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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잔잔하고 그윽한…

“자고 나면 그 언저리 선혈이 돋더라가고 나면 그 뒷자리 바람만 일더라동백꽃환한 새벽도물소리로 지더라.”(조영두 시조 `사랑꽃`)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영두 시인의 첫 시조집 `떠나보면 안다`(부크크) 속에 나오는 시조를 읽으면 마치 한 폭의 오래된 수채화를 보는듯 잔잔하고 그윽한 울림이 온다. 인습에 물들지 않은 맑고 순수한 영혼을 만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그의 작품 속에는 가슴 저 밑에서 묻어나는 아련한 그리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해준다.조 시인은 1996년 시조문학 3회 천료로 등단했으며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또 한 번 실력을 인정받은 탄탄한 기량을 갖춘 시조시인이다. 그는 평생을 초등학교 교단에 몸담아 오면서 성실하고 존경받는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지난 2월 정년퇴임 했다.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이번 시조집에 담긴 작품들은 사람살이의 고단함, 역동성 등을 노래하면서 소재를 시적으로 읊었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 이해를 이끄는 시들은 시인의 오랜 시간 발화 내용과 형식을 통합한 미학적 결심임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조 시인은 “한 점을 찍는다. 그 사이 큰 산을 넘고 바다 같은 강도 건넜다. 그 길에 같이 한 시가 있어 세상이 여유로웠다. 앞으로 또한 그럴 것이다”고 소감을 전했다.시조집은 `청산도` `등대는` `돌아앉는 섬 하나` 등 시조 50여 편이 총 3부로 구성됐다. 1,2부는 아프게 통과해온 지난 시간들에 대한 충실한 재현 과정을 작품 속에 담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억에 자신의 열정을 남김없이 바치는 첫 모습을 선명하게 풀어냈다. 3부는 7년간 근무했던 울릉도에서 만났던 개척민들의 애환에 얽힌 이야기와 풍광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묘사했다.▲ 조영두 시인`떠나보면 안다`시집 제목은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인 `울릉도 4-빗소리`중 “떠나보면 안다 빗소리의 여운을/ 절해고도 외딴 사택 지붕 위로 떨어지며/한밤중 가슴 때리는/아! 그리운 이여”싯구에서 따왔다.원정호 시조시인은 해설 `활화산 같은 진솔한 서정의 숲`에서 “시인이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가꾼 진솔한 서정의 숲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늑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리라 확신한다. 시조 전편이 그의 천선에서 볼 수 있듯이 조용하고 잔잔하며 소박하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조 세계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리움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조영두 시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맥시조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북문인협회, 여강시가회, 맥시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06

한 장의 그림과 만나는 우리시대 삶과 인생

`내가 사랑한 명화`(문지푸른책)는 6·25 한국전쟁이란 일관된 소재로 `분단문학`이란 독특한 지평을 일군 소설가 김원일(76)의 미술 산문집이다.저자가 2000년 펴낸 미술 산문집인 `그림 속 나의 인생`의 개정판으로 20여 년 만에 새로운 구성과 판형, 디자인으로 또다시 선보이게 됐다. 새로운 글을 추가하되 기존 글 몇 편은 삭제했고 새롭게 글을 다듬어 펴냈다.“그림이란 일절 선입관 없이 그림 자체로만 감상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들은 그 그림에 뒤따르는 에피소드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 소설 쓰기가 생업인 나 역시 한 장의 그림을 볼 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화가의 당시 삶을 엿보려는 습성이 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부단한 생애와 그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비록 미술에 문외한이더라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며,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된 총 마흔여섯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소설을 읽듯 다양한 인생사를 경험할 수 있다.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사랑해온 그림(또는 조각) 46점이 걸린 마음의 화랑을 순회하며, 그림이 거는 말이나 그 그림에 하고 싶은 말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추적하고 그려낸다.이를 통해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오래 사랑받은 46점의 명화들이 작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이미지로 새롭게 읽히니, 내성적인 소년 시절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순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애정과 해박한 지식, 소설가다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이다.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미술 감상의 길잡이` 또는 `그림 읽기 안내서`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생애를 보며, 자신의 삶과 문학을 그 이미지에 접목시킨다. 이데올로기를 좇아 가족을 버리고 북으로 떠난 아버지,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 지독한 가난과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던 성장기, 막내아우의 죽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좌절과 가위눌림, 자신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을 통해 펼쳐진다. 이렇듯 이 책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그로 인한 가족과 개인의 수난의 역사가 있고, 평생토록 그 경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해온 작가의 치열한 사색과 독특한 체험의 기록이 담겨 있다. 차라리 노(老)작가의 인생 고백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책 곳곳에 삶의 굴곡과 무거움이 승화된 작가의 인생의 깊이가 여운처럼 남는다.책은 전체 6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렘브란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을 시작으로 로댕, 뭉크, 호퍼, 자코메티, 프리다 칼로, 베이컨의 작품을 소개한다. 자기 성찰, 예술혼의 자만심과 오기, 열정 등 예술가의 초상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여러 모습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2부 `사랑과 열정`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비롯해 앙리 루소, 고흐, 클림트, 로트레크, 코코슈카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삶이란 고해”이나 사랑 혹은 열정이 있기에 예술이 존재하고 삶은 또 반짝임을 이야기하는 글들이다.3부 `도전과 파괴, 재창조`는 쿠르베의 `만남(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비롯해 마네, 드가, 세잔, 마티스, 뒤샹 등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고 상식을 파괴하여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조해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4부 `자연, 이상향`은 우리에게 친근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롯해 윈즐로 호머, 고갱, 샤갈 등을 통해 인간이 돌아가고 싶은, 혹은 지향하는 자연, 고향, 이상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소개한다.5부 `시대와 현실`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콜비츠의 `시립구호소`, 벤 샨의 `광부의 아내` 등 험난한 삶의 파고와 역사의 격동기를 표현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6부 `삶의 유한성`은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 등을 소개하며, 유한한 인간의 삶과 슬픔, 그렇기에 인간이 희구하는 종교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30

꿈은 꿈을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는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유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유토피아가 표시되지 않은 세계지도는 잠시도 쳐다볼 가치가 없다”라고 했듯 인간은 이제껏 시대를 막론하고 더 나은 삶을 꿈꿔왔다. 팍팍한 현실에선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각자 꿈꾸는 소망은 다를지언정 안락한 미래와 이상향에 닿고자 하는 염원은 비슷할터. 아마 현실의 삶이 버거울수록 그 바람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유토피아 문헌서지학자인 라이먼 타워 사전트의 `유토피아니즘`(교유서가)은 초기 근대문학과 유토피아론부터 오늘날 계획 공동체나 코뮌이라 불리는 실천적 유토피아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니즘이 발현된 다양한 형태를 고찰한다. 또한 비서구권 전통의 유토피아니즘, 그리스도교 전통의 유토피아니즘, 유토피아니즘과 정치이론의 관계 등 유토피아를 둘러싼 갖가지 논쟁을 살피면서 유토피아니즘의 모순적 성격을 탐구하고 그것을 조율한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원했지만, 유토피아니즘은 모든 문화적 전통에 존재해왔다. 유토피아니즘은 어디서나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을 밝혀줬지만, 개선안의 구체적 내용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됐다. 일부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가 돼버렸고, 그 디스토피아를 물리치기 위해 다른 유토피아가 동원되기도 했다. 유토피아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면서도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토피아`라는 개념`유토피아(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만든 말로, 그가 1516년에 라틴어로 출간한 책에서 묘사한 허구의 나라 이름이다. 보통 이상향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장소나 위치를 뜻하는 `topos`와 부정(否定)이나 부재(不在)를 뜻하는 접두사 `ou`에서 따온 `u`를 결합한 것이다. 모어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유토피아는 `행복의 땅, 좋은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Eutopia)`로 불린다. 유토피아는 결국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곳이나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좋은 곳을 가리키게 됐다. 유토피아는 모어가 만든 단어였지만 그 개념은 이미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시대적으로 모어를 한참 앞서는 유토피아 이야기들이 있었고, 모어 다음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토피아를 일컫는 신조어들이 추가됐다. 나쁜 곳을 뜻하는 `디스토피아`도 이제는 표준적 용어로 자리잡았다. 유토피아 이야기의 특징은 어떤 좋은 곳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그려낸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정치·경제적 체제뿐만 아니라 결혼과 가정, 교육, 식사, 일 등이 묘사된다. 이렇듯 변화된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유토피아 문학이며, 유토피아니즘이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일상의 변화인 것이다.△ 유토피아니즘,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사람들은 언제나 삶의 조건에 불만을 품은 채 더 좋은 삶의 비전을 그렸고, 죽은 뒤에도 더 나은 방식으로 존재가 계속되기를 소망했다. 인류가 맨 처음 더 나은 삶을 꿈꾼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개인들이 그들의 꿈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형태로 언제 처음 기록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최선의 연구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모든 유토피아 이야기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개선될 수 있는지 묻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현재의 삶과 유토피아의 삶을 대조해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밝히고, 상황을 개선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를 제안한다. 그런데 유토피아니즘과 관련해서도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차가 존재한다. 자칫 일반적 범주로서의 유토피아니즘과 문학 장르로서의 유토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선도 빚어진다. 유토피아니즘은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관련된 꿈과 악몽을 가리키며, 그 속에서 그려지는 사회는 그들이 사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르다.△ 계획 공동체의 모델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일 수도 있고, 바람직한 사회나 못마땅한 사회에 관한 묘사이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경고, 현실에 대한 대안, 혹은 달성해야 할 모델이기도 하다. 계획 공동체는 유토피아적 실천으로서 더 나은 삶이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역할을 맡는다. 인류와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유토피아적 관점은 희망 아니면 공포다. 희망은 대체로 유토피아를 낳고, 공포는 대체로 디스토피아를 낳는다. 기본적으로 유토피아니즘은 희망의 철학이다. 희망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모든 노력에 필수적이다. 다만 여기에 잠재된 위험은, 누군가는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제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까지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들의 꿈은 그들의 꿈을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 가능한가? 자유가 부자유를 통해, 평등이 불평등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가?”△ 유토피아니즘의 두 얼굴유토피아니즘의 힘과 위험을 모두 인식하게 된 작가들과 이론가들은 모호하고 덜 단정적이며 더욱 복합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해왔다. 그런 유형의 유토피아를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상대적 유토피아`라 불렀고,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스는 `현실적 유토피아`라 불렀다. 저자는 이런 접근법이 유토피아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면서, 인간은 열정적 신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터무니없음을 인식하고 비웃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유토피아는 그리스 비극에 비할 만하다면서, 인간은 감히 유토피아를 탐낸 뻔뻔함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희망, 전적이거나 부분적인 실패, 낙담과 희망의 폐기, 그리고 희망의 회복. “이 변증법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다. 유토피아는 희망찬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이며, 이 비전은 언제나 실현되며 또 언제나 실패한다.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고, 그런 다음 다시 희망할 수 있다.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가운데 우리가 건설하는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저자의 결론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3-23

