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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 파워엘리트들, 수십 년간 오지서 행정능력·리더십 증명

‘중국의 파워엘리트’(한길사)는 오늘날 중국을 이끄는 파워엘리트들이 어떻게 선발되고 단련됐는가를 자세히 분석한다.책은 2017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 정치국원으로 선출된 25명과 영부인 펑리위안, 퇴직하고도 국가 부주석으로 복귀한 원로 권력 왕치산, 군 최고의 강경파 리쭤청, 시진핑 주석의 문담 허이팅, 최고인민법원 원장 저우창 등 30명을 다룬다.중국 공산당 당원 8천800만명을 이끄는 정치국원 25명에게는 ‘영도자’ 칭호가 붙는다. 그 위에는 상무위원회 소속인 상무위원 7명이 있다. 상무위원회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이며 시진핑 주석도 이 중 한 명이다.중국은 예비간부 제도를 통해 미래의 국가 지도자를 양성한다. 예비간부로 낙점된 사람은 5년 주기로 공산당 중앙학교 청년간부 양성반에서 3개월 이상 연수를 받아야 하며, 이들은 오지로 가 행정능력과 리더십을 증명해야 한다.정치국원 25명은 이런 혹독한 과정을 거치며 이들 중 혁혁한 성과를 올린 7명만이 상무위원에 오른다.제19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 최고 지도부로 선임된 상무위원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통과한 인재들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5년을,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13년을, 리잔수(栗戰書)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40년을, 왕양(汪洋) 부총리는 26년을, 한정(韓正) 부총리는 42년을, 자오러지(趙樂際) 당 기율위 서기는 32년을 지방에서 근무하며 행정을 익히고 스스로를 담금질했다.저자는 중국공산당이 인권, 민주주의 등의 문제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내부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은 이처럼 배양되고 단련된 파워엘리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저자 최형규씨는 중국 관련 콘텐츠를 생산하는 인터넷매체 ‘차이나랩’ 베이징본부장으로 20여 년간 중국에 체류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10-19

이케아 피플… 소비 욕망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삶

2014년‘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에 장편소설‘청춘 파산’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의경(40)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쇼룸’(민음사)이 출간됐다. 등단작‘청춘 파산’을 통해 김 작가는 관념이 아닌 실재로서의 신용불량자, 파산자를 그려내며 한국문학에 낯설고 새로운 서사를 선사했다. 첫 번째 소설집‘쇼룸’을 통해 물건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삶,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자발적이고 성실하게 소비의 노예가 돼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묘파한다. 계란절단기나 레몬즙짜개, 크노파르프 소파와 헬머 서랍장, 이케아와 다이소, 고시원과 전세 보증금으로 확인 가능한 얇고 슬픈 정체성. 소설집의 제목인‘쇼룸’은 빛나는 대상을 향해 소설 속 인물들이 지니는 투명한 욕망을 아우른다.‘합리적인 가격의 조립식 가구’의 대표적 브랜드 이케아는 김의경의 소설집 ‘쇼룸’에서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쇼룸’속 등장인물들의 소비는 더 높은 가격대의 고급 가구 브랜드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케아 단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머무르는 이들의 양상이 전부 비슷한 것은 아니다. 김의경이 그리는 이십 대, 청춘은 이케아 피플 중에서도 위축돼 있다. 수록작 ‘이케아 룸’의 ‘소희’는 열여덟 살 연상의 유부남과 연애 중이다. 또래 남자를 사귀는 친구들이 선물로 “목도리나 싸구려 목걸이”를 받을 때 자신은 “해외여행 혹은 오피스텔”을 받는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오빠’와의 관계를 정당화하지만 그 관계에서 선물이 아닌 바로 자신이 “싸구려”라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오빠가 마련해 준 공간이 있지만 그곳에서 소희는 오빠의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케아 소파 바꾸기’의 사라, 미진, 예주는 ‘가장 싼 것’을 찾아 이케아를 헤맨다. 그들은 19만9천원짜리 소파를 사지 못하고 9만원짜리를 산다. 1만4천900원짜리 스탠드를 내려놓고 5천원짜리를 담는다. 자본은 없고 시간뿐이므로, 그들의 존재증명은 기다림과 최저가 상품으로만 가능하다. 작가에게 이케아는 청춘이 지닌 애매하고 불안한 공기까지 포착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공간이다.김의경의‘두 사람’들은 로맨틱하기보다 이코노믹하다. 소비의 규모와 경제적 가능성이 그들의 관계를 좌우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 ‘물건들’의 연인은 결혼식과 혼인 신고를 생략하고 동거를 한다. ‘세븐 어 클락’의 부부는 파산 이후 집 안에 오래 놓고 쓸 가구를 일절 들이지 않는다. 작가 부부가 등장하는 ‘쇼케이스’에서 남편인 태환은 아내인 희영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자신은 글쓰기를 미루고 정육점에서 일하며, 그들은 결혼식과 출산을 무기한 연기한다. 결혼식, 출산, 내 집 마련 등 구매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을 멀어지게 하고, 아주 작지만 가능한 소비는 그들을 가까워지게 한다. ‘쇼케이스’와 ‘세븐 어 클락’의 부부는 몇 년 만에 필요한 가구를 사기 위해 이케아에 간다. 함께 가구를 고르는 순간만큼은 서로를 부부라고 인식한다. 삶에 대해, 옆에 선 타인에 대해 증오와 권태와 연민이 뒤섞인 채로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살아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10-12

당신도 결정 장애인가요?

인간이 하루종일 내리는 결정이 최대 2만 건이라고 한다. 이중 망설이다 아무거나 고르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옳은 결정보다 중요한 건 ‘후회하지 않는’ 결정, 아닐까.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다’(문학동네)는 직업 선택부터 인간관계까지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선택의 상황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실전 기술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독일의 인기 저널리스트이자 인지심리학 전문가인 요헨 마이는 흥미롭고 공감 가는 생활 밀착형 사례를 통해 우리가 왜 결정 내리는 일을 어려워하는지, 무엇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자세히 제시한다. 또한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조정하는 다양한 결정 기법을 소개한다. 18개 장에 걸친 세세한 가이드는 우리의 결정력을 자연스럽게 키워줄 것이다.프랑스 철학자 뷔리당이 소개한 당나귀 일화가 있다. 굶주린 당나귀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다니다 두 개의 건초 더미를 발견했다. 둘 다 양이 비슷해 보였다. ‘좋아. 그럼 더 가까이에 있는 건초 더미를 고르자.’ 그런데 둘 다 거리가 비슷했다. 그렇게 망설이느라 몇 시간이 흘렀고, 결국 당나귀는 건초 더미 사이에서 굶어 죽었다. 결정 내리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사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우리의 뇌 때문이다. 뇌는 합리화에 능하다. 설령 선택의 오류를 깨닫는 경우에도 오류를 시인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게 상황을 합리화하는데, 이를 가리켜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라고 한다. 원래 지니고 있는 견해와 지각에 어긋나는 상황을 참기 힘들어하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어떤 정보들을 대할 때 우리가 이미 가진 이론이나 의견을 뒷받침하는 부분만 편향적으로 수용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또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요인이다. 워싱턴포스트의 다음 실험은 일상의 확증편향이 우리의 시야를 얼마나 흐릿하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만 해봐도 수십 수백 가지의 의사결정 기법이 나오는 통에, 결정을 내리기도 전 벌써 혼란스러워진다. 요헨 마이는 전통적인 몇 가지의 결정 기법을 혼용하기를 권한다. 결정장애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찬반 리스트: 논지를 찬반 목록화해 비교하는 방식.· 프랭클린 리스트: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여러 개일 경우 장점만 나열해 비교해보는 방식.· 의사결정 나무: 운동 경기의 토너먼트처럼 대안을 두 가지씩 견주어보고 더 좋은 대안을 다음 라운드로 보내는 방식.· 의사결정 매트릭스: 선택지를 표식화해 점수를 매겨 선택하는 방식.· 모든 선택지를 목록화하기/ 딱 하나만 고려하기· 조각내기: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여러 개로 잘게 나눠 결정을 단순화하는 방식.· 최상의 경우/최악의 경우 분석하기· 시간여행하기: 내 선택은 10일 후 10개월 후 10년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방식.오류 없이 절대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가능할까? 요헨 마이는 단번에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상황에서 실수 없는 결정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방향을 가늠해보고, 가능성을 고려해보고, 관련성을 찾아내고, 실수로부터 배우면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모든 결정은 우리를 목표로 더 가까이 이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셈이다.결정이 어려운 이유는 사실 비슷하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대안이 더 좋을지, 무엇이 우리의 필요에 더 잘 맞을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상황에 딱 맞는 결정을 내리겠다며 고민만 거듭한다면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좋은 결정이든 나쁜 결정이든 결정의 순간이 나를 만든다. 결과를 바꿀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바꿀 수 있다. 그러니 명심하라. 결정이 온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걸!” _ 본문 299쪽/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10-12

