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제격인 시집일 것이다. 1965년‘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정현종 시인은 지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의 묵직한 주제를 무겁지 않은 시어로 풀어내 한국 주지주의 시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 등을 역임했고, 201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윤희정기자

2018-06-08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며 순정한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다만 혼란이다.” - 김살로메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 김살로메씨가 산문집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아시아)을 펴냈다.작가는 작정하고 일천 글자로만 된 미니 에세이를 썼다. 작가가 찍은 10여 편의 사진과 함께 80편의 짧은 산문을 엮었다. 일상에서 느낀 가족, 이웃, 문학에 대한 순간의 심상을 캐리커처처럼 그려냄으로써 글 쓸 당시의 작가의 내면 풍경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 단상 속에서 그는 이웃과 사람을 불러내고 책과 문학을 품는다. 그러다가 깨치거나 반성할 것이 있으면 메모를 한다. 대개 소설이 되는 그 기록에서 씨앗 같은▲ 김살로메아침놀이나 비에 젖은 꽃잎처럼 떨어져 나온 말들이 미니 에세이가 됐다. 소설로 묶기에는 따뜻한 말들, 이를테면 아무리 싸우려고 해도 미소부터 나오는 하루, 뺨을 때리는데도 안아주고 싶은 상대, 떠벌이지 않아야 할 때를 놓쳐버린 찰나의 비애, 무심결에 맞서는 매서운 바람의 기척 등, 때론 스미거나 번지는 말들이 한 편의 산문집이 됐다. 그의 글은 투명하다. 투명한 사람이 쓴 투명한 미니 에세이. 막 소리 내어 욕망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분명히 남다른 감각과 체험을 지닌 작가다. 세계와의 충돌을 인정하지만 조화로운 공존 또한 모색하려는 성찰적 자기 고백. 더하고 보탤 것 없이 작가는 이 짧은 산문을 통해 쨍한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이 미니 에세이는 한마디로 사람과 문학을 바탕으로 한 김살로메 작가의 일상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2018-06-01

‘중년 수컷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 단자를 꽂은 이상한 생김새로 인간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말하며…’

이번에는 ‘고양이’다.프랑스의 인기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7)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알려졌다시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나라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 중 한 명이다. 교보문고가 지난 2016년 집계한 과거 10년간 작가별 소설 누적 판매량에서 그는 1위에 랭크됐다. 자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더 사랑받는 건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미를 배가시키는 작가 특유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총 2권으로 이뤄진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고양이 1·2’(열린책들)는 프랑스에서는 2016년 출간돼 전작‘잠’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며 현재까지 30만부 가량 판매된 소설이다.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타자의 시각을 도입해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이 지구에서 인간이 차지해야 할 적절한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해 온 베르베르의 작업은 이미 첫 번째 작품인 ‘개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번 ‘고양이’에서는 그 문제의식이 그동안 좀 더 성숙해지고 발전해 왔음을 알게 된다.이 소설은 애완동물이긴 하지만 소통이 잘 안 된다고 여겨지는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해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가 종종 타자의 눈을 통해 우리 모습의 이상하고 추한 면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인간의 곁에서 삶을 함께하는 다른 종족 고양이 눈으로 보면 인간의 삶이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소설은 인간사회의 가장 끔찍하고 어리석은 측면인 종교에 대한 광신, 그로 인한 대립과 테러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인 암컷 집고양이 바스테트는 집사인 나탈리에게 사랑받으며 안락한 삶을 꾸려왔지만, 최근 집주변에서 부쩍 총소리가 들리고 나탈리가 울며 불안해하자 어떤 위기를 감지한다. 그러다 옆집의 특이한 중년 수컷 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만나게 되면서 삶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한때 실험동물이었던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 단자를 꽂은 이상한 생김새로, 자신은 그 통로로 인간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역사와 고양이의 역사를 들려준다.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에게 흠뻑 빠져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와 함께 인류와 고양이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그러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돼 바스테트가 살고 있는 파리에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 사이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쥐가 창궐하고, 쥐를 통해 페스트균이 무섭게 퍼진다. 파리에는 이제 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쥐떼의 습격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피타고라스는 주인이 남긴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한다. 바스테트는 타고난 소통 능력으로 다른 동물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꿈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대화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는 버려진 고양이 무리를 이끌고 남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수십만 마리의 쥐떼를 상대로 큰 전투를 벌인다.이 소설의 원제는 ‘Demain les chat’, ‘내일은 고양이’라는 뜻이다. 인류의 미래를 고양이에서 찾는다는 의미로 읽힌다. 남성이 아닌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책 전체에서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수컷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윤희정기자