재료 본래의 생명력을 살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

유명 자연 요리 연구가 문성희(68)씨가 40년 요리 인생 철학을 전하는 요리 에세이를 펴냈다. `문성희의 밥과 숨`(김영사)은 재료가 가진 본래의 생명력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라는 자신의 요리 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담고 있다. 운명적으로 요리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 권위 있는 요리학원 원장이자 각종 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의 삶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방황과 탐구, 세계적인 명상학교 브라마쿠마리스에서의 수행과 생명의 법칙을 깨닫게 된 과정. 쉽지만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치열하게 통과하며 지금에 이른 저자의 산문들이 삶의 신산함과 감동을 준다. 책은 모두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저자의 인생 이야기이며, 2부는 저자의 요리 철학이 응축된 음식 이야기다. 음식은 총 20가지가 담겼고, 저자와 저자의 딸이 각기 10가지씩 소개한다. 저자는 몸과 마음의 정화와 보양을 돕는 죽을, 딸 김솔은 오감을 깨우고 영양도 풍부한 혼밥요리를 택했다.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 차분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저자의 요리 철학이 단지 손끝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의 평화에 대한 깊은 모색과 명상에서 빚어진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23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철학자, 그리고 다시 찾아온 행복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고 날카로운 비판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린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이자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땅의 예찬`(김영사)이 출간됐다. 1999년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병철은 2012년 4만2천권이 판매되는 등 열풍을 몰고왔던 `피로사회` 이후 10여 권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국과 독일에서 최근 동시에 출간된 `땅의 예찬`은 저자가 3년 동안 정원을 일구며 겪은 일을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저자가 정원 가꾸기를 시작한 이유는 어느 날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뒤 개인 정원을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이라고 명명하고는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온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땅을 일구며 비밀의 정원을 가꾸면서 그는 그곳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잃어가던 현실감, 몸의 느낌이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정원 일을 하면서 그는, 변화된 공간감각과 시간감각에 대해, 기다림, 인내와 희망에 대해, 색깔과 빛과 향기에 대해, 수국과 옥잠화에 대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낭만주의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명상한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_32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16

포스트모더니즘 선각,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출간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그는 20세기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문학과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문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탈구조주의자들에게도 발견이 된다. 탈구조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 전개를 위해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는 주로 권력적인 이분법의 사고를 해체하는 논리나 경직된 의미해석을 반대하는 논리에 적용됐는데 대표적인 해체주의자 데리다와 푸코의 이론들이 그 예가 된다. 보르헤스의 글을 굳이 장르에 포함시킨다면 환상문학에 속할 수 있다. `타자`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보르헤스 소설의 서사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보르헤스는 자신 문학의 관심사는 시간과 영원과의 게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시간이 동일한 것에 주는 차이에 많은 주목을 했다.보르헤스는 이처럼 독특한 소설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생전에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도 남겼다. 당대 작가들의 전기, 철학 사상, 아르헨티나의 민속학, 정치와 문화 비평, 강연록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글을 써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산문 작가로도 유명했다. 도서관 사서로 오랫동안 일하고 국립도서관 관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방대한 독서량과 지식, 이를 바탕으로 한 폭넓은 저작으로 `20세기의 도서관`으로 불리기도 한다.민음사가 최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방대한 지식과 사유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논픽션을 묶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을 펴냈다.전집은 총 7권으로 묶였으며, 이번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영원성의 역사`, `말하는 보르헤스`까지 세 권이 먼저 나왔다. 그의 산문 전집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올 하반기에 나머지 네 권이 나와 완간될 예정이다.이번 전집에서는 보르헤스의 비범한 사유가 태동하던 청년기부터 지적 자만심으로 패기만만한 장년기, 자신만의 한 세계를 완성한 노년기까지 그의 세계관과 철학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온전히 엿볼 수 있다.△ 1부 `내 희망의 크기`이 작품은 그의 전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크리오요`, `팜파스`, `문학과 언어`에 대한 애정과 우려 등을 담고 있다. 그는 크리오요주의를 “세상과 개인, 신은 물론 죽음과도 소통하는 철학”으로 정의하며 아르헨티나의 원초성을 되살린다. 아르헨티나의 언어성에 대한 고찰, 크리오요 문학 작품과 스페인 및 영국 문학 작품의 분석이 이어지며 루고네스, 루이스 데 공고라, 케베도 등에 대한 초기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역자 김용호 교수는 이 작품이 “삶을 긍정하고 기쁨의 원천으로 삼았던 가우초를 복원시키고, 콤파드리토들을 가우초의 생명력을 도시로 가져온 영웅으로 바라봄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문화를 정립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고 설명한다.△2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언어는 항상 자신을 감동시키고 고양시키지만 그에 대한 의심 또한 그치지 않았던 보르헤스는 `단어의 탐구`,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쳐 한 문장을 이해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지며 인지언어학적 관심을 펼친다. `글로 쓴 행복`, `또다시 은유`,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 등에서는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며 `탱고의 기원`, `두 길모퉁이` 등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전통과 그 기원을 찾는 탐험이 그려진다.“문학의 영속적인 목표가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학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이미 다 말했고 문법과 은유를 통해서만 혁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감히 이를 부정한다. 미분화(微分化)된 노동은 넘쳐 나고 영원한 것, 즉 행복과 죽음, 우정에 대한 유효한 표현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등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궤도 또한 곳곳에 녹아 있다. 역자 황수현 교수가 “민낯의 보르헤스”라고 쓴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보르헤스 이전의 “다소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이며 때로는 유머로 눙을 치는” 혈기 왕성한 보르헤스를 만나 볼 수 있다. △3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좌절과 실패를 따뜻하게 노래한,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시인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에 대한 산문집이다. 역자 엄지영 교수의 표현처럼 “전기라는 장르의 규칙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카리에고라는 시인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는 일종의 전 텍스트”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을 형식에서부터 공고히 한다. 이 작품은 한 시인의 삶과 기억의 편린, 그가 남긴 시를 다루면서도 `탱고의 역사`, `말 탄 이들의 이야기`, `단도` 등에서는 20세기 초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근원적 의미와 풍요로운 전설까지 다채롭게 복원한다. 생명의 원초적 힘을 상징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태도, 그 호전적인 힘과 함께 독립적인 개인을 넘어서는 영원성, 증식하는 미로, 여러 시간이 공존하는 미학적 사건이 어우러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16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 전 사람 같은 사람의 말인지 살피라”

고전에서 시대정신을 길어 올리는 인문학자 정민 교수가 현대인에게 필요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전하는 책 `석복(惜福)`(김영사)을 펴냈다. 책은 풍부한 식견과 정치한 언어로 풀어낸 세상과 마음에 대한 통찰의 총망라라 할 수 있다. 선인들의 지혜가 깃든 100편의 네 음절 한자문구를 마음 간수, 공부의 요령, 발밑의 행복,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등 4가지 주제에 나눠 담았다.△제1부 마음 간수: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다잡는 마음 간수법책의 첫머리를 여는 장은 `석복겸공(惜福謙恭)`이다. `석복`은 비우고 내려놓아 복을 아낀다는 의미다. 광릉부원군 이극배(1422~1495)는 자제들을 경계해 이렇게 말한다.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자만해서는 안 된다(物盛則必衰 若等無或自滿).” 그러고는 두 손자의 이름을 수겸(守謙)과 수공(守恭)으로 지어주었다. 그는 다시 말한다. “처세의 방법은 이 두 글자를 넘는 법이 없다.” 자만을 멀리해 겸공(謙恭)으로 석복하라고 이른 것이다.△제2부 공부의 요령: 생각과 마음의 힘을 길러줄 옛글 속 명훈들이달충(1309~1385)의 `애오잠(愛惡箴)`에서 유비자는 무시옹에게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이유를 묻는다. 무시옹의 대답은 이렇다. “기뻐하고 두려워함은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거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인지의 여부를 살펴야 할 뿐이오(喜與懼當審其人吾不人吾 之人之人不人如何耳).” 즉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칭찬이라야 칭찬이지,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의 칭찬은 더없는 욕이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주장만 내세우며 틀렸다 맞았다 단정한다. 그럴 때는 어찌해야 할까? 내 마음의 저울에 달아 말하는 사람이 사람 같은 사람인가를 살피면 된다. 이 꼭지의 제목은 `당심기인(當審其人)`이다. `마땅히 그 사람을 살펴보라`는 의미다.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제3부 발밑의 행복: 사소함을 그르쳐 일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치침`검신용물(檢身容物)`에서는 검신, 즉 `몸가짐 단속`에 대한 명나라 구양덕의 말 “사소한 차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참됨에서 멀어진다(毫釐不辨 離眞愈遠)”가 등장한다. 관대한 것과 물러터진 것은 다르다. 굳셈과 과격함은 자주 헷갈린다. 성질부리는 것과 원칙 지키는 것, 잗다란 것과 꼼꼼한 것을 혼동하면 아랫사람이 피곤하다. 자리를 못 가리는 것을 남들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착각해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진무경(陳無競)이 제시한 용물, 곧 `타인을 포용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진실한 사람은 외골수인 경우가 많다. 질박하고 강개하면 속이 좁다. 민첩한 사람에게 꼼꼼함까지 기대하긴 힘들다. 좋은 점을 보아 단점을 포용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매섭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해야 한다.△제4부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당장의 이익과 만족에만 몰두하는 세태에 대한 일침유관현(1692~1764)은 필선(弼善)으로 서연(書筵)에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사도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1708~1766)이 제문을 지어 보냈는데 거기에는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꼽은 대목이 있다.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의미하는 `난자이사(難者二事)`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3-09