‘대구문화와 함께하는 저녁의 시인들’출간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최현묵)은 오늘날 대구·경북에서 활동 중인 주요 시인들을 소개하는 ‘대구문화와 함께하는 저녁의 시인들’사진을 펴냈다. 첫 시집을 출간한 젊은 시인에서부터 시조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 시인들의 문학적 면모를 조명하는 이 책은 ‘지역 문학’의 과거가 아닌 생생한 현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송재학, 장옥관, 엄원태, 이규리 등 지역을 대표하는 중견 시인들을 비롯해 현장에서 교육시 운동을 이끌어 온 배창환, 농민 운동과 문학 활동을 병행해 온 이중기, 사투리 시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상희구, 그리고 박기섭, 이정환 등의 시조시인과 권기덕, 김사람, 정훈교 등의 젊은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총 22인 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대구문화와 함께하는 저녁의 시인들’은 시인별 자선시와 더불어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해설, 그리고 이들이 직접 밝힌 문학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1부 ‘노을에는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에서는 송재학, 안상학, 장옥관, 배창환, 권기덕, 김사람, 엄원태의 시 세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2부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 시간’에서는 박기섭, 이중기, 이규리, 류경무, 정훈교, 송종규, 장하빈을 소개한다. 3부 ‘저녁은 어떻게 환해지는가’에서는 상희구, 이정환, 노태맹, 류인서, 김용락, 서영처, 황성희, 김수상의 시와 이야기들이 수록돼 있다.아울러 책을 통해 권오현, 김광재, 김문주, 신상조, 박현수, 문무학, 신기훈, 김상환, 이숙경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의 해설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책의 내용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동명의 토크 콘서트를 통해 소개된 것으로, 지난 2년간 매월 저녁마다 펼쳐진 이 행사는 대구 지역의 문화예술 정보지인 월간 ‘대구문화’가 기획하고 이하석 시인이 예술감독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토크 콘서트를 통해 소개된 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편집해 수록한 것이다.책의 기획은 월간 ‘대구문화’가, 편저는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동원 시인이 맡았다.‘대구문화와 함께하는 저녁의 시인들’은 비매품으로 발간돼 대구 지역 주요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으며, 대구문화 디지털 아카이브(http://dcarchive.daegu.go.kr)를 통해 온라인 상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463쪽. 비매품.한편, 12일 오후 4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는 책의 발간을 기념한 문학 세미나도 개최된다. 이하석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세미나는 문학평론가 김문주 영남대 교수가 발제를 맡아 대구 시단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책의 편저자인 김동원 시인과 대구시인협회 회장인 윤일현 시인이 토론자로 참여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10-10

민담으로 본 현대인의 마음 세계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일본에 최초로 융 심리학을 소개하고 발전시킨 임상심리학자, 문화청장관 등을 역임하고 문학, 철학, 예술,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일본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가와이 하야오(1928~2007).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민담의 심층’(문학과지성사)은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는 인류 공통의 보편성이 있다’는 융 심리학을 바탕으로 민담 분석을 통해 현대인의 마음 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책이다. 1977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생의 처방전’이라는 애정 어린 별명까지 얻으며 일본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 책에서 가와이 하야오는 현대인의 복잡한 마음을 명쾌하게 풀어내며, ‘인간 삶의 진실’에 한층 더 다가간다.이 책은 ‘트루데 부인’ ‘헨젤과 그레텔’ ‘두 형제’ 등 대표적인 그림 동화 10편을 심리적 차원에서 분석하는데 그 순서는 태어나 성장하고 자기실현을 이뤄가는 인간 삶의 과정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특히 카를 구스타프 융의 이론에 기초해 그림 동화 속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 무대 설정, 도구와 숫자 등에 이르기까지 그림 동화 속 거의 모든 모티프와 상징을 흥미롭게 해석해낸다. 그 밖에도 ‘개구리 왕자’ ‘노간주나무’ ‘게으른 하인츠’와 같은 다양한 그림 동화와 ‘안주와 즈시오’‘삼 년 잠보’ 같은 일본의 민담, 이집트와 그리스 신화까지 수십 편의 민담을 예시로 활용하며 읽는 맛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목적은 개개인의 내적 체험에 비춰 민담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민담의 내용과 현대인의 심성을 이어주는 의외의, 하지만 생각보다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발견한다.민담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기대한 사람은 종종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게으름’도 그중 하나다. ‘실 잣는 세 여인’의 주인공인 게으름뱅이 여자아이는 실잣기를 지독히 싫어하지만 바로 그 게으름 덕분에 왕자와 결혼하게 된다. ‘게으른 세 아들’의 임금은 가장 게으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관해서 저자는 오로지 근면을 덕으로 삼고 일해야 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게으름에 대한 강한 소망을 품었을 것이고, 그러한 저마다의 소망이 이야기 속에 담겨 그 해학에 위로를 받았으리라고 추측한다. 나아가 심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게으름뱅이가 등장하는 민담은 효율 증대에 중점을 둬온 서양의 공적인 사고에 대한 안티테제이며, ‘게으름’이란 일종의 ‘퇴행’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새로운 창조를 이루기 위한 고도의 준비 상태라고 설명한다.뿐만 아니라 민담에서는 같은 행위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어느 주인공은 위험에 도전해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위험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한다. 혹은 불행해 보이는 사건이 나중에는 도리어 행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일반화가 불가능한 것은 바로 인간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이처럼 민담은 인간의 복잡한 마음속 세계를 압축해 드러낼 뿐 아니라 마음이 나아가야 할 길까지 보여주는 지도와도 같다. 들장미 공주는 왜 100년의 잠을 자야 했을까? 사자는 왜 한번 베어진 주인의 머리를 또다시 베었을까? 헨젤과 그레텔을 숲에 버린 어머니가 친어머니에서 계모로 설정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민담은 어떠한 물음에 대해서도 대답을 마련해두고 있다.” 다양한 민담과 분석심리학을 활용해 저자는 이처럼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하나씩 대답을 해나가며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저자는 심리치료를 해오면서 만난 내담자들과의 경험을 통해 민담 속 주인공과 내담자들이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다. 예컨대 ‘황금새’ 이야기에서 매일 밤 황금 사과를 하나씩 도둑맞는 장면은 일종의 노이로제 상태를 보여준다고 분석하면서, 황금새가 사과를 훔쳐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단념한다면 증상은 더 심해지지 않을 테지만 그 경우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노이로제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여우의 조언대로 황금새를 가져오는 게 상책이다. 물론 거기에는 위험도 따르지만 노이로제를 극복함으로써 얻는 보물의 가치는 고난의 시간에 비례해 높아질 것이다. 이는 자기실현 과정과 그에 따르는 고통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요점이다. 인간의 삶은 분명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민담에 선택의 테마가 자주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이 책은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국면들, 생로병사의 과정과 그에 동반하는 여러 과제와 고민들에 관해 실마리를 던져준다.저자는 융의 도식을 토대로 민담 분석을 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민담에는 어떤 특징이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저자는 읽는 이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도록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우리 의식 아래의 깊은 내면을 탐색하도록 이끈다. /윤희정기자

2018-10-05

선과 악이 공존하는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

“소설이란, 주제의 무게와 이야기의 재미가 함께 아우러져야 한다.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선과 악이 어우러진 어려운 주제와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를 잘 다듬어진 탄탄한 문장력으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엮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_김영현(제8회 혼불문학상 심사위원, 소설가)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전혜정(43) 작가의 장편소설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다산북스)이 출간됐다. 혼불문학상은 우리시대 대표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돼 1회 ‘난설헌’, 2회 ‘프린세스 바리’, 3회 ‘홍도’, 4회 ‘비밀 정원’, 5회 ‘나라 없는 나라’, 6회 ‘고요한 밤의 눈’, 7회 ‘칼과 혀’가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혼불문학상 수상작들은 한국소설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과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은 국민이 지지하는 장기 집권하는 대통령 리아민의 요청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박상호가 불려가 리아민 이야기를 듣고,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그의 말을 어떻게 ‘전기’로 재구성할지 고뇌하는 과정을 큰 줄거리로 한다.▲ 전혜정 작가. /다산북스 제공리아민 이야기에서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외할머니 손에 길러졌으나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대범함을 보여준 아이로, 청년 시절에는 불꽃 같은 첫사랑에 빠졌다가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략결혼을 택하는 냉혈한으로, 결혼 이후에는 다시 아내에게 순정을 바친 따뜻한 남편으로, 권력자인 장인에게 받은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청렴한 정치인 등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에게 아버지가 부재했기에 자신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포기했으며, 그 대신 “이 나라 국민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열망했다는 고전적인 수사를 늘어놓기도 한다.소설의 다른 한 축은 독재자 전기를 쓰려 하는 작가 박상호 이야기다. 소설 화자로 등장하는 그는 대통령 전기 출간을 발판으로 작가로서 명성을 단단하게 다지려 한다. 그러나 리아민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가식과 상투성에 싫증을 느껴 집필 욕구가 사그라들기도 한다.전혜정 작가는 2007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소설 ‘해협의 빛’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소설집‘해협의 빛’(2012)과 장편소설 ‘첫번째 날’(2018)을 펴냈다. /윤희정기자