2018-06-01

‘창밖은 오월인데’ 그리운 ‘인연’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가 피천득의 수필집‘인연’과 작가의 유일한 창작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개정판이 최근 민음사에서 출간됐다.‘인연’은 한국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킨 명산문으로, 오랜 시간 서정적·명상적 수필의 대명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전 작품이 희박한 한국 수필 분야에서 ‘인연’은 1996년 초판 출간 이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자 독보적인 스테디셀러다.민음사가 5월(29일)에 태어나 5월(25일)에 작고한, 피천득의 생일과 기일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 펴낸 수필집과 시집은 기존 독자들에게는 피천득 문학의 미감을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피천득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피천득이라는 기분 좋은 산책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인연’은 피천득 특유의 천진함과 소박한 생각, 단정하고 깨끗한 미문(美文)으로 완성된 담백하고 욕심 없는 세계다.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에 수록된 원고 외에 ‘기다리는 편지’,‘여름밤의 나그네’ 두 편을 추가했다. ‘기다리는 편지’는 중국 상하이 유학 시절 편지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이다.‘여름밤의 나그네’는 한여름 밤 길 위에 선 나그네의 풍경을 한 편 서사시처럼 그렸다.그 외에도 자신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인연’을 꼽는다는 박준 시인의 발문과 고(故)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피천득과 나눈 우정을 쓴 추모글, 피천득 작가의 아들 피수영 박사의 추모 글을 수록해 다양한 관점에서 피천득 작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시집 ‘창밖은 오월인데’는 종전에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피천득 유일한 시집을 제목을 바꾸고 새롭게 편집해 펴낸 것이다. 피천득 문학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이 가장 잘 드러난 이미지가 5월이고, 그와 같은 오월의 청신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창밖은 오월인데’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와 여운이 가득한 시상이 이루는 조화가 편편마다 절묘하다.“창밖은 오월인데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라일락 향기 짙어 가는데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2014‘창밖은 오월인데’에서이번 개정판의 11장은 추가된 시편들로 구성됐다. 참여시 성격이 강한 ‘불을 질러라’, 초창기 동물을 모티프로 쓴‘양’ 등 모두 7편을 수록해 피천득 시를 보다 총체적으로 다채롭게 조망했다.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시든 풀잎을 살라버려라!/죽은 풀에 불이 붙으면/히노란 언덕이 발갛게 탄다/봄 와서 옛터에 속잎이 나면/불탄 벌판이 파랗게 된다//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시든 풀잎을 살라 버려라!” -‘불을 질러라’ 전문)출판사 측은 “대체로 길이가 짧고 위트 있으면서도 심오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는 언어의 절약과 정서적 여유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시집이다. 단순하고 착한 심성이 섬세한 느낌과 합쳐지며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나아가는 형식은 일본 하이쿠와 영미 시 소네트 형식이 결합된 독창성을 만들어 내며 1세대 영문학자이자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어 낸 지식인으로서의 언어 감각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윤희정기자

2018-05-25

아테네·피렌체·항저우·애든버러·캘커타의 공통점은?

아테네, 피렌체, 항저우, 애든버러, 캘커타, 빈, 실리콘밸리…. 대륙도, 면적도 제각각인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한 시대를 풍미한 창조적 천재들이 있었다.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문학동네)는 베스트셀러 ‘행복의 지도’의 저자로 뉴욕타임스와 미국 공영방송 NPR의 해외특파원으로 활동한 에릭 와이너가 시대를 풍미했던 창조적 천재들이 찾아 떠난 여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왜’ 창조적 천재가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풍성히 배출됐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지금까지의 천재 논의가 개인의 자질 같은‘내면’에 집중됐다면,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는 천재를 만든 ‘외부’ 요인을 주목한다.천재들이 융성한 일곱 도시를 직접 걸으며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관점을 두루 아우르면서 하필 그 도시에서 왜 그토록 창의성이 폭발했는지를 도발적이면서도 유쾌하게 파헤친다.“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 드 보통의 통찰력이 만났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필력과 해박함을 두루 갖춘 저자는 거듭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천재의 발상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또한 천재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적절한 인용 등을 근거로 들며 한 도시가 어떻게 천재의 창조성을 진작했는지 분석할 뿐 아니라 창의력을 기르는 데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단초를 마련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부터 오늘날 실리콘밸리까지 어느 시대, 어떤 도시였던 간에 천재는 모두 균열 속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들이 활약한 분야는 제각각이었다. 에릭 와이너는 그 이유를 “나라에서 존경받는 것이 그곳에서 양성될 것이다”라던 플라톤의 말에서 찾는다.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속 도시들은 저마다의 대상에 경의를 표했다. 지혜를 우러러본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숭상한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 거장들이 등장했다. 실용적 태도로 삶을 ‘개선’하고자 한 에든버러에서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흄 등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악기를 연주할 정도였기에 빈에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태어날 수 있었고, 커피숍이라는 지적 교차로에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기에 세기말 빈에서 근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실패를 끌어안기에 실리콘밸리에서 첨단의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천재들의 도시를 답사한 와이너는 천재에 대한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천재는 유전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독창성을 북돋우는 문화의 산물이므로 천재성은 사적 행위가 아니라 공적 참여라고.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면 한 천재를 길러내는 데는 한 도시가 필요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5-25