세상은 냉정히 흐르고 나는 아직도 거기에…

황혜경(45)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첫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2013) 이후 5년간 쓰고 고친 63편의 시가 담겼다.“빨리 팔고 빠지는 점포들을 여럿 알고 있다/며칠은 가방 어떤 날은 신발 다른 날은 양말 하루는 벨트와 지갑/명료함이란 그런 것이다/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복서의 주먹을 기억한다/단단함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아기 새 같은 것을 움켜쥐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유리의 소리를 머금고 있는 듯 shining(샤이닝)과 dark(다크) 사이에” (`shining과 dark 사이에` 중)시인은 “지나간 확실한 것을 믿는 마음으로 확실하게 지나간 것에 기댄다”고 말했다.“나는 언제나 늦되는 아이였다”라는 등단 소감처럼 황혜경은 현 시대의 급속한 변화와 미래지향적인 삶보다 늘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보고 그 낱낱의 의미를 헤아리는 데 공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현실과 자아의 괴리를 목도하곤 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바로 그 세상의 냉정한 흐름과 자신이 지닌 고유한 리듬 간의 어긋남을 토로하고 있다.“매미가 울더니 귀뚜라미가 울고/눈이 내리니 또 꽃이 필 것이다/절기는 예감하는 나보다 명확하다”―`어려운 예감` 부분명징한 사실성의 세계는 황혜경이 끊임없이 실패를 겪는 언어의 세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언어란 그 자체로 실체성을 갖지 못하고 다만 의미를 발생시키는 지시체로서 소통의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황혜경이 마주한 언어의 세계에서 나는 너와 필연적으로 불화를 일으킨다.“거울 앞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처음에 나는 나를 생각하다가 너를 생각해 너는? 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깃든 너를 바라봐”―`베란다 B`부분/윤희정기자

2018-03-09

과학, 인간 영생의 꿈 이루어 줄까

과연 인간은 기술 진보를 통해 생물학적 운명을 뛰어넘어 영생할 수 있을까.인류가 지적설계, 즉 과학기술을 이용해 스스로 진화한다는 주장은 이미 20년 전 등장했다. 1998년 영국 옥스포드대학 철학과 교수인 닉 보스트롬이 주도해 주창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감각, 지능, 수명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첨단 과학기술 운동을 말한다. 장애, 고통, 질병, 노화,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들을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생명과학과 신생기술이 그런 조건들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BNIC(Bio· Nano·Info·Cogno: 생명공학·분자나노·정보·인지과학) 기술의 발전 덕에 이들이 꿈꾸는 미래의 현실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아일랜드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마크 오코널은 `트랜스 휴머니즘`(문학동네)에서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앞선 인체냉동보존 시설인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을 찾아 죽음을 막는 방법을 살펴보고, 전자 장치를 피부 밑에 이식해 감각 능력을 강화하는 언더그라운드 바이오해커 집단을 찾는다. 이런 여정을 통해 저자는 새롭게 떠오르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논리적이면서도 유려하게 서술하고 있다./윤희정기자

2018-03-09

조선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읽었는가?

18~19세기 조선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읽었을까?저명한 역사 저술가 박영규 작가의 신작 `조선명저기행`(김영사)은 `목민심서` `난중일기` `동의보감` 등 조선시대 주요 저서 16종의 탄생 과정과 핵심 내용을 담았다.`조선명저기행`은 조선 명저의 세계를 여행하는 독자들을 위한 가이드북이다. 조선을 빛낸 16종의 명저들을 정치, 역사, 기행, 실학, 의학 등 5개 분야로 나눠 소개하면서 탄생 과정을 서술했고, 내용의 핵심을 요약했으며 그중에 재미있는 부분들을 골라내어 소개하고 해석했다. 또한 명저가 당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이었는지, 현실성과 합리성은 겸비한 것인지 등을 통해 냉정한 평을 담았다. 명저의 탄생에 영향을 끼친 다른 저서와 저자, 그리고 같은 분야의 또 다른 명저들을 함께 소개하는 작업도 병행했다.△올바른 목민관으로 사는 법, 정약용의 `목민심서``목민심서`는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지은 치민(治民)의 지침서다. 지방 수령이 부임(赴任)에서 해관(解官)에 이르기까지 지켜야 할 덕목과 지침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실무서다. 다산의 나이 57세에 지은 이 책은 행정 책임자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지침으로 삼을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다산은 책의 제목에 대해서 목민(牧民)이란 곧 치민(治民), 즉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고 `심서(心書)`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담은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지방 관리들의 폐단을 비판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며 앞으로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 목민관이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백성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나타내고 있다.△시대를 뛰어넘는 선지식의 탁견 사전 `성호사설``성호사설`은 조선 실학의 중조(中祖)라고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이 남긴 책으로 그의 나이 30대 말부터 여든 살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록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비록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이라는 뜻의 `사설(僿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결코 가볍고 보잘것없는 내용은 아니다. `성호사설`은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지리, 인물, 풍속, 과학을 망라한 이익의 탁견을 여지없이 드러낸 명작이다. 그중 인사문 `노비` 편과 `개자` 편은 학문하는 자라면 모름지기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조선 오백 년을 지배한 성문 헌법 `경국대전`조선 건국의 핵심 인물 삼봉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을 다듬어 만든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체계와 조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됐으며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모든 왕명과 교지를 모았고 그것들은 모두 법에 의거해 정책을 시행했다는 증거이자 일종의 원천 기안이었다. 성종 때에 완성된 `경국대전`으로 조선은 성문 법전에 의거한 법치의 국가였다는 근거를 마련했다.△조선 역사서의 실질적 최고봉 `연려실기술`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은 400종이 넘는 야사, 일기, 문집류 등 방대한 자료를 분석·분류해 실록 등 정사에서 언급되지 않는 역사의 이면과 새로운 관점의 인물 묘사를 소개한 조선 역사서의 명이다. `연려실`은 부친 이광사(1705~1777)가 지어준 서실의 이름이다. 아버지의 유배지인 완도군 신지도에서 42세에 저술을 시작해 30년에 걸쳐 완성했다. 태조 때부터 현종까지 283년간(1392~1674) 각 왕대 주요 사건뿐만 아니라 상신(相臣), 문신, 명신의 전기를 기술했다. 무엇보다 개인의 사견은 전혀 가미하지 않고 인용자료를 원문 그대로 실어 객관성이 뛰어나다.△18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박지원의 `열하일기``열하일기`는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 중국을 다녀오면서 북경에서 230km 떨어진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에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02

모순덩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함으로 경이로운…

`가난한 사람들`(민음사)은 러시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세계관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산문집이다. 혁명가이자 문학가였던 막심 고리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사조 아래 하층민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천착했다.이 책은 고리키가 스탈린 체제와 불화를 겪고 유럽을 떠돌던 때인 1924년 펴낸 `일기로부터의 단상. 회고`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바탕으로 한다. 고리키는 그 전해에 독일 베를린에서 해외 거주 러시아 작가들의 글을 모아 잡지 `대화`를 발간하고 `단상`, `일기로부터`라는 제목 아래 여러 편의 산문을 실었는데, 여기에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 28편의 글을 모아 책을 엮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기서 22편을 뽑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이 책에 담긴 그의 산문들은 그가 러시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에 관해 쓴 것이다. 고리키는 자신이 직접 만난 시골 농민들과 심약한 도시인들을 소개하는데, 이들은 “말과 생각이 뒤죽박죽”인 데다 너무나 특이해서 마치 지어낸 이야기들 같다.사소한 실랑이도 소송을 걸어 법정 공방을 일으켜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모자 제조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밀고장 쓰기를 즐기며 경찰과 친한 이 남자를 어찌하지 못한다. 또 자연을 찬미하기 좋아하는 시계공은 “어디에도 우리 러시아 별처럼 저렇게 아름다운 별들은 없지요!”라며 시를 지어 부르곤 하는데, 아이들 패기를 좋아해서 자기 아들까지 때려 죽게 만든다. 한편 어느 양치기 노인은 공부의 중요성을 말하는 고리키를 이렇게 타이르며 지식인이 하나 쓸모없다고 역설한다. “자네가 `공부`라고 말하면 내 귀에는 `거미`로 들린다네. (…..) 먹을 음식도 충분하지 않은데 뭔 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이 노인은 자신의 조카들을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에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모순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을 고리키는 작가 특유의 예리한 눈으로 끈질기게 관찰하며 인간 본성을 탐구해 들어간다.곳곳에서 이처럼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리석은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고리키는 러시아 민중의 근원적인 힘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다.“나는 러시아 인민들이 그 경이롭고 예측을 불허하는 신기한 재능으로 인해, 다시 말해 그들이 가진 곡예 부리듯 복잡다단한 생각과 감정으로 인해, 예술가에게는 가장 보람된 소재라고 확신한다.” “러시아에서는 심지어 바보들조차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리석고, 게으름뱅이조차 무언가 쓸 만한 자기만의 재능을 갖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02