2018-10-05

헤어짐이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심재휘(55) 시인이 4년 만에 새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문학동네)을 출간했다. 저자는 지난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해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중국인 안마사’ 등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제8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자는 현재 대진대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이번 시집에는 ‘기적’‘비와 나의 이야기’‘마음의 지도’ ‘풍경이 되고 싶다’‘먼길’등 3부에 걸쳐 53편의 시들이 실려 있다.이 시집은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들로 이뤄져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감정들도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우리와 닿아 있는 감정들이다. 특별한 기교 없이 진솔하게 써내려간 시어들은 그래서 읽는 이에게 스미듯 전달된다. 심재휘가 건네는 다정하고 따뜻한 서정의 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아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말이다.심재휘의 시에는 특히 자연물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일상이 물 흐르듯이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내다볼 멀리도 없이 제 몸을 핥는 꽃에게서/ 차례 없이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백일홍’), ‘오래 묵힌 음표들도 건들면 음악이고 썩어가는 낙과의 마음은 언제나 꽃이다’(‘다정도 병인 양’) 같은 시구들이 그러하다. 시든 잎들에게서 용서를 배우고, 썩어가는 낙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마음을 다해 그들을 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사물의 내면을 마주할 때, 시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새로 발견하게 한다.이번 시집에서 또 하나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시인은 ‘헤어짐이란 서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봉분이 있던 자리’) 말한다. 시인은 떠나고 사라지는 일의 슬픔보다 이별이 남긴 의미를 살핀다.“이별의 몸이 흥건한 땅바닥에서/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으로/괜히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나는 와 있는 것이다”―‘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부분시인은 ‘따뜻한 한 그릇의 말’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라는 말을 떠올린다. 시인은 그 말에서 동행의 의미를 발견한 듯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홀로됨을 숙명으로 타고난 게 사람이라지만 끝내 고독하지 않을 길을 담담히 가리킴으로써 자그만 희망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다만 오래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란다 아들아/먼 길을 가려면 아들아 너도/국수를 잘 먹어야지”― 심재휘 ‘먼 길’ 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28

방민호 서울대 교수 세번째 시집 ‘숨은 벽’출간

방민호(53)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 시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국문학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한국문학사 연구의 권위자인 동시에 1994년 제1회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평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이자 2001년 ‘옥탑방’등의 시로 월간문예지 ‘현대시’의 신인추천작품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장편소설 ‘연인 심청’‘대전 스토리, 겨울’과 단편집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등을 출간한 소설가이기도 하다.국문학 강의와 문학사 연구, 평론 집필과 시 쓰기 등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서 걸출한 업적 내기와 논리적 해석, 창의적 표현 작업을 부단히 하고 있는 그가 최근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냈다.그의 세 번째 시집 ‘숨은 벽’(서정시학)이 바로 그것.2015년 두 번째 시집 이후 쓴 정성스럽게 써내려 온 67편을 담은 이번 시집에는 서정시의 가장 근원적인 창작 동인이 시인 스스로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이자 질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시편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북한산 깊은 곳에 들어가면/ 바깥에서 안 보이는 숨은 벽 있다기에/ 늦가을 산속으로 들어갔어요/…/내 맘 속에 단단하고 높은 벽이/ 안개 속에 사라졌다 새로 보이듯/ 앞에 우뚝 다가서는 것이었지요/…”(‘숨은 벽’ 부분)표제작인 ‘숨은 벽’에서 저자는 머리를 찧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던 젊은 날 저자의 마음속 벽을 북한산 숨은 벽에 투영해 생성과 소멸, 빛과 어둠으로 표현했다.숨은 벽은 북한산의 등반 코스 중 하나인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있는 가파른 절벽을 말한다. 높은 봉우리 사이에 숨어 있어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회색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빛/ 흰 빛보다 검은 빛보다 순수한 빛/ 세상을 바닥까지 들여다본 이들만/ 늘 자기 곁에 숨겨두고 아끼는 빛/가장 견고한 것은 흘러다는 것/ 저 구름과 바람, 일렁이는 산안개/바닥 없는 세상 바닥 깊은 곳에/ 형체도 빛깔도 없이 머물러 있는 것/…”(‘포옹’부분)저자는 ‘포옹’에서 바닥 없는 세상 바닥 깊은 곳에 형체도 빛깔도 없이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견고하고도 유동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가장 슬픈 것이 한없는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역설을 포함하게 된다. 시인으로서는 이 투명하고 순수한 회색의 희망으로 견고하게 흘러다니는 고독과 슬픔을 견뎌가는 품을 보여주는 것이다.저자는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끌어안는 사람, 그 모든 당신들의 탐스러움을 노래로 옮기는 사람”이라며 “저의 시는 노래가 되고 싶어 합니다. ‘나’와 ‘당신’을, 생명을 잇는 숨결이 되고 싶어 합니다. 찰나를 영원에, 파편을 본체에 이어주는 목선이 되고 싶어 합니다”라고 말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해설을 쓴 유성호(한양대 교수) 문학평론가는 “학자이자 비평가인 저자는 창작에 열정과 적공을 부여하며 새로운 존재 전환의 과정을 부단히 치러가고 있다”면서 “이번 시집은 자기 확인과 갱신의 의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시간의 고백록으로서, 시인 자신이 통과해온 날들의 서시와 이미지를 통해 ‘시인 방민호’만의 생의 형식을 선연하게 구축해나가고 있다”고 평했다. 방민호 교수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현재 경북매일에 매주 금요일 에세이 ‘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28

일러스트레이터 배현선의 그림 여행기

‘예전에 다녀온 여행 사진 폴더를 들락날락하며 추억을 곱씹는다.’ ‘틈만 나면 항공권을 조회한다.’ ‘SNS에서 마음에 드는 여행지를 볼 때면 일단 구글맵에 저장하고 본다.’ 이중 한 가지라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미 당신은 여행 병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 환절기마다 불현듯 찾아오는 감기처럼 어느 날 문득 훌쩍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하던 일을 관두고 떠날 수도 없고 현실적인 여건은 늘 넉넉하지 못하다. 퇴사 후 세계 일주는 두렵고 막막하기만 할 뿐 나와는 먼 이야기로 들린다. 그럴 때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시간과 통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떠날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상의 ‘쉼표 같은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런 값진 순간을 나만의 기록으로 남겨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일상의 버팀목이자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돼준다. 그게 바로 우리가 떠나고 기록하는 이유가 아닐까.‘오늘부터 휴가’(앨리스)는 일러스트레이터 배현선의 그림 여행기다. 일상에서 쉼표가 필요한 순간마다 3일이든 일주일이든 짬을 내어 파리, 도쿄, 치앙마이, 교토 네 군데 도시를 5년에 걸쳐 틈틈이 다녀온 여행의 순간들을 기록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자연경관이나 포복절도의 에피소드,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길지 않은 휴가 동안 몸을 누이고 마음이 쉬어가는 여행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전한다. 가령 교토의 한 카페를 서로 다른 계절에 다른 동행인과 다녀오기도 하고 일상의 연장선상에서 여행을 일상처럼 보내기도 한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책장을 넘기면 색연필의 포근한 질감이 살아 있는 소박하고 따뜻한 그림들이 지은이의 발길과 눈길이 닿은 여행지의 풍경이 이러했노라고 속삭이듯 전다. 때로는 친구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 때로는 내 이야기를 옮긴 듯 읽다 보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그런 다정한 여행기다.소소한 일상과 디자인 스튜디오 ‘3MONTHS’의 작업을 꾸준히 인스타그램(@baehyunseon)에 올리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응원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배현선은 색연필 그림으로 여행지에서 느끼는 행복을 그대로 이 책에 담았다.스물다섯이 되던 해, 작업한 그림 값을 받고 떠난 첫 여행지 도쿄. 소울메이트와 동행한 사랑과 낭만이 묻어나는 파리. 혼자서 또 가족과, 친구와 다녀온 마음의 안식처 교토. 계절의 틈새를 뛰어넘는 이색적인 치앙마이 등 지은이는 각기 다른 네 도시의 색깔을 고유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도시별로 구성된 각 챕터 마지막에는 여행지에서 즐겨들었던 노래를 소개해 여행의 여운을 안긴다.“여행을 다녀온 뒤에 달라지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나 생각만은 아니다. 경험은 삶의 다양한 부분을 변화시킨다. 때때로 궁금하다. 다음번 여행을 마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떤 것을 좋아하게 되고, 또 어떤 것을 싫어하게 될까?”(163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28