우리나라 풍수는 마음 편하고 자연 통하는 곳이 명당

오늘날 우리에게 풍수는 미신과 실용, 신비와 경험,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모호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가십성 TV 프로그램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무속인이나 도인을 섭외해 엘로드(L-rod) 막대기로 수맥을 찾거나 “땅의 형세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1천2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민족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풍수는 단순히 과학으로 극복해야 할 비과학적인 구례(舊例)에 불과한가. 한국인에게 풍수는 무엇이며 한국풍수의 정체와 특징은 무엇인가.‘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 그 실천과 활용의 사회문화사’(한길사)는 우리 시대의 ‘산가'(山家)로 불리는 저자 최원석 경상대 명산문화연구센터 교수갖풍수’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이다.저자의 주요 저서인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산천독법’이 우리 민족과 산의 관계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은 풍수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풍수 논문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은 최원석 교수는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에서 한국 풍수는 이른바 ‘생활풍수’이자 ‘마음풍수’라고 주장한다.저자는 “우리 민족에게 풍수는‘생활’과 밀접한 삶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살 만한 터전’을 가꾸는 일 자체가 풍수였던 것”이라고 설명한다.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풍수는 일종의 미신처럼 격하됐고 저자는 이러한 풍수 인식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풍수의 본모습을 밝히려 애쓴다. 각종 사료와 도판, 저자 본인이 직접 찍은 각종 사진을 활용해 한국풍수의 구체적 상을 밝히고 동아시아와 서구에서 풍수가 어떻게 연구되는지 소개함으로써 풍수의 학문적 가능성을 살핀다.저자는 8세기께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면서 지배층이 수도를 정하거나 왕궁, 왕릉을 조성할 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풍수를 내세웠다고 지적한다.예컨대 고려는 개성을 도읍으로 삼았으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서경인 평양이나 남경인 서울로 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좌청룡과 우백호에 둘러싸인 혈(穴) 앞 땅을 명당으로 여기는 논리를 배제하고 사람 사는 마을을 직접 가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산과 물이 적당히 있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저자는 “한국인은 풍수 논리에 삶을 끼워 맞추기보다 살아가는 방도로 풍수를 유연하게 활용했다”며 “부족하다 싶으면 보완해서 살 만한 터전으로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설명한다.그는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에 불교가 결합하면서 ‘마음풍수’가 됐다고 강조한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보살이 산천에 깃들었다는 관념이 퍼졌고, 마음이 편안하고 자연과 통하는 곳이면 명당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역설한다.저자는 이를 ‘자연과 마음의 만남의 미학’으로 요약하면서 “한국에서는 풍수에 역사, 사회, 문화, 사람, 환경이 녹아 있기에 그 자체만 따로 떼어내서는 실체를 볼 수 없다”고 역설한다.우리 풍수 문화의 정체성을 분석한 저자는 지리산 마을, 용인 묘지 등에 풍수를 어떻게 적용했는지 살피고 조선시대 주요 풍수 사상가인 장현광, 윤선도, 권섭, 이중환, 최한기가 설파한 풍수론을 소개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5-04

‘詩 중에 그림 있고 그림 중에 詩 있다’