무엇을 위하여…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 에세이

올해 백수(白壽·아흔아홉 살)를 맞은 철학계 원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산문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김영사)가 출간됐다. 많은 후학을 길러내고 1960년대부터 `고독이라는 병`을 비롯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를 내며 삶의 지침을 전파했던 김 교수가 평생에 걸쳐 쓴 글들 가운데 알짬만 모았다. 젊은 시절부터 마음 한편에서 지울 수 없었던 고독, 먼 곳에 대한 그리움에서부터, 인연, 이별, 소유, 종교, 나이 듦과 죽음, 그래도 희망을 품고 오늘을 애써 살아야 하는 이유까지, 그의 `삶의 철학` 전반을 엿볼 수 있다.개와 고양이와 어린 자녀들이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일화, 함께 수학했던 시인 윤동주 형에 대한 기억, `철학 교수`라고 좀 별난 사람 취급을 받곤 하는 처지에 얽힌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도 위트 있게 풀어낸다.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일본 조치(上智)대를 졸업하고 1954년부터 31년간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봉직했다. 그는 `철학 개론`, `철학 입문`, `역사철학` 같은 철학서를 집필하기도 했지만,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같은 에세이를 펴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수필이나 수상문을 쓰는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젊은 사람들 인생에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안겨주고 싶었다”는 소박한 심정을 털어놨지만, 그의 글은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이번에 간행된 책은 2008년에 나온 `세월은 흘러서 그리움을 남기고`와 2012년 발간된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에 실린 글을 엮었다. 첫머리에 수록된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만 저자가 새롭게 쓴 수필이다.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김형석 교수가 평생 해온 일이 바로 삶의 의미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철학자로서 반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저자 자신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사회 현실도 빠르게 변화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물음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 … 나도 같은 문제를 갖고 백수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온 셈이다. 그 열정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물음이기도 하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모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문제의식의 농도가 짙어져갔다. “`내`가 아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돼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고민, 평생을 해왔고, 지금도 씨름하고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향한 고민의 소산이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2-23

만물을 사모하는 詩人의 마음은 더 낮아지고

“우리는 서로에게환한 등불남을 온기움직이는 별멀리 가는 날개여러 계절 가꾼 정원뿌리에게는 부드러운 토양풀에게는 풀여치가을에게는 갈잎귀엣말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저녁서로의 바다에 가장 먼저 일어나는 파도고통의 구체적인 원인날마다 석양너무 큰 외투우리는 서로에게절반그러나 이만큼은 다른 입장”_ 문태준 시 `우리는 서로에게` 전문고요한 시선으로 세상을 지그시 바라보는 담백하고 서정적인 시로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문태준(48) 시인이 7번째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를 펴냈다.문태준 시인은 김천 출신으로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문학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 “가장 좋은 시집”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한국 현대 시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3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은 화려한 조명과 관심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우직하게 써내려간 63편의 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이번 시집에 이르러 더욱 깊어지고 한결 섬세해진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수사(修士)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믿음직스러운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특히 한 단어이거나 짧은 수식 구조의 제목만을 가져왔던 지난 시집들과 달리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문장형의 제목은 더욱 낮아지고, 여려지고, 보드라워진 시인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자 삼라만상을 `사모`의 마음으로 올려다보는 시인의 시선을 잘 대변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다.“문태준의 시를 읽을 때는 마치 숨결을 엿듣듯, 숨결을 느끼듯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의 시는 모래알처럼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거나 새털구름처럼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의 시는 어린아이의 숨결, 어머니의 숨결, 사랑하는 연인의 숨결처럼 맑고 온유하며 보드라운 세계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_이홍섭(시인), 해설 `숨결의 시, 숨결의 삶` 중에서시인은 `흰 뼈만 남은 고요`처럼, 아끼고 아껴 남겨놓은 단어로 시와 삶을 지어 건넨다. 때로 그 지극한 무구와 순수는 동심으로 가닿기도 하는데, 그가 자주 사용하는 꽃, 돌, 물, 산, 해, 나무와 같은 시어는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듣고 배운 단어와도 닮아있다. 시인의 순정한 목소리를 따라가다보면 비워내고 덜어낸 자리에서 솟아나는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말이 사라진 곳에서 오히려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이게 될 것이다. 나뭇가지가 조금만 진동해도 함께 떨리고, 부사 하나에도 깜짝 놀라며, 종결 어미의 변화에 완전히 달라지는 뉘앙스를 느끼는 시인의 경험은 고스란히 우리의 체험이 될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2-23

`틀을 깨는 파격` 비밀스런 당나라의 일상

중국 고전으로는 수많은 시와 소설이 거론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가도, 두목, 두보, 맹호연 등이 활약했던 당나라 시대의 당시(唐詩)다. 300여 년의 당 시기는 시의 황금시대라고 전해진다. 청나라때 편찬된 `전당시(全唐詩)`에는 작가의 수만 2천200여 명에 달하고 시는 5만여 수가 실려 당나라 이전까지 제작된 시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여서 이것만으로도 당 시대가 시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인간 삶을 자연에 빗댄 당 시는 상대방에게 직접 표현하기 껄끄러운 내용도 에둘러 전달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당나라 뒷골목을 읊다-(당시에서 건져낸 고대 중국의 풍속과 물정)`(글항아리)의 저자 마오샤오원은 이 책에서 당나라 사람들이 `여느 고대 중국의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한다. 이는 당나라가 당시 세계에 견줄 만한 나라가 없을 만큼 강성한 대국이었던 것과 관계있다. 당나라의 기세가 뻗어나갔던 만큼, 당나라 사람들의 기세도 치솟았으며, 이는 그들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에 새롭고 재미있는 풍경을 만들어냈다.당나라 사람들은 우선 자유로웠다.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었던 중국에서 당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시를 들고 권력자의 집을 닳도록 드나들었고, 자신의 시를 명승지에 걸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길 바랐다. 여성들은 모자를 벗고 옷깃을 낮춰 노출의 금기를 깨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고, 남장 등 자신을 빛낼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태평성대가 당나라 사람들의 자신감을 키웠고, 그들은 도덕이니 관습이니 하는 옛것에 휘둘리기보다 틀을 깨는 파격을 시도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또한 그 자유분방함으로 언제나 극단으로 나아가서, 늘 가장 큰 것, 가장 화려한 것, 가장 훌륭한 것을 추구했다. 꽃을 즐길 때는 자신의 집을 넘어 자신의 마을을 꽃으로 둘렀고, 술을 즐길 때는 수로를 만들어 술로 채우고 그 위에 배를 띄웠다. 자연을 곁에 둘 때는 바다를 보고 싶으면 방 하나를 물로 채우고, 키우는 새를 위해서는 물 위에 육지를 직접 만들어줬다. 강대국으로서 그들이 가졌던 생활의 여유, 마음의 여유가 보기 드물게 찬란한 생활 모습을 만들어냈다. 시로써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은 팽창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들끓는지를 알게 해준다.이렇듯 호기로웠던 당나라 사람들 중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집단을 둘 들자면 하나는 시인이다. 크고 눈부신 시대는 중국에서 유사 이래 손꼽히는 대시인들을 낳았고 위대한 시를 만들어냈다. 이백, 두보, 한유, 백거이, 왕유, 이상은, 피일휴, 원진, 사공도 등 역사에 남은 시인들이 이 시대에 태어나 깊은 궤적을 남겼다. 이백의`월녀시`, 두보의 `여인행`, 백거이의 `장한가`처럼 우리나라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시들과 함께 이름 모를 시인이 지은 이름 없는 아름다운 노래들 모두 번영했던 그 시대와 함께 흘러넘친 풍류와 기상을 보여준다. 위대한 시인을 낳은 시대답게 당나라는 시를 끔찍히 사랑한 시기였다. 당나라에서는 시인의 시 한 수가 웬만한 화폐보다 나았고, 기녀는 시를 외울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였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몸에 시화를 빼곡히 문신해넣었다.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그들의 이러한 시심(詩心)이 책 속에 가득 들어차 있다.또 다른 집단으로는 여성들이 있다. 마오샤오원은 여성 작가로서 당나라 여성들을 각별한 애정을 담아 그려냈다. 얼굴을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이마를 금빛으로 칠하던 그들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얼굴과 몸에 그늘을 드리웠던 갑갑한 복식을 벗어던진 대범함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시대 탓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도 잊지 않았다. 불합리한 결혼생활에 당나라 여성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기루의 여인들은 어떻게 길러졌으며 여러 속박에 묶인 처지에서도 어떻게 당당할 수 있었는지를 설도 등 당대 여류 시인들의 시와 함께 엮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2-09

손바닥 안에 삶의 희망을 쥐고 사는 사람들의 간절함

소설가 고(故) 정미경은 지난해 1월 18일 작고하기 전까지 5권의 소설집, 4권의 장편소설을 남기며 한국소설사에 독자적인 자리를 만들어 왔다. 이상문학상과 오늘의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정미경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갈구했고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탐구했고 새로운 직업이나 사회환경 등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양한 층위에서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 한 편의 소설도 허투루 써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지 1년, 화가이자 그의 남편인 김병종이 그의 집필실에서 찾아낸 한 편의 소설이 세상에 선보인다. 어디에도 발표된 적 없는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문학동네)이다.`당신의 아주 먼 섬`은 남도의 어느 작은 섬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세밀하게 펼쳐 보이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정미경은 섬을 떠났으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세심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오래전 자신이 나고 자란 섬을 떠나 예술가로서 자신의 성공만을 좇는 연수는 고등학생 딸 이우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이우가 불의의 사고로 친구 태이를 잃고 상담실과 병원을 전전하며 방황하자 연수는 결국 섬에 귀향해 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 정모에게 이우를 부탁한다. 정모는 점차 시력을 잃어가며 삶에 대한 욕심도 잃어가는 중이었지만,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내려온 섬의 소금 창고에서 묘한 기운을 느낀다. 마침내 정모는 소금 창고를 도서관으로 꾸밀 무모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정모에게 소금 창고를 내준 친구 태원은 섬의 유지인 영도의 아들로 연수와 사귀었던 사이이고, 정모는 남몰래 연수를 마음에 두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정모는 이우와 함께 도서관을 만들어가며 차츰 자신을 어지럽힌 과거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앞으로의 일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다. 이우 역시 정모와 그리고 말 못하는 섬 소년 판도와 생활하며 태이에 대한 기억을 슬픔이란 그릇에 담긴 따뜻함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판도가 선물하는 침묵과 손바닥에 써주는 다정한 말들에 야릇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수익성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정모가 못마땅한 영도는 개관이 임박한 도서관을 원상 복구시킬 것을 요구하는데….`당신의 아주 먼 섬`은 손바닥 안에 삶의 희망을 쥐고 사는 사람들의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다. 건너갈 희망이 있을 때 삶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각자의 눈은 모두 다르다. 하나하나 떼어 한 편 한 편의 소설로 엮어도 될 만큼 인물들의 사연이 얽히고설켜 있지만, 누구의 삶도 소홀히 흘려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궤적에 침잠할 줄 알았던 정미경식 소설 쓰기의 장점이 돋보인다. 모래 언덕에 퍼질러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바닥에 고, 마, 워, 라고 쓰는 손길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러니까 한 순간도 삶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강렬한 바람을 섬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풀어낸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질주하는 듯이 빠르고 정확하게 이어지던 문장에도 변화가 느껴진다. 배경으로 상정한 전남 신안을 작가가 실제로 오가며 소설을 쓴 탓인지 행간에도 도시적인 차가움보다는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듯한 여유가 엿보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2-09