귀향길 짐꾸러미 한편의 책, 긴 여행길 친구되어…

어릴 때는 모든 일에 형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안 대소사뿐만 아니라 명절에 장만해야 하는 음식도 허례허식이라 여겼다. 살다보니 형식이 내 삶을 좌우하고 있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걸을 때와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을 때 내 몸짓은 분명 차이가 난다. 누가 보든 안보든 옷이라는 틀이 내 동작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식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책은 가까이 있어야 읽는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라도 옆에 둬야 한다. 거실 소파에 가을학기 독서회에서 함께 읽는 두툼한 책과 머리 식힘용 만화책이, 식탁에는 그림책과 여행기가 침대머리맡에는 속도감 있는 추리소설이 놓였다.칸트는 늘 오후 3시에 산책을 나갔다. 동네사람들은 칸트가 지나가는 시간에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딱 두 번 지키지 못했다고 하니 한 번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또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러니 이번 추석 귀향길 짐 꾸러미에 여기 소개하는 몇 권의 책을 넣어 긴 여행길이 짧게 느껴지길 바란다.△‘노 임팩트 맨’(콜린 베번 지음)일 년 동안 지구에 민폐 안 끼치고 살기를 실천한 뉴요커 이야기이다. 절대 뉴욕을 떠나지 않고 누릴 것은 충분히 누린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요즘 커피숍에서 종이컵 사용 않기 운동을 보면서 이런 운동을 먼저 실천한 콜린 베번의 선구자적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부인과 어린 딸과 개 한 마리랑 살면서 쓰레기 하나도 만들지 않기, 전기 사용하지 않기, 교통편 이용하지 않기, 새 물건 사지 않기, 우리고장에서 나는 로컬 푸드만 먹기, 물을 아끼고 오염시키지 않기, 사회에 환원하기. 이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해서 시작한 일이다.결심한 첫날 아침, 딸이 침대에서 뛰는데 기저귀가 새고 콧물은 흐르는데 코를 풀 수가 없다. 어쩌면 좋은가.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하고 있는 또 할 수 있을 것 같은 해 봐야 할 것들을 책 앞장에 적어보았다. 되도록 중고책 사기(2년 넘게 노력 중), 텀블러 들고 다니기(가끔 까먹기도 함), 일주일에 하루 차 두고 나가기(두어 번 하다 못 함), 물 안 사먹고 수돗물 마시기(남편은 사들이지만 나는 끓여먹는 중),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설거지 빨래하기(실천 중), 손 씻고 냅킨 대신 손수건 쓰기( 잘 들고 다님). 지구에 쓰레기 남기지 않는 노 임팩트 맨이 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다.이 책엔 한국이 자주 등장한다. 무지 반갑다. 두부 만드는 아저씨, 조계종의 스님이야기 등. 글쓴이는 아재개그를 하며 작은 위트로 나를 웃기려 한다. 그 중 ‘우리 둘 중 누구 팔뚝이 더 굵은지’는 어떤 영어를 이렇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읽다 말고 영어선생님에게 물어봤다. 밑줄도 많이 긋고 접고 하면서 내가 지구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었다.△‘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이다. 로맹가리의 가리는 ‘태우다’란 뜻이고 에밀 아자르의 아자르는 ‘굽다’라는 뜻이란다. 자신의 생을 태우고 굽다가 다 표현했다고 느낄 때 자살해버렸다.소설의 주인공 모모는 우리가 불렀던 노래에 등장한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인생은 사랑 없인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만든 것이라니 소설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모모를 키운 것은 보모 로자 아줌마와 아래층의 하밀할아버지, 그리고 늘 함께 한 인형 아르튀르였다. 하밀 할아버지 입을 통해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겹쳐진다.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로맹가리는 비굴하지 않게 유머 있게 촌철살인으로 써 내려갔다. 러시아 출생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성장소설이다. 콩쿠르상을 받은 로맹가리가 다시 신인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4권의 책을 출판해서 세상은 새로운 천재작가가 등장했다고 환호성을 높였다. 그의 유작을 통해서 세상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접다가 했더니 책이 불룩해져버렸다. 작가는 책 속에서 첫 질문으로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묻는다. 그 대답은 마지막 문장에 나와 있다. 확인해보시길.△‘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이 작가 글 쓰는 태도 완전 마음에 든다. 약간은 삐딱한 유머와 센스를 장착한 천재작가이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의 영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던가. 유발하라리는 아마 1%의 영감을 100%로 발휘하는 사람이다.사피엔스들이 살아온 시간들을 600쪽 넘게 서술해놓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무척 위로 받았다. 사람은 뒷담화하며 언어가 발달했다. 오호 그랬어! 흉보는 일이 재밌는 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어, 본능이었던 거야. 음 하하하! 입이 등장한 것은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데도 사용한다. 람보는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 먹는다고 말한다. 가끔 이렇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인간의 큰 특징인 직립보행이 우리 여성에게 큰 역경이었다. 똑바로 걸으려니 엉덩이가 좁아져 아기가 나오는 산도가 좁아지고, 아기 머리는 점점 커져서 자연선택으로 이른 출산을 선호하게 됐다. 많은 포유동물이 태어나자마자 걸을 줄 아는데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다. 여러 해 육아를 해야하니 출산과 육아를 독박한 여성에게 제일 가혹한 시스템이다.사피엔스는 천재 유발 하라리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아라비아인들은 인도인이 만든 숫자란 것을 세계 사피엔스들에게 전해주었으면서 정작 본인들은 다른 숫자를 사용한다고 하니, 아~오묘한 사피엔스들이여!△‘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엘리자베스 키스 지음)그림책이다. 1920~1940년의 우리나라를 그린 귀한 자료가 담겨있다. 화가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사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행을 했고 명승지를 찾아 건물과 풍경화를 그렸다.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가장 난처한 일은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를 펼쳐놓으면 서양 여자 화가를 보려고 순식간에 몰려드는 구경꾼들이었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갔다가 해뜨기 전 새벽에 다시 그림 그리러 나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서울의 동대문, 세상에 모자란 모자는 다 있다는 가게, 남자와 쥐들만이 출입하는 주막, 연날리기, 장기 두기, 훈장님보다 반장이 회초리를 들고 설치는 서당, 그 시절의 우리네의 일상생활이 그림 속에 펼쳐진다.가장 인상 깊었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내 가슴이 아프다. 여자 애들은 어떤 때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태어난 순서를 이름 대신 부르기도 한다는 것. 아기를 업은 여자아이의 이름은 영어로 ‘sorry’ 즉 우리말로 섭섭이였고 그 집안에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나서 식구들 모두에게 섭섭한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릴 때부터 남자보다 못한 존재라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그는 우리 한국인의 자질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라고 한다. 끌려가는 한국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고 썼다. 한국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책 곳곳에 느껴졌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지음)고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단시간에 몇 백 장의 그림을 그렸다. 병명은 하이퍼그라피아라 부른다.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한 해에 몇 편의 소설을 써 낸다. 그러함에도 일단 첫 장을 펼치면 끝까지 읽어야 할 만치 재미있는 스토리와 마지막 장까지 반전의 반전을 숨겨두는 치밀함을 잃지 않는다.이 책을 읽으며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다.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이고 제목이 여러 개 나오니 찾아 듣게 만든다. LP 음반을 사서 듣던 세대였고 DJ 오빠에게 쪽지로 비틀즈의 노래를 신청하던 음악다방 단골이었던 빠순이의 추억이 자꾸만 모락모락 거렸다.‘특별한 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 알아봐준다.’ 중학생 독서회 아이들과 책 속의 이 구절을 읽고 자신의 특별한 빛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자고 했다. 아버지에게서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다울인 축구 탁구 농구 다 잘 한단다. 이 녀석은 공부도 반에서 1~2등이다. 또 찬이는 정리의 달인이란다. 책상부터 노트정리까지 깔끔하기로 반 친구들이 인정했다. 진근이는 수학과 피아노에 재능이 있단다. 혁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민아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니 친구들이 키도 크고 외모도 빛난다며 추켜세워 줬다.아이들이 내 특별한 빛은 무어냐 물었다. 나는 친구가 많다고 했다. 어디서나 친구의 도움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했더니 그것도 재능이 되겠다고 했다. 오늘 친구들이 차를 마시자해서 나가니 태국 갔다 온 현선씨가 스카프를 내민다. 창순씨는 책이 두 권 생겼다며 한 권 나눠 줬다. 며칠 전 은규샘이 여행 후 전리품이라며 망고 양초 잼을 건넸다. 가슴한쪽이 간질간질하다. 나도 저들에게 특별한 빛이 되도록 오늘도 반짝여야겠다.※김순희 수필가 프로필-2016년 산문집‘작가와비작가’ 출판-포항수필사랑회원-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경상북도교육청문화원 독서회 강사/김순희 수필가

2018-09-21

“겨우내 참아오다 기어이 터졌어라”

“겨우내/ 참아오다/ 기어이 터졌어라// 그립다/ 다 못하여/ 발개 타는 저 볼 보소//속울음/ 얼마나/ 울어/ 저리 온통 뱄을까.//”(김락기 단시조 ‘복사꽃망울’)경북 의성 출신의 시조시인이자 자유시인인 산강 김락기 시인이 최초의 단시조집 ‘봄날’(도서출판 한아름)을 펴냈다. 저자의 창작집으로는 8번째 책이다.저자는 계절에 앞서 출간하게 된 ‘봄 날’시조집에 대해 운율 넘치는 단시조 ‘봄날의 변명’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봄날이 그리워서//다사로운 볕살 아래/꽃 피는 날 그리워서//시삼동/넘기도 전에/‘봄 날’ 먼저 나왔네.//”천년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 시가인 단시조는 시조 가운데서도 핵심적 정수라 할 수 있다. 단시조는 45자 내외의 1수로 1편이 되는 시가다. 3장 6구 12소절로 이뤄진 1편 안에 미립자에서 대우주까지 삼라만상을 다 담을 수 있다. 그런 주옥같은 단시조 89편을 모은 시조집이다.문학평론가인 신연우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산강 선생의 시조야말로 우리에게 일상에서 죽어 있던 것들이 사실은 신비한 것, 놀라운 것들임을 알려주는 따뜻한 속삭임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 속삭임으로 우리는 꽃을, 달을, 폭포를, 얼굴을, 세월을 새롭게 보고, 듣고, 만진다. 독자가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고 평했다.저자는 문학청년 시절부터 시조와 자유시를 써 왔으며, 시조시인 겸 자유시인으로서 저널리즘에 문예 및 시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문인이다. 시조시인 단체로 최초의 사단법인인 한국시조문학진흥회의 제4대 이사장(2014년∼2016년)을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이사장이다. 온 국민에게 시조를 보급하고(시조의 범국민문학화), 세계인에게 시조를 알리는 일(시조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김락기 시인특히, 이 책은 저자가 캘리그라피(제자題字), 표지화, 레이아웃, 디자인, 편집 등을 손수 다하는 등 1년 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발간된 것이다. 그만큼 저자가 내용면에서뿐만 아니라 편집, 제작에 공을 들인 작품집이다. 저자는 시조문학 편집장을 거쳤으며. 디자인 공부를 했고, 문인화로 2008년 제27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선한 바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한 면에 단시조 한 편이 수록될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문고판 수준)로 제작됐다. 누구나 쉽게 포켓에 넣거나 휴대할 수 있도록 해 우리 시조를 늘 가까이에서 쉽게 보고 읊고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책 뒤에 실린 후록부문 한자어에는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 토를 달았다.판매는 여건상 서점에 배포하지 못하고, 저자가 관리하는 발행처(사단법인 한국시조문학진흥회: 010-8960-8689)를 통하거나 제작처(도서출판 한아름: 02-2268-8188)에서 보급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14