그림 그리는 시인, 김주대(53) 시인의 문인화첩‘시인의 붓’(한겨레출판)이 출간됐다.김주대 시인은 1만3천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페이스북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5년 전,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방법을 물어물어 배워서 서툴게 문인화를 그리기 시작한 시인은 이제는 믿을 수 없이 정교한 붓질로 깊고 너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와 그림이 조화를 이룬 그의 문인화는 글과 그림이 각자 줄 수 있는 감동의 합, 그 이상을 불러일으킨다.이 책은 한겨레 신문에 ‘시인의 붓’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한 작품과 페이스북을 통해 근래에 발표한 작품 등 총 125점의 작품을 엮은 시인의 두 번째 시화집이다. 깨진 사발부터 길고양이까지, 명절 때 못 내려간 사람들이 밝힌 불빛으로 빼곡한 도시의 풍광부터 눈으로 뒤덮인 적막한 묵정밭까지, 시인의 내면과 세상만사가 교차하며 삶의 본질과 근원을 향한 질문을 던진다.책에 실린 문인화 125점의 소재는 매우 다양하지만 어떤 경향성을 보이기도 한다. 1부는 사시사철의 다정한 풍경을 담았다. 2부는 그릇, 연적 등 일상의 소품을 모았다. 3부는 어르신의 여러 모습을 통해 삶을 통찰한다. 4부는 해태, 석탑, 불상 등 우리나라 불교 미술과 공예를 시인의 눈으로 재해석했다. 5부는 어린아이와 동물을 통해 기쁨을 그렸다. 6부는 도시와 골목의 풍경을, 7부는 시인의 일상을 담았다.일찍이 김주대 시인의 시는 ‘우리 시단에 매우 드문, 격정과 성찰의 결속’(유성호 문학평론가, ‘감각과 기억과 서사의 미시물리학’,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란 평가를 받은 적 있다. 그의 문인화 역시 시와 마찬가지로 격정과 성찰의 사이를 오간다. 진솔하면서 인간적인 토로가 있는가 하면 내향적이고 반성적인 인내와 성찰이 공존한다. 역동적이면서 잔잔하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동시에 홀로 떨어져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 삶은 고마운 사람들과 미안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김주대 시인의 글과 그림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 말은 이런 그림과 글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제 그림은 문인화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애초에 시가 없었으면 그림이 있을 수 없는 거죠. 제게 그림은 시의 시각적 확장이에요. 시는 제 작업의 기본이자 최종 목적지입니다. 전업 화가들 그림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 그림이 그나마 인정받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시적인 발상’ 때문이라고 생각해요.”김주대 시인은 자신의 그림이 시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시에서 출발해 시로 도착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선 그림과 시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그림을 보면 시를 읽는 듯한 인상을 받고, 글을 읽으면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문인화는 그림과 시가 만나 창조한, 시인 특유의 새로운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시 중에 그림 있고, 그림 중에 시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의 묘리를 체험적 생활 화법으로 구현해내고 있다.‘시인의 붓’은 시와 그림이 서로 심미적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새 독자들을 맑고 고요한 중심으로 인도한다. 시란 말하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하지 않는 시라고 했던가. 그는 시를 통해 귀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그림을 통해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을 들려준다.한편, 김주대 시인은 상주 출신으로 1990년 ‘도화동 사십계단’(청사 출간)을 비롯, ‘꽃이 너를 지운다’(창비시선),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현대시학) 등 6권의 시집을 냈다./윤희정기자

2018-05-04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 ‘홀로코스트’

▲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제공‘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문학동네)는 이스라엘 문학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의 장편소설이다.지난해 영국 맨부커 인터네셔널상을 받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판된 소설에 수여하는 상으로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문학상이다. 영미권에서 노벨문학상 못지않은 권위를 자랑한다.‘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그로스만이 1986년 발표한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는 저자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홀로코스트가 남긴 트라우마를 다뤘다. 2014년 이스라엘에서 처음 출간돼 히브리어 전문 번역가인 제시카 코언 번역으로 2016년 영미권에 출간돼 영미권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작가를 마르케스와 귄터 그라스 급의 거장 반열에 올렸다.그로스만은 전작 ‘땅끝에서’, ‘시간 밖으로’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다. 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되기도 했다.1982년 첫 작품 ‘결투’를 출간한 이래 깊이 있는 지혜와 섬세한 감성,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소설, 논픽션, 희곡, 아동서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고,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이탈리아 발룸브로사상,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등 세계 유수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과감하게 작품으로 옮기며,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에서 작가는 도발레라는 이름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두 시간 남짓 펼쳐지는 그의 공연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낸다. 공연의 시작과 함께 소설이 시작되고 공연이 끝나며 소설도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하고 참신한 설정 속에서 그로스만은 시시때때로 농담을 섞어가며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의 근원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 개인의 비극에 유대인의 고통스러운 역사, 이스라엘 현실에 대한 풍자를 함께 녹여내 삶의 고통과 유머가 공존하는 희비극을 탄생시킨다.이스라엘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무대에 오른다. 이름은 도발레 G. 오늘 쉰일곱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찢어진 청바지에 금색 클립이 달린 빨간 멜빵으로 멋을 부리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다. “날씨가 좋아도 간신히 158센티미터”인 키에 갈비뼈가 무시무시하게 드러날 정도로 야윈 몸으로 무대에 올라선 도발레는 여러 테이블에 앉은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웃음을 사는 매춘부”라 칭하며 과장된 몸짓과 활기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그 관객 사이에 이 소설의 서술자인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가 있다.어린 시절 도발레와 함께 과외 수업을 받으며 아주 잠시 마음을 터놓는 우정을 나눴던 아비샤이는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발레를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발레가 불쑥 전화를 걸어 자신의 쇼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도발레는 때로 웃기는 농담을 하고 때로 관객을 조롱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그의 공연을 몇 번씩 봤던 게 분명한 사람들과 처음 온 사람들, 한때 그와 알고 지낸 사람들이 섞여 있는 관객은 처음에는 그의 농담과 조롱에 호응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도발레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는 열네 살 때 갔던 군사 캠프와 그후에 벌어진 개인사를 풀어놓기 시작하면서 공연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도발레의 공연을 통해 아비샤이를 포함한 관객은 도발레가, 아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돌봐주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뒤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래보다 왜소했던 그가 학교의 다른 아이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도 듣게 된다. 아비샤이는 자신이 알았던 사실(도발레가 괴롭힘을 당했고 자신이 그를 외면했었다는 것)과 몰랐던 사실(그가 부모로부터 학대당했다는 것)을 들으며 도발레와 함께 군사 캠프에 있었던 때를, 도발레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른 관객들이 공연에 불만을 표하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 그의 공연을, 그의 고통의 근원을 묵묵히 지켜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4-27