한국 시민사회와 `촛불`, 한계와 지향점은

한국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그 민낯과 속살의 실상은 어떠한가? 어떤 한계에 봉착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가? `촛불 너머`의 성찰적 시민사회와 성숙한 민주공화정 국가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없거나 모자라는 `시민`으로서의 자질은 무엇인가? `촛불 너머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아시아)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연구와 사유의 결실이다.이 책에서 윤평중, 이진우, 전상인, 임지현, 김석호 등 다섯 명의 국내 지식인들은 저마다 다른 다섯 개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고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다섯 개의 길을 닦아두고 있다.윤평중 교수(한신대)는 `삶의 정치와 성찰적 시민사회─진리정치 비판`에서 자유로운 상호비판과 자기성찰을 적대시하는 진리정치의 타성을 극복하고 생활세계에서 사람들이 삶을 구체적으로 살려내는 생명정치로서의 미시정치적 `삶의 정치`의 구현에 대한 통찰과 사유를 피력한다.이진우 교수(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는 `우리는 어떻게 시민이 되는가?─성숙한 시민사회의 실천철학`에서 압축성장의 국가중심주의가 야기한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시민 없는 국민국가`와 `시민 없는 시민사회`로 압축된다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조화롭게 의식하고 공동체의 관심사에 적극 참여하는 `개인`의 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전상인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는 `마음의 습관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마음의 핵심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기본단위로서 `개인`을 주목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배제되었던, 인간 존중과 자기 결정을 인격화한 `개인`의 탄생이 `시민`의 미생도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혀낸다.임지현 교수(서강대)는 `기억: 21세기 한반도의 열려 있는 기억 문화를 위하여`를 통해 이념적 대립이 기억의 투쟁으로 전이되는 현상이 뚜렷해지는 21세기 지구적 상황에서 역사의 희생자의식이 국가적 프로젝트에 민중을 동원하는 민족주의적 권력논리를 정당화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세계사적인 위험사례들을 탐사하고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타자의 고통과 연대하면서 보편적 인권의 기억으로 진화해야만 이웃과 미래를 향해 열리게 되는 한국 시민사회의 길을 제시한다.김석호 교수(서울대)는 `한국인의 습속(習俗)과 시민성,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통계자료를 통해 한국인의 `시민성` 수준을 알려주고 민주사회의 존속과 진보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화적 속성인 `시민성`에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에 대한 과도한 배타적 강조가 의무보다 권리에 치중해 있는 한국인의 왜곡된 `시민성`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소지를 경계하면서, 특히 시민사회 본연의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민`이 권력의 주체로서 사회적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양한 유형의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한편, `촛불 너머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는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미래전략연구` 시리즈로 기획한 아홉 번째 단행본이다. 지난 2013년 2월 포스텍 부설로 출범한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는 미래사회를 조망하고 대응전략을 탐색하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그 연구 결실들로서 `박태준미래전략연구총서`를 지속적으로 출간해 나가고 있다./윤희정기자

2018-02-02

`인문주의` 그 노스탤지어를 향해…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반비)은 재일조선인 2세인 저자 서경식(67) 교수(도쿄경제대)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다양한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을 만나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삶을 조명한 에세이`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한 바 있고, 카라바조, 단테, 미켈란젤로, 나탈리 긴츠부르그, 레오네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를 소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써왔다.하지만 이 책에 엮인 내용은 조금 특별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 저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전과 연결되지만 주된 관심은 `근대 인문학의 황혼`이라고 할 법한 시대적 변화로 한 발 옮겨져 있다. 60대의 저자가 찾은 이탈리아는 어딘가 조금 달라졌다.이 책에서는 카라바조, 조르조 모란디, 마리노 마리니, 주세페 스칼라리니 등의 작가와 작품이 소개된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지만 각자의 시대 각자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고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혁명가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가차 없이 그려냈다거나, 파시즘의 시대에 고전성, 고요함, 조화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반파시즘적인 가치를 추구했다거나, 또 이탈리아 곳곳을 수차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더해져 생생한 이탈리아 여행기로도 읽힌다./윤희정기자

2018-02-02

작은 존재들과 공생·공명하는 일상

`반성과 성찰의 시인`최두석의 일곱번째 시집 `숨살이꽃`(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쓰고 고쳐온 66편의 시가 한데 묶였다. 이번 시집`숨살이꽃`에서 그는 피와 살, 숨이 돌아오는 충만한 세계를 그만의 낙천성과 유머로 아름답게 그려낸다.“멸치야 갈치야 날 살려라/너는 죽고 나는 살자/에야 술배야/가거도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를/밥상머리에서 환청으로 듣곤 한다”(….)`술배소리` 부분.7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연꽃 씨앗에서 발아한 `아라홍련`, 바리데기 설화 속 상상의 꽃 `숨살이꽃` 등 최두석은 시의 소재들, 특히 `꽃`에 설화와 역사를 기입하며 그 의미망을 넓힌다. 시인은 전작들에서도 흥부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아기장수 설화 등 꾸준히 고전이나 설화를 변주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해온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설화적 소재들이 그의 초기작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진 채 살아가는 상처 입은 민중들로 주로 현현됐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맡는다. 이로써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시인의 정신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점점 더 선명해진다.최두석 시인은 사실성과 서정성이 결합된 시작 활동과 더불어 `이야기 시론`이라는 리얼리즘 시론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다. 오장환문학상·불교문예작품상 등을 수상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2-02

나는 언제부터 혼자였나… 내안의 외로움과 마주함

우리는 흔히 외로움을 성격적 결함으로 여기거나 외로움의 원인을 오직 자기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리고 더욱 외로워진다. 외로움을 약점이자 단점으로 여겨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스스로를 더욱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밀어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코스모폴리탄`이 선정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 중 한 명인 에바 블로다레크는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솔직하고 다정하게 내 안의 고독과 만나는 방법)`(문학동네)에서 늘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고 다정하게 마음속 고독과 마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외로움의 뿌리부터 삶의 주기별 외로움, 관계를 만드는 기술까지, 저자는 시시콜콜할 정도로 섬세하게 외로움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며, 궁극적으로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저자는 “외로움에 대한 책을 집어든 당신, `고통`이나 `과거의 상처` 같은 단어를 접하고도 책장을 덮지 않은 당신은 용감하고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멋진 무기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강조한다.1부 `외로움에 대한 시시콜콜한 고찰`에서는 내가 언제부터 혼자였던 건지, 외로움의 싹을 찾아보며 `그때의 나`를 안아줌으로써 `오래된 나`와 작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일중독자 가면, SNS 가면, 고슴도치의 가면 등 지금 쓰고 있는 외로움의 가면들이 어떻게 진짜 나를 지워버리는지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사춘기, 중년기, 노년기 등 `삶의 주기별 외로움`에 대한 설명은 외로움을 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도록 돕는다.2부 `혼자는 외롭고, 둘은 괴로운 사람들`은 외로움의 원인을 `나`가 아닌 `관계`의 측면에서 살핀다. 내가 `잘못된 만남`을 반복하는 이유, 옆에 누군가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원인을 살펴보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내면의 힘을 기르는 방법을 소개한다.3부 `외로움에 작별을 고하는 법`은 단순히 외로움에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내 안의 나와 마주함으로써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3부에서는 대상이 나든 남이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명한 관계를 맺는 기술을 소개하기도 한다.에바 블로다레크는 독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함부르크 대학에서 `행복`을 주제로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나 마주치기 마련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심리학자로,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집필한 책 다수가 번역돼 세계 각국에 소개됐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1-26

천재과학자 파인만 탄생 100주년… 그의 삶과 과학

20세기 천재 과학자 리퍼드 파인만 탄생 100주년과 사망 30주기를 맞아 그의 자서전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전 2권)와 에세이집 `남이야 뭐라하건`을 한데 묶은 `클래식 파인만`(사이언스북스 펴냄)이 출간됐다.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연구로 1965년 줄리언 슈윙거·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자론의 개척자다.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프로젝트에도 연구진으로 참여했고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고의 원인을 밝혀내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클래식 파인만`은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2`와 `남이야 뭐라 하건` 세 권의 합본판이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시리즈와 `남이야 뭐라 하건`은 20년 가까이 과학 도서계의 필독서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클래식 파인만`은 이 책들을 한데 모아 완전판으로 구성한 책이다. 고전들을 새로 출간한 리커버판이 열풍을 일으키는 것은 과거의 지나간 역사에서 현대적인 통찰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방증이지만, 과학 도서계에서는 그런 열풍이 비교적 잠잠했다. 그러나 20세기 과학의 바톤을 받아 나아가야 하는 지금 파인만의 삶과 과학 이야기를 한데 묶은 이 책은 21세기 과학을 새로 상상하고 만들어 나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클래식이 될 것이다.이 책은 세 권의 합본판인만큼 파인만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포함한다. 파인만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대학 생활, 일찍 사별한 알린과의 사랑, 로스앨러모스 프로젝트 참여와 코넬 대학교 및 칼텍 교수 생활, 워싱턴에서 나사 우주 왕복선 진상 조사 위원회에 참여한 일을 비롯해 그의 삶과 과학에 일어난 사소한 일화까지 포함하고 있다. `클래식 파인만`은 이 일화들을 연대순으로 재편집해 파인만의 삶에 대한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윤희정기자