젊은예술가,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동경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정신적인 삶. 바로 이것이 대영박물관 깊숙한 곳에 있는 나와 다른 외로운 방랑자들이 스스로를 바쳐야 하는 삶일까? 언젠가 우리를 위한 보상이 있을까? 우리의 외로움은 걷힐까? 아니면 정신적인 삶 자체가 그것에 대한 보상일까? ”_‘청년 시절’94쪽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맥스엘 쿳시(78·J. M. Coetzee)의 자전 장편소설 ‘청년 시절’(문학동네)이 번역돼 나왔다.작가 나딘 고디머와 함께 남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쿳시는 평단에서 “종달새처럼 날아올라 매처럼 쳐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쿳시 자전 장편소설 3부작은 ‘우리 시대 가장 과묵한 작가’로 불릴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쿳시가 자신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잔인할 만큼 솔직한 서술과 절제되면서도 폭발적인 문장으로 쏟아낸 회고록이자 소설이다. 3부작 중 두번째인 ‘청년 시절’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혼란에 빠진 남아프리카를 떠난 쿳시가 런던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십대 시절을 다뤘으며, 국내 초역이다.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동경과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휘젓는 모든 감정과 딜레마를 그려냈다. 쿳시의 실제 ‘삶’과 소설적 ‘허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을 향해 치밀하면서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청년 시절’에 나오는 존의 삶과 작가의 실제 삶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청년 시절’에서 존은 결혼하지 않고 ‘영혼의 불꽃’을 알아봐줄 여자를 찾아 시의 영감을 찾아 런던에서 방황하다가 또다른 ‘시인의 나라’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쿳시는 런던 IBM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 결혼을 한 뒤 다시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1965년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청년 시절’에는 작가의 실제 삶과 소설적 허구가 뒤섞여 있다.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기로 거의 ‘전설적인’ 쿳시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냈을 리가 없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 속 내용이 ‘작가의 실제 삶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존이 처한 ‘심리적 현실’이다. 그 심리적 현실이란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휘젓는 모든 감정과 딜레마이자 정치적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개인의 고뇌다. 쿳시는 ‘진실’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도, 또한 거기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설적 ‘허구’ 때문에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만을 추구했다.이를 통해 쿳시는 과거의 오점을 벗어던지고, 혹은 승화함으로써 진정한 작가로 자신을 재창조해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야말로 ‘진실’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윤희정기자

2018-09-14

국내 최초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출간

국내 최초로 원문에서 번역한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고대 그리스 서정시’(민음사)가 발간됐다. 아르킬로코스, 사포, 세모니데스, 히포낙스, 솔론, 아나크레온, 시모니데스, 테오그니스, 핀다로스 등 열다섯 명 고대 그리스 대표 시인들의 서정시를 한 권에 담았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폴리스의 발전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했던 ‘개인’에 대한 의식과 그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운율에 맞춰 표현하며 시작됐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등이 신 혹은 신과 같은 형상의 영웅, 제왕, 귀족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를 칭송하던 신화와 서사시의 세계관에서, 개인의 일상적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서정시의 세계관으로 변화한 것이다.시인들은 각각 개성적 목소리로, 전쟁에 참여하고,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예찬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실연에 슬퍼하고, 남을 욕하고, 조롱하고, 복수심에 이를 갈고, 가난을 탄식하고, 늙음을 애달파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노래한다. 분노, 사랑, 슬픔, 욕망, 공포, 혐오, 모욕감, 복수심 등 날 것의 생생한 감정이 날뛰는 시행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정서의 고갱이”를 발견할 수 있다.최초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리는 아르킬로코스는 비록 방패를 내던지고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크게 외치며, 영예롭게 전사할 것을 권하던 사회적 통념을 비웃는다.“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죽고 나면 존경도 명성도 얻지/못하리라. 차라리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은총을/좇으리라. 가장 나쁜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의 몫이니.”― 아르킬로코스최초의 여성 시인이자 플라톤으로부터 열 번째 ‘뮤즈’(예술의 여신)라고 불렸던 사포 역시 당시 지고의 가치였던 전쟁의 승리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라고 노래하는 파격을 보여준다.“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라/말하겠어요.”― 사포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마음과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의 원형을 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파혼한 약혼자와 그 아버지를 결국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아르킬로코스의 악에 받친 저주와 노골적인 모욕의 표현은 근래 온라인 SNS에 넘쳐나는 악성 루머와 비방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분명히 알아라. 네오불레는./다른 놈이 가져가라./익을 대로 익어/처녀의 꽃송이는 시들었다./예전에 그녀에게 있던 우아함마저./그녀는 욕망을 어쩌지 못한다./색정에 미친 여인, 젊음의 끝을 보여준다./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르킬로코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07

타인의 침입은 나를 변화시킨다

정밀한 구성과 세련된 분위기로 문단과 독자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손보미의 두번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는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산책’, 제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임시교사’ 등 9편이 수록됐다.“말로 규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환기하는 스타일”(문학평론가 신형철)이라는 평을 받으며 일상의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손보미는 이번 소설집에서 불가해한 존재의 침입으로 인해 삶이 미묘하게 변화돼 가는 양상을 묘사한다.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는 인물들이 새로운 자아와 관계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세심하고 정갈한 문체로 담아낸다.손보미의 소설들은 주로 어떤 존재나 사건이 일상으로 틈입해오는 순간에 전개된다.‘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은 헤어진 여자친구의 집에 자꾸 담을 넘어 들어오는 고양이들을 퇴치하러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로, ‘산책’은 밤마다 외출을 나가는 아버지의 집에 딸네 부부가 느닷없이 방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상자 사나이’는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은 꼭 배달되는” 상자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고양이의 보은: 눈물의 씨앗’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래서 보통의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게 되는 사건이 계기다.“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고양이는 언제나 무단 침입하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p. 18)손보미는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공격으로부터 늘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돼 있는 삶을 면밀히 관찰한다. 별안간의 공격은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일상의 균열은 다소 우연적으로 발생하지만 그로 인한 성찰과 반성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저 불이 모두 꺼지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P부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하는 곳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믿었었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임시교사’, pp. 115~16)▲ 손보미 작가보모로서 젊은 부부의 아이와 노모를 맡아 그들 가족의 생활이 평안히 지속되도록 노력해온 P부인은 어느 날 그 쓸모를 다하여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그 밤 침대에 누워 P부인은 문득 생각한다. 자신이 그들에게 쏟아부었던 헌신이 어쩌면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이 여태껏 “용기”라고 생각한 마음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과 회의는 곧 삶에 대한 보편적인 긍정성으로 갈음된다. “사는 건 그런 거지.” P부인은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며 “잘못된 일들이 언젠가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통해 한순간에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회복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고유의 낙천성이라기보다 그동안 여러 가정을 돌봤던 경험에서 건져 올린, 말하자면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07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여라

“나는 매일 모든 것의 끝자락에 가까이 다가간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쪽을 향해 움직인다. (….) 우리 삶의 가장자리 바로 너머에 드리운 절벽은 무시하기가 어려워진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중‘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글항아리)는 미국에서 완벽한 지성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존경받아온 파커 J. 파머(79)가 나이듦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파머는 UC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수차례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 운동과 공동체 교육에 헌신하며 시민멘토로 추앙받았다. 그런 가운데서 자신의 목표와 현실의 괴리 사이를 배회하며 끝없이 고뇌하는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열번째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파머가 나이듦에 대해 쓴 에세이 24편과 자작시를 묶었다.에세이들은 파머가 삶의 가장자리인 ‘나이듦’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일곱가지 프리즘으로 굴절시켜 본 것들이다. 책의 부제가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이다. 이글을 통해 그는 모두 극복하기 어려운 험한 절벽을 뒤에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훈계나 교훈을 주기에 앞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또래의 노인뿐 아니라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울림을 줘 각자가 자신의 경험에 그런 작업을 해보도록 북돋우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그는 나이 드는 우리에게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새와 나무가 삶에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듯,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파머는 “태양 아래 서서 나 자신과 타인들이 생명과 사랑으로 성숙해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하면서 만물 가운데 하나로 최선을 다해 매 순간 살아간다”고 얘기한다.“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 최대한 협력하고 싶다”고 말한다. 파머는 나이듦에 협력할 때 얻게되는 경험들도 유쾌한 문체로 들려준다.“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나의 두려움이고 희망이다.”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삶은 여전히 최고 속도로 거칠게 펼쳐지고 있다. 붙잡고 싶은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은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이 둘러싸고 있고, 늙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자아낸다. 이제 나이든 저자는 너그러움을 품고 그 안으로 시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파머는 ‘현재 자기 모습 전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란 질문에 세 가지 방법을 내놓는다.첫째 젊은 세대와 접촉하라.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며 에너지를 얻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하라. 둘째,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을 향해 움직여라. 벗어날 수 없다면 뛰어들라. 셋째,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자연에서 보내라. 자연은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으며 어떤 것도 배제될 필요가 없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윤희정기자