행복한 삶? 불행의 함정을 피하는 기술을 습득하라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했다. 그런데 행복과 멀어지는 건 왜일까. 더 나은 미래, 더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준다는 수많은 해답들이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그 답들을 따라 해도 내 인생이 그다지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왜? 한 가지 개념, 한 가지 법칙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조용히 생각의 변화를 일으킬 때다.‘불행 피하기 기술’(인플루엔셜)은 ‘불행’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52가지 생각의 도구를 제시한다. 저자는 스위스 출신의 경영학박사 롤프 도벨리다. 롤프 도벨리는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 경제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경영인, 냉철하고 능력 있는 투자가, 인기 있는 강연자다. 스위스항공 그룹 산하 여러 계열사에서 CEO를 역임하면서 경영인으로서 높은 성과를 냈다. 현재는 과학, 철학, 예술, 경제 분야에서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세계적인 지식 교류 커뮤니티인 월드마인즈를 운영하고 있다. 전작 ‘스마트한 생각들’과 ‘스마트한 선택들’은 전 세계 40여 개의 언어로 번역돼 250만 부 이상 판매됐다.냉철한 기업가, 능력 있는 투자가, 인기 있는 강연가, 전 세계를 누비는 지식인답게 롤프 도벨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오랜 질문에 대해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접근법을 제안한다.그가 소개하는 52가지 방법은 인생을 살면서 매번 빠지는 불행의 함정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생각의 도구들이다. 불행의 함정들은 이런 것이다.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실제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목을 매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소비를 하고, 내일은 물론 오늘의 일에도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과거를 분석하는 일 등등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도 이런 오류에 툭하면 빠진다.“좋은 삶은 돈이나 재능, 주변의 사람들과는 관계없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오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머리를 잘 쓰느냐에 행복이 달려 있다”라고 말하는 롤프 도벨리. 그가 말하는 ‘이 52가지 머리 쓰는 방법’은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져서 정작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오늘날의 시대에 필요한 ‘영리한 행복의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연습’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연습해보자./윤희정기자