2018-01-26

현실의 편견과 아집을 벗어버린 자유의 시간, 또는 시의 시간들

▲고은 시인 신작시집`어느날` 발간단시 217편 묶어“이 세상 구석구석/ 벅찬 감동이여// 너도/ 너도/ 너도/ 살아/잠 못 자는 심장으로/ 죽어/ 횅한 해골 눈구멍으로 감동을 먹어”(고은 `어느 날 124`전문)“`어느 날`은 자유를 위한 성찰과 통찰을 거쳐 `나`와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고 부정과 불의를 극복한 세상에 도달하려는 열망”(문학평론가 이형권 )고은(84) 시인이 신작 시집 `어느 날`(발견)을 펴냈다.1958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한 고은 시인은 그간 참여시 계열의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독재정권과 싸우는 재야운동가로 인식됐지만 그의 시는 참여·순수의 구별은 물론 시공간, 이승과 저승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세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이번 시집은 그동안의 시와 달리 노년의 삶에 대한 허무 의식과 시에 대한 원숙한 의식을 전경화한 거장의 감동적인 시편이 새롭게 다가온다.시집엔 `어느 날`이라는 제목의 단시 217편이 묶였다. 미수(米壽)를 앞둔 노시인의 원숙하고 노련한 시적 상상력을 맛 볼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과 부면들에 대한 통찰과 관련되는 비판과 저항 정신이 번뜩이지만 통찰이나 비판의 대상이 반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인간적인 사회, 디지털 자본주의 사회, 배타주의적 편견 사회 등으로 확장되는 점이 이전과 다른 모습이다.▲ 젊은 날의 고은 시인또한 현실의 편견과 아집을 벗어버린 자유의 시간, 시의 시간을 오롯이 담았고, 노년의 시간에 다가온 허무와 죽음 의식 또한 삶에 대한 하나의 인식 방법으로 구체화돼 나타나 있다. 이번 시집의 시들은 모두 짧다. 제목처럼 어느 날 시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불교의 선(禪)문답처럼 한두 마디씩 풀어놓은 듯하다.시인은 이런 짧은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1960년대부터 단시를 쓰는 버릇이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며 여기에 이른다. 저 중앙아시아 알타이 고원이나 거기서 더 서쪽인 스카타, 이들에게 지향 없이 이어지는 구비서사의 긴 음영(吟詠)은 어느덧 해 뜨는 한반도의 나머지까지 그 핏줄이 이어진다. 그래서 나의 유서 깊은 서사본능은 몇 개의 장편 시편들 낳고 또 낳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역정의 시 가녘에서 단시의 반증이 나선다. 솥뚜껑 위의 참깨인 양 튀어 오르기도 하고 두메 샘물로 넘쳐나기도 한다.”시는 짧은 한두 줄로 끝나지만, 참선하는 수도자들이 진리를 찾으며 주고받는 대화처럼 그 안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다.이형권 문학평론가는 “`어느 날`은 자유를 위한 성찰과 통찰을 거쳐 `나`와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고 부정과 불의를 극복한 세상에 도달하려는 열망을 노래하려는 연작시”라고 설명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1-26

나쁜 습관에 중독된 현대인들을 위한 탈출 안내서

오래 굳어진 나쁜 생활 습관은 자주 크게 반성하는 노력을 더해 마음에 한 점도 나쁜 습관이 남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없이 진정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습관의 감옥`(판미동)은 `에버그린` `레인보우 커넥션` 등의 음악으로 오스카상과 그래미상을 받은 저명한 작곡가와 영화 `쇼퍼홀릭`의 시나리오를 쓴 할리우드 극작가가 나쁜 습관과 중독, 심리적 문제들을 이겨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80여 년 전통의 확실한 중독 치유법을 이용해 일상의 다양한 나쁜 습관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이 책의 저자들은 한때 자신의 삶을 옥죄는 `문제들`에 갇혀 있었다. 유명 작곡가인 폴 윌리엄스는 심각한 알코올과 코카인 중독에 빠져 정신발작을 겪고, 치료를 받은 후 25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 맑은 정신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의 동료인 트레이시 잭슨은 쇼핑 중독, 관계 중독, 강박증 등으로 치료와 상담을 받아 왔다. 둘에게는 공통적으로 비만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저자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이겨 내고,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들은 알코올중독자협회(AA)의 12단계 치유법이 중독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에도 효과가 있음을 확신하고, 이를 쉽게 변형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열쇠`로 정리했다.중독 치유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한 폴은 치유 전문가로 거듭날 정도로 치유의 과정과 성격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트레이시는 극작가답게 관찰과 취재를 통해 사회적·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다각도로 치유에 접근한다.저자들은 우리 모두가 현실에 중독된 채 `습관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실수, 자신의 한계에 대한 좌절, 벗어나지 못하는 이 평범하고 지루한 삶 자체가 바로 `현실에 중독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모두에겐 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주체성을 잃고 습관에 얽매인 채로 끌려간다. 습관 때문에 우리는 나쁜 것과 결별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가 진짜 원하던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나쁜 습관은 평온한 삶을 망가뜨리고, 목표와 성취를 좌절시키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가 모두 `중독`임을 지적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솔루션 가이드를 제공한다. 책에는 자신의 습관이 얼마나 안 좋은지 점검해 볼 수 있는 문항들도 소개돼 있다.책에서 언급되는 변화의 열쇠들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기`, `변명하지 않기`, `부정적인 감정에 굴복하지 않기`,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기` 등이다. 많은 중독 치료 프로그램에서 강조하는 감사와 신뢰, 사랑과같은 개념들을 기반으로 중독의 고리를 하나씩 끊어 나가는 일은 나쁜 습관으로 둘러싸인 일상, 현실의 굴레를 탈피하는 데도 강력하게 도움이 된다.“자기 방해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은 정반대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상식적이기보다 충동적이며 관리를 해야 할 때 항복해 버리고 욕망으로 직행한다. 같은 맥락에서 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술에 관한 문제가 있는 사람은 술에 손을 뻗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불어 술 대신 무엇이 되었든 일시적인 쾌락(또는 고통)을 주는 것을 찾지 않는 법, 그들이 진정 원하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에 손을 뻗지 않는 방법도 함께 훈련해야 한다”(p. 206)/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1-19

포스터모던 대중사회 주체 개인주의 넘어 다시 `부족`

`부족의 시대(Le temps des tribus·문학동네)`는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73)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88년 프랑스에서 초판이 출간된 이후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현재 파리5대학 명예교수인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실천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철학, 문학, 사회학, 인류학을 아우르는 포스트모던 사회학의 기수로 불린다. 20세기 유럽의 대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년)의 뒤를 잇는 사회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다책은 인류학적 통찰로 시들어가던 포스트모던 담론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전자 은하계`에서 살아갈 대중의 속성을 시대를 앞서 전망한 예언적 저서다.이 책에서 마페졸리는 개인주의 신화에 종언을 고한다. 근대 이전이 공동체 사회였다면 근대는 개인의 시대이며, 이어 등장한 포스트모던 대중사회의 키워드는`부족`이다. 씨족, 혈족 중심의 고대 부족이 아니라 문화, 스포츠, 성(性), 종교 등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 불규칙하게 재편되는 소집단들을 통해 새로운 부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즉 오늘날 대중사회에서 인간은 개인주의를 버리고 소집단들로 뭉치며 다시 부족화하고 있다. 물론 이런 부족은 언론계에도, 학계에도, 법조계에도 존재하며 학연과 지연에 따른 편 가르기 문화로도 나타난다. 또한 `일베`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 특정 유명인에 대한 팬덤도 모두 부족화 현상의 단면일 수 있다. 분명 부족주의는 긍정적인 활력뿐 아니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도 발산한다. 하지만 마페졸리는 다원주의, 수평적 네트워크, 감성적 연대, 촉각적 관계에 기반한 신부족주의에서 파괴하고 생성하는 창조적 힘을 재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신부족주의의 행위자는 근대적 주체, 합리적 성인이 아닌 `영원한 아이`이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디오니소스`다. 이 디오니소스는 삶의 아노미적인 것들, 유희적이고 무질서한 측면을 나타낸다.“지나치게 합리화된 우리 사회, 그렇기에 살균된 사회, 필사적으로 모든 위험을 막아내려는 사회, 바로 그러한 사회 속으로 야만스러운 것이 되돌아온다. 바로 그것이 부족주의의 의미다.”(19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1-19

일상의 진솔함… 그 속에 읽을수록 남는 긴 여운

“언제나 안개가 짙은/안개의 나라에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나도/안개 때문에/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안개 속에 사노라면/안개에 익숙해져/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보려고 하지 말고/들어야 한다/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귀는 자꾸 커진다/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토끼 같은 사람들이/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의 나라` 전문)김광규 시인(77)이 40여 년 시 인생이 담긴 시선집 `안개의 나라`(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그는 1975년 등단한 이후 열 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다. 4·19의 아픔을 노래한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니다 그렇지 않다` 등의 시편으로 사랑받아 온 그이다. 그의 시는 한편 쉬운 언어와 평범한 생활 소재를 이용해 우리 삶의 일상성 영역을 개척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이러니 기법이 있다. 한 평론가는 “그의 시는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읽을수록 마음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긴다”고 평한다. 삶과 현실의 구체적 체험을 평이하고 친숙한 언어로 형상화한 시들이 많은 독자의 공감과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이번 시선집은 군부의 검열로 배포가 금지됐다 이듬해에 출시됐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1979)에서 등단 40년을 맞은`오른손이 아픈 날`(2016)까지 총 11권의 시집, 800여 편의 작품 중 시인이 자선한 224편을 묶었다.투명한 이미지와 명징한 서술로 현실 삶과 시대를 통찰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그의 시는 세속의 폭압적 질서에 저항하고 인간 삶의 모순과 허위를 어김없이 짚어내는 그 순간에도 차분하고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외형적 단순성과 내적 비의(秘義) 사이의 긴장을 형성하는 시인 특유의 아이러니 역시 그의 시를 오롯이 감상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삶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내밀한 공감과 시 한 편을 맺기까지 수차례 고쳐 쓰는 과정에서 비롯했을 김광규 시의 매력은 국내외에서 크게 인정받아 녹원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독일 예술원의 프리드리히 군돌프 상과 한독협회의 이미륵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올해 희수를 맞은 시인은 변함없이 틈날 때마다 이면지에 연필로 몇 줄씩 `끼적거린다`. 40여 년 지속돼온 그의 오랜 버릇은 `오늘도 글을 쓴다`는 말의 정신과 자세의 실천이자, 현대 한국 시사에 의미 깊은 `일상시`의 지평을 여는 데 한몫했다.오랜 세월 시인인 동시에 번역가, 문학 교수로 살아온 김광규는 한 산문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글쓰기의 간접적 지표가 됐다”고 밝히며, “독일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비의적 서정시에서 엄격한 언어의 형식을 배우고, 프란츠 카프카의 부조리한 소설에서 난해한 내용과는 달리 즉물적이고 정확한 문장을 사용한 데서 서술의 명징성을 배웠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김광규, `나의 시를 말한다`, 2001).▲ 김광규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외적 평이함과 내적 비의(秘義)가 빚어내는 긴장으로 가득한 김광규 시 세계의 연원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인에게는 세상의 메마름을 견뎌내게 하는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정말로 위대한 시란 바로 이 근거에 육박하는 물질의 유희이다. 이 믿음이 존재의 근저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고독을 이겨내게 하고 자기 존재의 심연을 열어 보이게 한다.김광규는 한편으로 악이 군림하는 이 세계를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심오한 근거 위에 존재하는 이 세계를 포용한다. 그의 꾸밈없는 도덕주의는 무병 신음을 경계하면서도 상처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상처들을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을 믿는다. 그것은 꽃잎처럼 가녀린 손이고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고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이다.” ―김인환(문학평론가), 해설 `지상의 거처`에서/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1-19