2018-08-31

유럽 주요박물관·미술관을 통해 살펴보는 유럽사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유럽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의 보고’다. 유럽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오랜 세월 동안 형태와 기능 면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오면서 유럽의 사회적 담론 공간이자 변화하는 생각의 탄생 공간으로서 유럽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왔다. 서양사학자들의 모임인 통합유럽연구회가 펴낸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책과함께 펴냄)는 이러한 유럽 박물관, 미술관들의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면모를 다룬다. 단순히 세계적인 작품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 특정 국가의 랜드마크로서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로만 여겼던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색다르게 다가온다.이 책은 유럽이 분열과 통합, 갈등과 협력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 29곳을 통해 살펴본다. 유럽을 대표하는 곳부터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곳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책은 5부 25장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의 탄생에서부터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재현 공간이던 근대, 국가의 탄생 속에서 민족적 이데올로기의 재현 공간을 거쳐 사회적 담론 공간으로 변화되는 동시대의 이야기까지, 연대를 고려하긴 했지만 단순히 시대 순으로 구분하고 나열하는 식으로 다루지 않고, 유럽의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통해 유럽과 유럽사를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에 맞게 다섯 주제에 따라 박물관, 미술관들을 배치했다.1부 ‘박물관의 기원’에서는 기원전 약 30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궁전에 있던 무세이온(Mouseion)을 살펴보며 최초의 박물관은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기획됐는지를 살펴본다.2부 ‘도시/로컬’에서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파리 카르나발레박물관, 베를린 눈물의 궁전 등 해당 도시의 역사가 박물관을 통해 어떻게 표현됐는지 그 관계를 살펴본다.3부 ‘국가’에서는 파리 루브르박물관, 본 독일역사박물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국립해양박물관 등을 다루며 각 나라들이 박물관을 통해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는지를 소개한다. 4부 ‘유럽/유럽통합’에서는 베르됭·캉 양차대전기념관, 룩셈부르크 유럽쉥겐박물관, 브뤼셀 유럽역사의 집 등을 다루며 유럽이 어떻게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전쟁의 상흔, 민족 갈등 등의 문제를 극복해 하나가 돼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5부 ‘미래의 박물관’에서는 디지털 도서관 형식의 신개념 박물관 ‘유로피아나 프로젝트’를 살펴보며 미래의 박물관은 어떤 성격을 띨지 조망해본다.중심주제가 박물관과 미술관인 만큼 이 책은 전시된 몇몇 특정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장소의 설립 취지, 위치의 역사성과 상징성, 건물 구조의 특수성, 전시품 배치의 콘셉트,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을 다루며 박물관과 미술관의 성격을 폭넓게 살펴본다.각 장들은 통일된 형식과 관점을 공유하며 해당 박물관과 미술관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전체 유럽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려낸다./윤희정기자

2018-08-31

우리학문의 탈식민적 지식 생산에 대하여

▲ 피에르 부르디외‘아틀라스의 발’(문학과지성사)은‘현대 사회학의 거장’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삶과 사상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부르디외는 사르트르, 바르트, 푸코, 데리다와 함께 프랑스 사상의 보루였으며, 사회철학이 독일의 하버마스와 영국의 기든스에 의해 양분된 상황에서 가장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의 문제를 개입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라고 할 수 있다.부르디외 이론을 번역, 소개해온 문화연구자 이상길 교수의 20여 년간의 연구가 농축된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삶과 학문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하며 부르디외가 제시한 사회학적 방법론을 부르디외 자신에게 적용시켜 쓴 새로운 ‘사회학적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이상길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부르디외의 수용 문제를 성찰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했다.한 통계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푸코, 하버마스, 기든스, 고프먼을 훨씬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로 꼽혔으며, 매년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거나 부르디외를 다룬 단행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장’ ‘하비투스’ ‘구별짓기’와 같은 부르디외의 개념들이 일상적으로 쓰이게 됐으며, 대부분의 저작이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연구의 지체 상황은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이 책의 1부 ‘지식인의 초상’에서는 부르디외의 생애와 학문 세계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과 당대 프랑스의 정치·역사·학문적 상황을 분석하며 부르디외의 지적 기획이 그가 거쳤던 사회적 궤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진화해갔는지를 조명한다.저자는 부르디외의 지적 하비투스를 재구성함으로써, ‘사회학적 자기 성찰’ ‘연구 경계의 위반’ ‘철학과 사회과학의 융합’ ‘이분법적 사유 관행에 대한 거부’ 등 그를 사회학의 대가로 만든 연구 노동의 원리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발전한 것인지 살펴본다.‘장champ’은 다양한 분야의 경험연구에 빈번하게 활용되는, 부르디외의 철학을 특징짓는 핵심 개념 중 하나다. 부르디외는 한 저서에서 장에 대한 일반 이론을 구축해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었는데, 이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2부 ‘이론적 지평’에서는 장이론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며, 이를 경험연구에 투입하고자 할 때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검토함으로써, 분석 틀로서 장이론이 갖는 난점들과 그 보완 방향을 모색한다. 또한 장이론이 내포하는 투쟁 중심적 사회관과 공리주의적 인간관의 면모를 살펴보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부르디외의 시도가 어떤 딜레마에 봉착하는지 이야기한다. 3부 ‘수용의 단층’은 부르디외 사회학을 ‘서구 이론’으로 대상화해, 우리 학계가 부르디외의 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부르디외의 저작 중 어떤 책이 어떤 식으로 소개됐고 번역에서 제외된 글은 무엇인지, 번역자는 어떠한 이들이며 번역을 통해 어떠한 상징자본을 얻게 되는지, 부르디외의 책들을 출판한 출판사들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등 부르디외 저서의 출간과 관련된 전후의 사정을 꼼꼼하게 되짚으며 번역을 통해 드러나는 사상의 ‘굴절’ 양상을 관찰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국내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유입과 맞물려 서구 이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태도와 현실과 괴리된 이론의 만연이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우리 학문의 ‘종속성’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저자는 학문의 종속적 구조 개선을 위해 필요한 선결 과제들 중 하나가 이론문화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라고 주장하며,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체계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적 수단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르디외가 마지막 강의에서 썼던 비유를 빌리자면,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성찰성을 그토록 중시한 부르디외의 이론에 충실한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말하려면, 그 이론을 논의하는 우리의 두 발이 과연 어디를 어떻게 딛고 있는지 끈질기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르디외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역설적이지만 우리 학계가 탈식민적 지식 생산을 위한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24

한국 작가 134인의 서평과 함께 읽는 세계문학 고전

출판사 문학동네는 세계문학 고전을 읽은 한국 작가들의 서평을 엮어낸 책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을 증보판으로 새롭게 펴냈다.문학동네는 앞서 한국 대표 작가들이 좋아하는 세계문학 작품 감상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고 그 결과물을 2013년 책으로 처음 출간한 바 있다. 초판은 ‘안나 카레니나’부터 ‘은둔자’(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까지 총 97편의 서평을 담았다.이번 증보판은 기존 판본에 ‘불타버린 지도’(세계문학전집 111)부터 ‘제5도살장’(세계문학전집 150)까지 서평 34편을 더했다.이 책에 함께한 작가는 모두 134명. 황석영, 황정은, 편혜영, 정지돈, 정세랑, 임현, 이기호, 손보미, 성석제, 김영하, 김애란 등 소설가와 허수경, 정끝별, 이병률, 심보선, 유희경, 박연준 등 시인, 황종연, 신형철, 서영채, 김형중, 권희철 등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정수복, 김홍중,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들이 참여했다.여러 분야의 많은 필자들이 참여한 만큼 비평, 에세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쓴 짧은 소설, 등장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작품 구절을 따서 지은 시 등 글의 형식 또한 필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며, 각 필자가 어떤 작품을 골랐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남다르다.감각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소설가 백영옥은 고전 중의 고전‘안나 카레니나’를, 가만가만 내면을 응시하는 소설가 이혜경은 소설가 김영하의 번역으로 만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거침없고 솔직한 시어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 김민정은 영문학의 마녀로 불리는 앤절라 카터의 소설집 ‘피로 물든 방’을, 불행과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깊이 공감하는 소설가 김애란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의 참상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골랐다. 이번 증보판에는 사소한 풍경에서 삶의 비의를 포착해내는 시인 이규리가 읽은 페소아의 고백적 단상 ‘불안의 책’,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한 소설가 최은영이 읽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걸작 ‘디어 라이프’ 등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모든 글의 끝에는 해당 작품과 원작자 소개를 덧붙여 독자의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돕고자 했다. /윤희정기자