2018-04-27

‘돈’에 관심 있는 모든 이를 위해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라 전해지는 17세기 튤립버블현상에서 최근 투자자들의 자금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암호화폐 뉴스에 이르기까지 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 왔다. 돈을 모으고 불리는 수단은 너무나 다양하고 돈이 유통되고 거래되는 경로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최근 출간된 ‘돈의 원리: 인포그래픽 경제 팩트 가이드’(사이언스북스)는 돈과 경제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경제 지식을 알차게 담은 경제 대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유, 작은 신생 기업이 재정적 실패를 겪는 가장 큰 이유, 과거 튤립버블과 최근의 암호화폐 급등 현상, 주택담보대출의 종류 등 우리가 일상에서 떠올릴 법한 사소한 궁금증부터 다양한 경제 뉴스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사상식을 두루 담았다.책은 영국 명문 출판사 돌링 킨더슬리(DK)가 기획했으며 전 세계 7 개국에서 번역·출간됐다. 화려한 인포그래픽에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복잡한 돈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사실 여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는 철저히 배제했다. 교과서로는 알 수 없는 경제 원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자 하는 청소년이나 경제 보는 눈을 키우고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려는 어른에게도 실용적인 가이드북이다.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나눠져 있다. 각각의 장은 ‘돈의 기초’, ‘영리 활동과 금융 기관’, ‘정부 재정과 공적 자금’, ‘개인 금융’이다. 부록으로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돈’장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 국내의 경제 전문가가 우리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풀어 설명한 장으로, 한국어판에서만 특별히 만나볼 수 있다.‘돈의 기초’장에서는 돈의 역사와 등장 배경, 근대 경제학의 등장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돈과 가치의 관계를 조명한 게오르크 지멜의 책 ‘돈의 철학’과 토머스 그레셤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화폐 법칙 등 화폐에 관한 여러 이론이 소개돼 있다.‘영리 활동과 금융 기관’에서는 시장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기업과 금융 기관의 경제 활동을 살펴본다. 기업이 자본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금융 상품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금융 기관은 어떤 식으로 돈을 활용해 운영하는지 탐구한다. 2012년 리보 스캔들을 포함해 주식 시장의 흐름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정부 재정과 공적 자금’장을 통해 정부가 한 국가의 경제를 통제하는 방법과 세금으로 재정을 관리하는 법을 알 수 있다. 성공적인 재정 관리를 위해 정부가 관리해야 할 것들과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 2012년 그리스 부도 등 재정 실패의 사례들도 담고 있다.‘개인 금융’장은 재산을 모으는 여러 가지 수단과 퇴직 생활 이후의 계획, 채무 이용 및 신용 관리 방법과 더불어 디지털 시대의 암호 화폐도 함께 다루고 있다. 주택 구입 자금 대출(mortgage)라는 단어의 유래와 원리, 그 종류가 세부적으로 설명돼 있어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준다. 자산 배분은 전략적인 조합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 개인 투자자에게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 등 모두를 위한 경제 조언도 제공한다.마지막으로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임현준 연구원이 ‘우리나라의 돈’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의 금융 기관과 기업, 조세 제도와 보험 제도 등을 정리한 글을 수록했다. ‘한국은행’, ‘금융 감독 체계’, ‘금융 기관’, ‘기업 회계’, ‘한국거래소’, ‘우리나라의 조세 제도’, ‘4대 보험’, ‘주택 담보 대출과 신용 카드’로 이뤄져 여덟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장을 통해 국내 경제 전문가가 정리한 우리나라의 고유한 경제 시스템을 알아볼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4-20

“암은 절망의 병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기회”

수필가인 김국현(63) 비지니스코리아 고문(전 한국지방재정 공제회 이사장)이 최근 암 투병기 ‘봉선화 붉게 피다’를 출간했다. 경북 안동 출신의 김 고문은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19회로 공직에 입문,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 행정자치부 인사국장, 의정관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김 고문은 지난 2006년 간암이 발병한 이후 병원 입·퇴원을 거듭하면서 느낀 생각과 체험을 바탕으로, 암으로 투병 중인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치료에 도움이 되고자 지난 투병생활을 책으로 엮었다. 그는 투병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지난해 6월 간암이 재발한 후 가평의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푸른 숲과 청명한 햇빛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공 예감으로 이곳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글 속에 담아두기로 작정했▲ 김국현씨다. 산방에서 느끼는 감정은 나날이 달라지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작지만 강한 호박벌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고하면서,“암은 죽음과 절망의 병이 아니라, 건강관리와 자기 사랑의 기회”라고 역설했다. 그는 또“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활환경을 변화시켜야 하며,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과 평안한 마음관리로 자연치유를 통한 면역력 보강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면서 “인생에 고난이 없으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없다. 시련이 있어야 기적이 온다. 시련과 실패가 있으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투병 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수필가로 등단해 두 권의 수필집을 펴낸 바 있다. 저서로서 수필집‘그게 바로 사랑이야’와 ‘청산도를 그리며’가 있으며, ‘인면와(人面瓦)의 미소’로 한올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와 산영수필문학회, 한올문학회 회원이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20

불가능, 그 상실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삶의 소소한 단면들을 깊이 있는 시어로 풀어내는 유희경(38) 시인의 새로운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오늘 아침 단어’(2011),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2017) 이후 쓰고 고친 66편의 시가 오롯이 담겼다. 이전 시집에서 탄생과 죽음의 시간을 넘나들며 형용 불가능한 감정을 정제해 보였던 유희경은 이번 시집에서 그 불가능성을 고스란히 수용한다.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관계의 불능성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인은 한순간 분명하게 나타나 감미로운 전율을 주지만 그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감각적 체험을 예민하게 포착, 적확하게 묘사해낸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우리가 놓쳐버리기 십상인 세계의 일면들을 시인 고유의 감각으로 섬세하게 풀어낸 결과다. 일상적인 풍경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가능성과 그 장면들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부분 /윤희정기자