겪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다

▲ `늙은 여자를 만났다` 최옥정 지음·예옥 펴냄 소설·1만3천원작가에게 `잘 쓰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은 `성실하게 쓰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소설가 최옥정(54)은 주목받아 마땅한 사람이다.보통의 작가들보다 늦은 30대 중반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최옥정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마라톤 선수처럼 20년을 질주해왔다. 우직했고 정직했으며,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소설가에게 맡겨진 소임은 `소설을 쓰는 것`.최 작가의 경우엔 소설만이 아니었다. 산문집을 통해 인간의 삶에 새겨진 미세한 흔적들을 관찰했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글쓰기 노하우도 공개했다.최근 1년 사이에 최옥정은 적지 않은 책을 내놓았다. 장편소설 `매창`, 문장을 훈련하고 자신의 생각을 그 안에 담아내는 방법을 알려준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 그리고 최근 출간된 작품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까지. `늙은 여자를 만났다`엔 살아서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동유럽 체코로 떠나는 여자가 등장한다. 또 다른 소설을 쓰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날 것만 같은 최옥정을 붙들고 인터뷰를 부탁했다.-새로운 소설집이 나왔다. 이제까지 적지 않은 책을 냈지만 낼 때마다 심경은 다를 듯하다. 어떤 기분인가?“첫 번째 창작집이 나온 지 십 년이 넘었다. 이 소설집에 담긴 소설들은 나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 편 한 편마다 그 소설을 쓸 때의 내 삶이 보인다. 그래서 애틋하기고 하고 짠하기도 하다. 오래도록 포기하지 않고 내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는 점은 스스로 격려해주고 싶다. 내가 우직한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늙은 여자를 만났다`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표제작이기도 한데 `늙은 여자`라는 게 단순히 `나이 많은 여자`를 뜻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인가?“쓸 때는 뭔가에 이끌려 쓰니까 사실 내 안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 몰랐다. 여덟 개의 작품이 창작집 하나로 묶이니까 내가 삶의 시련과 고통을 몸에 새기면서 늙어온 여자가 가진 생명력에 관심이 많다는 게 보였다.흔히 고생하면서 나이 먹은 여자가 강퍅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막상 만나보면 그들에게는 인간, 특히 약한 인간에 대한 연대감이랄까 연민, 보살피고 보듬어주려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나는 항상 그게 신기했다. 겪어본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나를 건너가서 너에게 다다르려는 그 마음에 늘 경탄했다.그동안 내가 이렇게 나이든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운이 좋았다는 건가. 정릉에 대한 소설에도 `육백 살 먹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조선시대 왕비의 정령이 정릉에 살고 있다고 느끼고 거기서 묘한 위안을 받는다.”-평론가 이경재는 “최옥정의 소설에서 인간은 온전한 삶의 의미나 목적 없이 생존을 이어간다. 작가는 이 허방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고 평했다.“나는 줄곧 인생에서 목적이나 의미를 찾고자 애쓰면서 살아온 인간에 속한다. 나를 방치하거나 되는대로 나를 세상 흐름에 맡기는 대범한 사람은 아니다. 늘 애면글면 뭔가를 모색해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소설을 쓰면서 인물을 만들어 나갈 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생존에 대한 의지가 삶의 의미에 앞선다는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했다.실패할 줄 알면서 살기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도모하다 부서지는 인간들한테 관심이 많다. 이런 인간들은 자기가 아픈 줄도 망한 줄도 모른다. 그냥 원래 그렇게 살아야하는 줄 알고 힘겹게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소설은 진짜여야 한다`. 얼핏 터무니없는 것 같은 이 말을 바라보며 소설을 써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문학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준다면.“국문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소설을 어떻게 써야할 줄 몰랐다. 그래서 소위 소설쓰기를 익히고 여러 편의 소설을 써오면서 느낀 건데 삶과 함께 가지 않는 이야기는 결국 실패한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몸으로 찾아낸 이 세상의 그 무엇, 그것이 작고 보잘것없고 별게 아니라도 그것만이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지어낸 것에서는 금방 먼지가 날리고 진기가 날아가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의 삶에서 추출한 이야기만을 하게 된다. 잘 모르는 이야기는 아무리 교묘하게 만들어도 쓰는 나도 재미없고 읽는 독자도 재미없어 한다.”-대학을 졸업하고 영어교사를 하다가 30대 중반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교사직을 버리고 소설로 옮겨간 계기가 있는가?“교사는 오래 하지 않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내가 가르친 학생은 모두 영문과에 가고 싶어 하기에 내가 좋은 선생인 줄 알았다. 나는 확실히 아이들이 영어를 좋아하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런데 학교는 시스템이 있고 가르치는 일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봐야지 않을까 하는 패기가 그때는 있었다.작가의 길에 들어선 걸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돈은 못 벌지만 나에게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읽고 생각하고 끼적거리며 궁리하는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 나는 심심한 걸 잘 모르고 지루해하지도 않는다. 소설 쓰면서 매일 캐릭터를 데리고 다니며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다 쓰고 나서 고치고 또 고치는 노동을 힘든 줄 모르고 한다.”-깨물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그러니 어려운 질문이다. 작품집 `늙은 여자를 만났다` 중 딱 한 작품만을 골라 읽을 독자가 있다면 어떤 걸 추천하고 싶은지?“`일요일의 달팽이`다. 잘 써서라기보다 앞으로 내가 아무리 소설을 잘 쓰게 돼도 이런 느낌의 소설은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다. 기술적으로 잘 썼다기보다 이 뜨겁고 맑은 마음, 한 가지를 미친 듯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애착이 간다. 문체도 분위기도 독특해서 이런 시도를 해봤다는 것에도 점수를 주고 싶다.”-`늙은 여자를 만났다`를 관통하는 세계관이나 철학은 뭔가?“세계관, 철학 그런 건 나중에 결과론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그때그때 내 앞에 닥친 일,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걸 쓸 뿐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기 삶을 사랑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나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으며 걸어가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그게 내가 아는 인생일 거다. 나는 아프다고 크게 우는 사람보다 아픈데 아픈 줄도 모르고 울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사람에게 더 공감한다. 그런 사람들 이야기다.”-2016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 동안 3권의 책을 숨 가쁘게 출간했다. 이번 단편집, 장편소설 `매창`,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까지. `다작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는데, 어떻게 답할 텐가.“다작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책을 못 내다가 계약한 책들이 올해 한꺼번에 나온 거다. 해마다 한 권씩 나오면 좋으련만 출판사마다 사정이 있고 출판시장도 녹록치 않아서 일이 그렇게 됐다. 나는 언제나 글을 쓴다. 거의 호흡처럼 글을 쓰면서 생각하고 느낀다. 책이 나오는 건 내 리듬이나 작업 결과와는 별개의 일이다.”-`매창`과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해주면 좋겠다. 이 두 권의 책을 쓸 때는 어떤 심정이었고, 어떤 필요성에 의해 출간한 것인가?“얘기했다시피 나는 내가 아는 것, 확실히 갈피를 잡은 것에 대해서밖에 말하지 못한다. 인사동에서 9년 정도 한문고전 읽기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매창`은 그 시절에 모티브를 얻어서 쓰게 됐다. 천재이며 기인이었던 허균의 여자 친구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평생 허균과 육체관계를 갖지 않은 소울메이트로 서로를 성장시킨 관계를 맺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빼어난 시를 40편 넘게 남길 수 있었던 시적 재능과 타인을 통해 자신의 지평을 넓힐 줄 아는 천품에 반해서 쓰게 되었다.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고생도 많이 했고 3년도 더 걸린 작품이라 애착도 가장 많다.`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역시 내가 오십이 되면서 내 주위사람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느끼게 됐다. 배울 만큼 배우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퇴직을 앞두고 갑자기 사춘기 아이들처럼 허둥대고 헤매는 걸 봤다. 아, 이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 지금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남은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고 강의를 하면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됐다. 거기에 현재의 내 삶을 담은 에세이를 합쳐서 책을 냈다. 이 책은 나보다 독자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평론가 방민호는 “나는 그녀에게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운다. 삶과 문학이 어떻게 아름답게 맞물릴 수 있는지”라는 말로 당신의 문학적 태도를 상찬했다“과분한 말이다. 부끄럽다. 더 열심히 뭔가를 했어야 하지 않나,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작가의 말`에도 썼듯 다만 내가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 흔들리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만큼은 칭찬해주고 싶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해준 소설가 최옥정.-30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50대 중반이 됐다. 이제 소설이 무엇이고, 소설가는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는지? “여전히 소설 앞에서는 맨 처음의 어리둥절함을 느낀다. 매번 `어떻게 써야하지?` 고민하면서 한 글자씩 타이핑을 한다. 한 가지 좀 분명해진 건 있다. 이 세상에 속일 사람 하나도 없다. 남도 못 속이고 나도 못 속인다. 그냥 정직하게 나만큼만 쓰자, 그런 마음으로 쓴다.”-식상하고 빤한 질문이지만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위에서 충분히 한 것 같다. 이런 얘기를 얼마 전에 다른 작가들과 한 적이 있다. 당신이 쓰고 싶은 궁극의 소설은 무엇인가? 그때 들은 답이 우문현답이었다. `작가에게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 궁극의 소설이야.` 소설을 쓰고 있다면 그 자체로 그것이 최고의 상태인 것이다.”-독자와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책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히 소설을 많이 읽기를 바란다. 나는 믿는다. 소설 읽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내가 아닌 타인이 언제나 마음을 열고 인생을 보여주며 기다리고 있는 소설, 올해는 많은 사람이 읽기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1-12