2018-08-24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함께했다

“보람있는 삶이란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이 있는 의무’에서 온다. 그 열매는 주는 즐거움과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즐거움이다. 받기만하는 즐거움보다 찾아서 누리는 즐거움은 높은 차원의 행복이다. 그러나 베푸는 즐거움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즐거움은 가장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다.” (‘행복 예습’p.56)한국 1세대 철학자이자 명수필가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 에세이 ‘행복 예습’(덴스토리 출판사)을 펴냈다.평남 대동에서 1920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로 99세, 백수(白壽)를 맞은 김 명예교수는 100세가 코앞인 요즘도 일주일에 두어 번 강연을 하고, 신문사 두 곳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지난 2월 과거에 쓴 수필을 모아 출간한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한 저자는 이번 책에서 행복에 관한 단상을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책은 크게 4가지 주제로 나뉜다.행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행복의 조건’, 저자가 꼽은 행복의 가장 큰 원천 중 하나인 ‘일하는 기쁨’,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 그리고 저자의 인생 찬가인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이다.담백하면서도 사색이 깃든 저자의 글은 때로는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끔 이끌어준다.▲ 김형석 교수저자는 장수하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다고 설명한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 정신적 여유와 독서를 즐기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도 공통점이다.그는 과거와 미래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를 지양하고, 현재에 행복이 머물도록 연습하라고 조언한다.과거에 매몰되면 자유와 행복을 창출하는 적극성이 약화하고, 성공을 꿈꾸며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면 현재를 내실 없이 빼앗긴다는 것이다.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행복의 원천은 바로 사랑. 그는 “그는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며 “사랑의 척도가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곤 했다”고 털어놓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7

예민한 두 사춘기 소년의 마음 속 얘기 들여다보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로제 마르탱 뒤 가르(1881∼1958)는 193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20세기 전반의 사회사를 정신적 맥락에서 거대한 벽화로 재현해낸 작가다.민음사는 최근 그의 대표작 ‘티보 가의 사람들’ 첫 권에 해당하는 ‘회색 노트’(민음사)를 출간했다.지난 2000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정지영 교수가 필생의 역작으로 선보였던 ‘티보 가의 사람들’을 가볍고 읽기 쉬운 쏜살문고로 다시 정리해 선보인다.‘티보 가의 사람들’은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등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들이 입을 모아 격찬한 작품으로, 웅대한 대하소설의 시발점이자 일종의 교양 소설 혹은 성장 소설이다.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억압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 성장한 앙투안과 자크 티보 형제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자유분방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다니엘과 자크가 교류하면서 빚어내는 우정과 영혼의 교감을 들여다볼 수 있다.완전히 상반된 집안 출신인 둘은 남몰래 우정을 나눈다.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둘이 공유하는 ‘회색 노트’다.‘회색 노트’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인생의 고뇌와 방황, 정열과 반항의 충동을 절절히 공감하고, 또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8-17

거장이 꼽은 인류 문명의 위대한 순간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1885∼1981)의 명저 두 권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민음사는 최근 불후의 명저 ‘철학 이야기’와 ‘문명 이야기’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철학과 역사의 세계로 안내한 윌 듀런트의‘위대한 사상들’과 ‘노년에 대하여’를 펴냈다.‘위대한 사상들’은 윌 듀런트가 선정한 인류 문명의 ‘위대한’ 순간들의 목록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교육을 위한 최고의 책 100권부터 위대한 사상가 10인, 위대한 시인 10인, 인류 진보의 최고봉과 세계사의 결정적인 연도들까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모음집이라 할 만하다.이 책 ‘위대한 사상들’에서 듀런트는 지식 소매상의 원조답게 공자와 볼테르, 단테와 키츠, 뉴턴과 다윈을 가로지르며 사상과 문화의 지형도를 그려 보인다. 독자들은 거장의 섬세한 숨결로 살아난 천재들의 업적을 통해 인류의 빛나는 지적 유산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위대한 사상가 10명, 위대한 시인 10명, 교육을 위한 최고의 책 100권, 인류 진보의 최고봉 10가지, 세계사의 결정적인 연도 12개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듀런트는 위대한 사상가 10명으로 공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코페르니쿠스,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 볼테르, 임마누엘 칸트, 찰스 다윈을 꼽는다.뉴욕 타임스에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꼽은 듀런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문명사학자다. 또한 지식과 교육,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생 동안 대중 강연과 저술 활동에 헌신한 작가이기도 했다. 듀런트는 가톨릭 신앙과 사회주의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며 여러 사상을 탐색하던 시기에 출세작 ‘철학 이야기’를 집필했다. 스스로의 철학적 실존적 고민이 배경이 됐을, 삶과 지식이 어우러진 이 매력적인 철학 입문서에 대중의 호응도 엄청났다. ‘철학 이야기’의 대성공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진 후에는 50여 년 동안 ‘문명 이야기’집필에 몰두했다. 총 11권, 1만 페이지에 1만 년 인류 문명사를 담은 이 기념비적 대작은 제1권‘동양 문명’부터 마지막 ‘나폴레옹의 시대’까지 출간될 때마다 어김없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노년에 대하여’는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미공개 원고를 묶은 사실상 마지막 저서다.▲ 윌 듀런트청춘, 중년, 노년, 죽음, 종교, 재림, 도덕, 인종, 여성, 전쟁, 예술, 과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단상을 수록했다. 듀런트 사후에 소재를 알 수 없어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30여 년이 지나 극적으로 발견된 원고들이다. 스물두 편의 짤막한 글은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신과 도덕, 전쟁과 정치, 예술과 교육 등 인생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20여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그중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마침내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은” 듀런트 만년의 아쉬움과 홀가분함을 살릴 수 있도록 ‘노년에 대하여’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을 위해 대가가 남긴 정제된 지혜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다.‘노년에 대하여’를 통해 듀런트는 유연하고도 균형 잡힌 사색의 결을 보여 준다. 청춘의 성급함을 경계하면서도 그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간과하지 않으며, 노년에 깨닫는 지혜를 칭송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0

고요한 움직임으로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집

▲ 김유진“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면 몸속 깊은 곳에서 즉각적으로 온기가 피어났다. 마치 고통에 반응하는 엔도르핀처럼, 솟아난 온기는 아담한 동굴의 형태로 그를 에워쌌다. 동굴의 내부는 오래전 마주잡은 K의 손바닥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듯해, 태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그즈음 그가 읽는 책에는 유폐와 황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보이지 않는 정원’중)세련되고 강렬한 이미지와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인상적인 소설세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평을 받는 작가 김유진(37)씨가 세번째 소설집 ‘보이지 않는 정원’(문학동네)을 펴냈다.이번 소설집에는“비극을 겪은 이후의 상당히 강렬하고, 그러면서 할 얘기는 다 하는 세련된 소설”(문학평론가 신수정)이라는 호평을 받은 ‘비극 이후’를 비롯해 2012년 여름부터 올해 봄까지 꾸준히 쓴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렸다.문학평론가 김나영은 “(김유진의 소설은) 말(언어)로 쓰이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소리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이야기”라고 평가했다.젊은작가상과 황순원신진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음악, 무용, 미술과 관련한 풍부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는 그의 소설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일깨운다.소설집 첫머리에 놓인‘비극 이후’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이륙한 비행기 안의 상황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다른 비행기는 결항이라면서 왜 네 것만 아니야? 그러다 사고라고 나면 어쩌라고 그래?”라며 불안해하는 엄마에게 수인은 “죽으면 뭘 어떻게 해, 할 수 없지”라고 대꾸할 뿐이다. 수인이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건, 이번 여행이 연인과 이별한 뒤 충동적으로 떠난 것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추락할 듯 기체가 급강하하기 시작하자, 막연하게 상상했던 죽음의 모습은 생생하고 강렬하게 수인의 몸을 통과한다. 자신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무서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는 그쳐 있지만, 빽빽한 안개로 둘러싸인 사방은 비행기 안과 다를 바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옛 애인을 애도하는 혹은 애도할 수 없는 ‘비극 이후’의 시간이 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공간 안으로 독자를 강하게 끌어당긴다.연인의 죽음 혹은 연인과의 이별 때문에 혼자 남게 된 인물들뿐만 아니라 “홀로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혼자 됨’을 선택한 인물의 모습 또한 이번 소설집의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표제작 ‘보이지 않는 정원’은 ‘두 사람’이 아니라 ‘혼자서’ 하는 사랑의 풍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완만한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앞으로는 강이 끝없이 펼쳐지는 마을, 아름답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고요한 이곳에서 나고 자란 ‘태희’는 어머니를 도와 민박 일을 하며 지낸다. 이 조용하던 공간에 소설가 오정이 머물게 되면서, 평화롭던 태희의 일상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혼자 있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까지 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정원’은 그 선택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타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정하고 고요한 공간과 대조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0