2018-04-20

자연·삶에 대한 투철한 탐구와 모험

시인이자 산문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걷기와 산책, 여행을 주제로 집필한 다섯 편의 에세이를 엮은 ‘달빛 속을 걷다’(민음사)가 출간됐다.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거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항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억압적인 국가 체제와 배금주의를 초월하고자 했던 ‘진정한 자유인’ 소로가 남긴 이 다섯 편의 에세이에는 이제껏 ‘월든’의 저자로만 알려졌던 그의 다채로운 면모와 웅숭깊은 사유가 가득 담겨 있다.소로는 평생의 친구이자 초월주의를 함께 주도했던 랠프 왈도 에머슨과 동일한 이상을 공유했으나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갖위대한 실험’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2년 2개월 2일 동안 월든 호숫가에 머물며 완전한 자유와 자족적인 생활을 직접 성취해 보인 ‘월든’을 비롯해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해 투옥까지 불사하며 써 내려간 ‘시민 불복종’, 세속적인 부와 덧없는 명예를 경계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반추한 ‘원칙 없는 삶’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사상과 작품은 그의 삶과 경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달빛 속을 걷다’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도 소로의 섬세한 관찰, 투철한 탐구, 거침없는 모험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자연과 매번 아름다운 풍경과 사색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계절의 변천, 신의 지문이 깃들어 있는 동식물의 경이로운 생태, 그 모든 것에서 취할 수 있는 감동과 깨달음을, 소로는 생생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전해준다. 더불어 사회 혁명과 의식 전환이 횃불과 유혈로만 가능한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마주하는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고, 심지어 별다른 생각 없이 나선 산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뤄질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준다.‘달빛 속을 걷다’에는 표제작을 필두로‘걷기’, ‘가을의 색’, ‘겨울 산책’, ‘하일랜드 등대로’가 차례로 수록돼 있다.먼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낮의 세계’와 대비를 이루는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밤의 세계’를 다룬 ‘달빛 속을 걷다’에는 한평생 소로가 탐구했던 대자연의 위대한 잠재성, 그것을 발견해 내야만 하는 당위성이 시적인 문체로 담겨 있다. 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격화된 삶을 대변하는 낮만을 찬양하며 밤의 어둠과 모호성을 두려워하고 멸시하지만, 실상 밤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심오한 영역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잠재력까지 일깨워 준다고 설파한다.이어지는 ‘걷기’에서는 소로의 강도 높은 문명 비판을 시작으로 속되고 천박한 세태에 대한 저항이자 실천으로서의 ‘걷기’가 다채로운 예와 함께 다뤄진다. 소로는 진정한 ‘걷기’, 즉 자연과의 참된 ‘교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스스로 십자군이 돼 맞서 싸우겠다고(“걷는 동안 우리는 성지를 지키는 십자군이 된다.”) 의연히 다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걷기’는 우리가 물질 너머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간단하며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을의 색’과 ‘겨울 산책’에서는 각기 다른 계절의 정경이 병풍처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로는 ‘가을의 색’에서 미국의 가을을 수놓은 다종다양한 초목들을 들여다보며 신세계(미국)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무용한 것의 유용함을 역설하며 한낱 미물에게도 저마다 생명력과 인간이 숙고해 볼 만한 진귀한 가르침이 있음(“가장 보잘것없는 식물이라도 충실하게 관찰하면 머지않아 독특한 가을의 색을 띨 것이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겨울 산책’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겨울은 ‘죽음과 침묵의 계절’(“달력에 겨울은 바람과 진눈깨비를 맞으면서 외투를 여미는 노인으로 그려져 있지만, 겨울은 명랑한 벌목꾼이나 혈기 왕성한 젊은이처럼 보인다.”)이 아니라 주장하며 얼어붙은 대지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의 강렬한 약동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여 준다. 그런 한편 소로는 엄혹한 계절이기도 한 겨울을 관조하며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바를 열심히 새겨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끝으로 조금은 이색적인 ‘하일랜드 등대로’에선 소로가 지닌 ‘자연 과학자’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녹록하지 않은 바닷가 환경에 겨우겨우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같은 해안을 바라보더라도 이방인과 주민의 관점은 서로 아주 다르다. 이방인은 폭풍우 치는 바다를 찬양한다. 그러나 주민은 그 장면을 보면서 가까운 친척의 조난을 떠올린다.”)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만만하지 않은 등대 운영과 그것에 의지해 항해하는 뱃사람들의 애환, 이들의 생존에 무관심한 정부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가치관과 관심사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13

페미니스트 나혜석, 10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신간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은 한국 근대 페미니즘 작가 나혜석(1896∼1948)의 자전적 에세이다. 열일곱 편의 소설, 논설, 수필, 대담을 가려 뽑고 현대어로 순화한 이 책은 나혜석의 삶을 나혜석 자신의 글로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보다 나은 독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장영은 성균관대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가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해설을 덧붙여 이해를 도왔다.나혜석의 논설은(논설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인터뷰 역시) 지금 영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봐도 전혀 낡지 않았다. 약 100여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나혜석에게 글쓰기는 ‘은밀하고 사적인 취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여성들과 소통하며,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우려 했다.“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黃鈺) 사건, 구미 만유 사건, 이혼 사건, 이혼 고백서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신생활에 들면서’에서나혜석이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이었으나 희대의 스캔들에 휩싸여 35세에 이혼한 후 고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많은 글을 남겼으며, 논설과 문학을 넘나드는 문필 활동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관에 도전했다.이 책은 5부로 구성됐다. 1부에는 소설을, 나머지 부에는 논설, 수필, 인터뷰, 대담을 가려 뽑았다.각 부의 말미에는 나혜석과 함께 이광수, 김기진, 김억 이렇게 네 명의 문인이 1930년대 당시 미혼 남녀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풍조를 비평하는 ‘만혼 타개 좌담회’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윤희정기자

2018-04-13

조선의 마지막 유의, 석곡 이규준 삶·정신 조명

“내 삶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세 가지 있었다.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스승을 얻지 못한 것, 조선말, 혼란기에 태어난 것이 내 삶을 끌고 왔다.”조선말 실학자이자 한의학자였던 석곡 이규준(1855~1923) 선생의 애국 애민 정신을 소설로 풀어낸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동화작가 김일광이 펴낸 역사소설`석곡 이규준-백성을 섬긴 마지막 유의`(내인생의책)는 석곡 이규준이 10세 때이던 1865년부터 1923년 조선의 마지막 유의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과정을 문학적인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했다.원고 1천매 분량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말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나 1923년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났던, 그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았던 이규준의 가난과 궁핍함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는 의술을 펼쳤던 유의(儒醫·유교 교리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통해 의술을 펼치는 의사)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작가는 석곡의 삶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노력했으며 뜻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몇 군데 한자를 함께 적기도 했다. 또한 석곡의 전문적인 유학 사상이나 한의학의 전문 지식은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석곡 이규준이 100년 전 역사적 혼란기를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갔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방해할 것을 우려해 향토사학자 황인, 석곡도서관의 서형철과 함께 석곡의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관련 학계 학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8년 여전부터 유학 관련 책과 여러 글을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학회를 빠짐없이 찾아다닌 끝에 작품을 탄생시켰다.또한 이규준의 제자였던 석재 서병오 기념관이 있는 대구를 비롯해 부산 등지를 방문해 이규준의 포항 뿐 아니라 영남지방의 대 실학자로서의 면모까지 치밀하게 묘사했다.무엇보다도 그는 이규준이 가난 속에서도 독학으로 천문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氣) 철학과 양명학에서 깨달음을 얻어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 근대 한의학의 서곡을 울렸지만 그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규준의 학문과 정신을 재조명한다.이규준이야 말로 백성들의 생명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다간 숨은 영웅이라는 것. 아울러 선생의 염담허무(恬淡虛無·마음을 편히 하고 담담하게 하며 비우고 없애는 것) 정신이 오늘날 혼란한 시대와 고단한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석곡 이규준소설은 선생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갯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논밭으로 나갔으며 밤에는 골방에 찾아들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는 한편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 나는 처지를 알고 어렵게 익힌 학문을 자신의 부귀를 위해 쓰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 병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석곡의 모습을 그렸다. 곤궁함을 에너지로 삼아 삶의 완성을 끌어낸 석곡의 투철한 애민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황원덕(동의대 한의과대) 교수는 서평에서“석곡 선생은 유교의 경전인 `십삼경`을 주소하고, 이를 요약하여 `석곡심서` `경수삼편`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께서는 삶을 통해 자연이라는 생명체가 나와 한가지니, 나를 사랑(仁)하고 용서(恕)하듯이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라는 사상을 보여주셨다. 특히 수기이경(修己以敬)을 강조하셨는데, 사랑과 용서에는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中), 상대를 대할 때는 과(過), 불급(不及) 없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타나야 만물과 내가 하나 될 수 있다(和)는 말이다. 이런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때(誠) 비로소 시비가 없어지고 국가와 사회가 온전히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고 적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