본의에 충실하되 이해하기 쉽게

“핵심을 아는 대가는 어려운 원리도 쉽게 푸는 힘이 있다”중국의 3대 석학 중 한 명인 장치청의‘주역 완전해석’(상)(판미동)이 번역 출간됐다.저자는‘주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전문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돼 왔고, 또 그 과정에서 역학이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어떤 방법으로 해석을 하든지 원래의 뜻은 결코 변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학계에 통용되는 정통 판본인 ‘주역정의(周易正義)’를 원전 해석의 근거로 삼았으며, 이정조의 ‘주역집해(周易集解)’, 정이의 ‘이천역전(伊川易傳)’,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 등 역사적으로 저명한 ‘주역’ 학자들의 해석을 폭넓게 소개해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게끔 돕는다. 형훈과 성훈 등 고대의 한자를 해석하는 법을 총동원해 ‘주역’의 본의에 충실히 다가가는 한편, TV에서 선보인 강연의 경험을 살려 이를 좀 더 쉽고 명쾌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지난 30년간 ‘주역’을 삶에 활용해 실천하는 가운데 얻은 깨달음들을 소개해 변화에 대응하는 원리, 길함을 따르고 화를 피해 가는 지혜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또한 저자 본인이 개발한 독창적인 개념인 ‘입정관상법(入靜觀象法)’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문명’ ‘문화’ ‘인문’이라는 말은 모두 ‘주역’에서 유래했다. 비괘(賁卦)의 ‘단전’에서는 “(강유교착) 천문야. 문명이지 인문야. 관호천문이찰시변 관호인문이화성천하[(剛柔交錯) 天文也. 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라는 말이 나온다.(상권 p.542~544) 이는 “(강유가 뒤섞이는 것) 이것이 천문이고, 문명으로서 그치게 하니 이것이 인문이다. 천문을 관찰하여 사시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하여 이룬다”는 뜻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뒤섞이는 것이 하늘의 문채(文彩) 즉 ‘천문(天文)’이라면, 인간 사이에서 밝고 맑은 마음이 있어서 예의에 머무르는 것이 곧 ‘인문(人文)’이라는 말이다. 또한 태괘(泰卦)의 “위아래가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진다.(上下交而其志同也.)”(상권 p.393)에서 ‘뜻의 방향이 같은 무리’라는 뜻의 ‘동지(同志)’라는 말이 유래했고, 혁괘와 정괘에서 옛것을 뜯어고쳐 솥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뜻의 ‘혁고정신(革故鼎新)’(하권 p.250)이라는 성어도 주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처럼 주역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사유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정치, 윤리, 종교, 문학, 예술, 경제, 군사, 전통 천문학, 수학, 역법, 음률, 의학, 농사학, 화학, 물리학 등의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주역에 녹아 있는 만물에 대한 통찰, 이성적 사유와 삶의 경험, 위기의식이 담긴 인생의 지혜 등은 동양철학 사상과 문화의 원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에 저자는 ‘주역’은 “인류 문화 역사의 중심축이 되는 시기인 기원전 500년경, 부호와 문자 시스템이 어우러져 탄생한 역작”이자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유가와 도가 학파에서 동시에 추앙 받는 경전” “중국 과학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생명과학 분야 모두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이라며 그 의의를 설명한다. 또한 30년간 쌓아 온 유 · 불 · 선을 아우르는 지식과 깨달음을 통해 ‘주역’의 핵심을 통찰하며, 역사 속의 사건과 오늘날의 사례를 접목하고 그것을 ‘주역’ 큰 뜻에 비춰 풀이해 고전의 가르침을 현재의 생생한 지혜로 되살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인기를 얻을 것인가, 호감을 줄 것인가

미치 프린스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임상심리학과)는‘모두가 인기를 원한다’(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얻고 싶다면 인기를 향한 갈망을 이해하고 제대로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미치 프린스틴 교수는 인기가 유명 스타나 셀러브리티, 정치인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가치가 아니며,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이라고 강조한다. 이 본능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사랑, 성공, 몸과 마음의 건강, 더 나아가서는 행복까지 좌우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기를 향한 욕망을 조절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해하며 괴로워한다는 것.저자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든, 어디서나 주목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든 인기를 향한 갈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저자는 인기를 ‘지위(status)’와 ‘호감(likability)’으로 나누어 인기의 속성과 인간의 심리를 분석한다. 첫 번째 유형인 지위는 그 사람이 유명한지,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의 대상이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미치 프린스틴은 이 유형의 인기만 추구하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기의 유형은 호감이라고 말한다. 호감은 친근하고 믿을 만한 사람, 함께 시간을 보내면 즐거운 사람들의 특성이다.어떤 유형의 인기를 추구했는지, 호감을 얻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따라 어떻게 삶이 변화했는지 추적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기의 강력한 영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알려준다. 특히 어디서나 호감을 얻는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이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법을 보여주는 다양한 임상 실험과 연구들은 평소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지옥같은 세계… 그것을 이길 사랑을 노래한다면

‘황금빛 모서리’‘이탈한 자가 문득’등으로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아온 김중식 시인이 두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를 펴냈다. 그는 다소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회자된 시집 ‘황금빛 모서리’( 1993)로 독자에게 여전히 익숙한 시인이다. 첫 시집을 탈고하고 1997년 언론사에 입사했던 김종식은 2007년부터 국정홍보처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 비서관실에서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 감각으로 연설문 작성을 맡기도 했던 그는, 이후 2012년부터 약 3년 반 동안 주 이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문화홍보관으로도 재직했다. 시집 ‘울지도 못했다’는 이전 김중식의 시 세계가 집중한 암담한 현실 인식 위에 그간의 다양한 생활 경험에서 비롯한 낙관성이 더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김 시인은 이 세계를 지옥이라고 진단했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노래했기에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시인은 이 세상, 곧 지옥의 세계를 면밀히 관찰한 결과 천국이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충만해 있다면, 바로 지금 이곳이 천국과 같음을 노래한다. 머물러도 떠돌아도 사랑이 있다면 바로 그 머물고 있는 그곳이 천국이었던 것이다.1990년대 당시 시집 ‘황금빛 모서리’는 한국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시집으로 손꼽힌다. 그의 시는 매우 실험적인 듯하면서도 시의 전통을 버리지 않았고, 시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자유로웠다. 다소 자학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시들이 담겼지만, 그때부터 생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남달라 “따뜻한 비관주의자”(문학평론가 강상희)라고 명명되기도 했다.“사막처럼 끝없고 지옥처럼 끓어오르는 생,/그러나 “풀잎은 노래한다”/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뱃가죽에 불붙도록 식솔과 기어온 생/돌아갈 곳 없어도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안 가본 데는 있어도 못 가본 덴 없었으나/독사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여,/바다는 또 어느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듣도 보도 못 한 물결이 옛 기슭을 기어오르고/두 눈은 침침해지고 뵈는 건 없는데/온다는 보장 없이 떠나는 건 나의 몫/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풀잎은 노래한다.”2013 김중식 시‘그대는 오지 않고’ 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사회적·물질적 성공의 핵심요인 ‘운’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로버트 H. 프랭크 지음글항아리 펴냄인문, 1만5천원누군가 사회적으로 꽤 성공했다고 말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실력, 노력 그리고 행운. 경쟁이 너무나 격렬한 우리 시대에 최종 승자 그룹 안에 끼기는 무척 힘들다. 당락을 결정짓는 실력 차는 1이지만, 그것이 안겨주는 경제적 보상은 100까지 벌어져 초기의 사소한 차이가 최종 결과에서는 엄청난 증폭을 보인다. 재능과 노력만으로 승리가 보장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세 가지 중 마지막 ‘행운’은 없어선 안 될 요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운’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를 설명할 때는 운이 나빴다고 말하는 반면, 성공의 요인을 짚을 때는 행운의 영향을 과소평가한다. 정말 그럴까?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경제학 석좌교수인 로버트 H. 프랭크는‘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글항아리)에서 운이 사회적, 물질적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행운에 관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프의 말을 들어보자.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고, 음악 레슨을 받게 해준 부모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당신들에겐 커다란 행운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그렇다. 운은 유전자와 환경이 버무려진 결과다. 당신의 부모가 따뜻하다면, 당신이 남들보다 머리가 좀더 좋다면, 외모가 썩 괜찮다면,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타고났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면 운을 타고난 셈이다. 왜냐하면 두둑한 보상을 받을 업무를 더 잘 수행할 가능성이 높으니까(태생적으로 의지가 약하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 인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경쟁사회에서 불운한 위치에 처해 있다).행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미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고도로 발달한 법 제도와 교육 시스템,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를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밖에 공장 하나를 지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기 우리가 낸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통해 시장으로 상품을 운반할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가르친 직원들을 고용하겠죠. 여러분의 공장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이 있기 때문입니다.”저자는“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에 있어서 행운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들 실력주의자의 문제는 단순한 착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공공 투자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모두에게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기 싫어한다는 것이다.저자는 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으로 누진소득세 대신 누진소비세를 제안한다.소비에 대한 한계세율이 올라가면 저축과 투자가 촉진되고 더 나은 사회기반시설을 위해 투자할 추가적인 세수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27

소박한 시인의 감성이 한 폭 수채화처럼

▲ 하재영 시인“넓은 이파리를 가진 식물을 보면/어른이 된 난 아직도/이파리 하나 뚝 따서/머리에 쓰고 싶다./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괜찮고/따가운 햇살도 따갑지 않게/ 저쪽 길 좁아지는 곳까지/무사히 갈 것 같다./엄니 마중 올 것 같은 저쪽까지”(하재영 시‘토란 잎’) 포항의 중견시인 하재영 시인이 두 번재 시집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도서출판 전망)를 출간했다.지난 2001년 낸 첫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이후 17년 만에 펴낸 이 시집은 총 3부로 나뉘어 총 86편과 시인의 산문이 수록돼 있다.‘봄비’‘낮잠’‘베란다 행복’‘기계장날’등 시인의 시들은 시인의 따뜻하고 소박한 감성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았다.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시인은 이번 시집을 펴내면서 “시를 통해 나는 내 이웃의 아픔을 만나고, 자연의 경이를 발견하고, 우주의 찬란한 빛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시는 매일 넘겨보는 정화의 숲이며 삶을 가치롭게 안내하는 수레바퀴”라고 소감을 전했다. 시인은 또한 “나의 시 이미지는 난해함을 벗어나 삶의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금쪽같은 감성 시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시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쓰는 것이 시의 질박한 맛인가를 아닌 게 아니라 향기롭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하재영 시인은 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돼 등단한 이후 1989년 ‘아동문예’작품상 동시 당선,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계몽사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동화집으로 ‘할아버지의 비밀’, ‘안경 낀 향나무’와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이 있다. 푸른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포항문예아카데미 원장, ‘포항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