신간 책꽂이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동양북스“20년 동안 2천800명의 마지막 길을 지킨 호스피스 전문의 오자와 다케토시의 이별 수업”이란 헤드 카피를 달고 출간된 책.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죽음이 목전에 닥쳤을 때, 인간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한다고 한다. 세상에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 후회를 줄이기 위해선 어떤 방식의 삶을 지향해야 할까? 하루하루를 `내 인생 마지막 날`로 여기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김생민 쓰지마! 가계부` · 김영사한편으로 보면 지독한 구두쇠지만, 다른 측면에선 효율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것으로 유명한 개그맨 김생민이 전하는 절약의 노하우. 그는 “자산을 체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계부를 쓰는 것”이라 조언한다.서울예술대를 졸업하고 1992년 KBS 개그맨이 된 김생민은 20여 년 이상 `TV 동물농장` `출발! 비디오 여행` 등에 출연하며, 알뜰한 소비를 통해 알부자가 된 사람으로 유명하다. 책은 계획을 세우고, 절약하는 습관을 기르며, 철저한 결산을 통해 자산을 꾸준히 늘려간 그가 전하는 현명한 소비와 저축 방법을 담았다. ◆`눈물이 녹는 시간` · 이다SNS에서 `시 쓰는 향돌`로 불리는 저자가 내놓은 시집이다. 감상적이면서도 따스한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다수 수록됐다.“향돌의 글들은 떠들썩하지 않다. 알음알음 퍼지지만 읽는 이들에게 되새김의 시간을 제공하고, 아픔을 겪는 이들의 가슴을 어루만진다”는 것이 출판사측이 내세우는 강점.`우리 인생이 그리 찬란하다 생각되진 못해도 눈물에 어울리는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울든 웃든 표정을 기댈 어느 존재가 필요할 수 있다`는 문장이 책의 에필로그를 장식하고 있다. 메마른 감수성을 자극한다. ◆`나무는 어떻게 숲으로 갔을까?` · 큰나무`어린이와 함께 하는 철학`이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이들이 사회 안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독립적이고 자신감 있는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저자인 토머스 에버스와 마르쿠스 멜허스는 말한다.책은 아동들이 처한 삶과 사고의 환경에서 철학적 순간을 감지하고 가꿔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준다. 선별된 이야기와 게임, 노래 등이 이 방향을 구체화하고 있다. 출판사는 “어른이 함께 읽어도 좋은 책”이라고 권한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8-01-05

걸그룹 둘러싼 사회·문화 현상 경제학으로 풀어내

제목에서부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출간됐다. 중앙일보 유성운 기자가 글을 쓰고, 다음소프트에서 데이터 엔지니어로 일하는 김주영 씨가 그래픽 등을 담당한 `걸그룹 경제학`이 바로 그것.`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활밀착형 경제학 레시피`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걸그룹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현상을 경제학으로 풀어내 주목받고 있다.즉물적 흥미를 유발하는 `걸그룹`과 어렵고 딱딱한 학문으로 인식되는 `경제학`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멀고 먼 거리를 좁혀가는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은 것일 터.그러나, 유성운과 김주영은 그들 나름의 잣대와 `세상 보기 방식`으로 이 어려움을 정면에서 돌파해냈다.`소녀시대`의 멤버 태연이 지닌 가창력을 `비교우의의 법칙` 아래서 분석하고, 한국 군인들 모두의 연인이었던 `스텔라`의 인기를 `대체재와 보완재`를 가져와 해석하며, 매몰비용의 함정과 오류을 통해 `레인보우`의 명멸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걸그룹을 소재로 한 이전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돌올함이다.`걸그룹 경제학`은 이외에도 아이유가 연기자로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 `AOA`가 설현이라는 멤버에 `몰빵`하는 이유, `트와이스`의 쯔위를 통해 깨닫게 되는 동아시아의 역사 문제, `걸그룹 삼촌팬`의 정체성과 한계까지를 다루고 있다.가벼운 문제 제기로 시작해 세상과 사물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는 유성운 기자의 문장은 흥미로운 동시에 의미 또한 만만치 않다.이메일을 통해 `걸그룹 경제학`의 저자인 유성운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재기발랄한 문장처럼 성격 또한 시원시원한 그는 흔쾌히 제의에 응했다. 아래는 유성운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걸그룹을 통해 생활과 밀착된 경제학을 풀어 설명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출간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소녀시대의 팬이다. 이들의 데뷔 10주년에 맞춰 각종 정보를 인포그래픽(Infographics·정보, 데이터, 지식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걸그룹 혹은, 아이돌이라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산업의 대표 주자고 자본주의의 총아다. 이것만큼 경제학 법칙에 흥미롭게 맞물린 분야도 없을 것 같았다.”-자료 조사와 데이터 분석 등에 시간이 적지 않게 소요됐을 듯하다. 기자생활과 병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책을 준비하는 동안 정치부에서 일했다. 하필 이 기간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19대 대선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새벽 3~4시쯤 일어나 글을 쓰곤 했다. 그나마 데이터 작업은 공저자인 다음소프트 김주영 과장이 맡아줘 겨우겨우 해낼 수 있었다.”-걸그룹을 `팬`이 아닌 `분석과 연구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작업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소녀시대는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다. 이들은 2세대 걸그룹 시대를 열었고, 일본·동남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로 진출한 개척가다. 한국 대중문화에서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출현 이후 가장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는데, 해외 문화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들이 더 상위에 있다고 본다.조용필, 서태지 등을 최고의 가수라고 하지만 해외에서 그들을 알까? 물론 한국의 국력 신장이나 인터넷 환경 등도 영향을 줬지만 비슷한 환경과 국력을 가진 다른 나라에서 이런 영향력 있는 가수들을 보유한 것은 미국과 영국 정도가 전부다.일본의 J-POP(제이 팝)도 이 정도의 위상은 아니다. 이젠 해외에서도 국내 걸그룹 오디션에 도전하고 있다. 걸그룹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먹물층`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어떤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한다.”-걸그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성년 소녀를 착취한다거나, 보편적일 수 없는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거나, 여성의 상품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적인 시각은 어떻게 보나?“보이그룹도 있다. 그렇기에 걸그룹만을 여성의 상품화라고 보는 건 편향된 시각인 것 같다.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주목받았던 건 인류 역사의 보편적 현상이 아닌가.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보다 힘든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청춘을 던지는 걸그룹의 패기를 칭찬해주고 싶다.”-걸그룹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은 뭔가?“보고 있으면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건 대단한 힘이다. 세상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슬픈 이야기지만 내가 `기자`라며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때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이들은 거의 없다. 또 하나를 꼽자면 여학생들에게 공부와 운동 외에 `제3의 길`을 열어줬다. 걸그룹이 사회적 다양성을 확대하고 있다고 본다.” -연예인 취재는 쉽지 않다. 책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며 어려움은 없었는지.“책을 기획할 때는 사회부에서 근무했고, 취재에 들어갔을 때는 정치부였다. 연예기획사 실장들에게 전화해 `안녕하세요. OO일보 정치부(혹은, 사회부) OOO 기자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하면 다들 겁을 먹었다. `우리 애들이 무슨 사고라도 저지른 게 아닐까`라고 지레 걱정한 것이다. 만나주려고 하지 않고 자료도 잘 안 줬다. 아무리 취지를 설명해도 무언가 비판적인 기사를 쓸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취재였다.(웃음)”-다양한 측면에서 걸그룹을 관찰했다. 앞으로도 한국의 걸그룹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시장이 작다는 것이 경쟁력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인구가 많기에 대부분의 가수가 내수용이다.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일본의 걸그룹들이 해외에서 주목받지 못한 게 대표적이다. 지나치게 일본 시장에만 매몰돼 있었다. 반면 우리는 내수시장이 작아 시작부터 해외에서 어필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외국인들이 봐도 예쁘고 귀엽고 군무 또한 화려하다. 베네수엘라가 미스 유니버스나 미스 월드 등의 미인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듯 한국의 걸그룹도 그런 단계에 진입해있다고 생각한다.“-독자들에게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다면.“다양한 빅데이터 작업으로 정성을 다해 그래픽을 만들었다. 그래픽만 봐도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책에 담긴 문장도 선입견 없이 꼼꼼하게 읽어줬으면 한다.”-마지막으로 가벼운 질문이다. 당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그룹은?“소녀시대와 트와이스다. 소녀시대가 2세대 걸그룹 시대를 열었고, 군웅할거(群雄割據)의 10년 동안 왕좌를 유지한 건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트와이스가 왕좌에 앉은 셈인데 비교불가의 그 위상이 얼마나 유지될지 궁금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1-05

詩와 함께 차분히 마무리하는 한해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해를 맞이하는 시기가 돌아왔다. 들뜨고 분주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2018년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책을 읽는 것으로 2017년을 정리하고, 밝아올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연말연시에 읽을 만한 2권의 시집을 추천한다.1980년대에 20~30대 청춘을 살아낸 한국 시인들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시대가 그랬다. 독재와 전횡을 거듭하던 부도덕한 정권은 결 고운 마음씨를 가진 젊은 시인이 등장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이은봉(64) 시인도 그 시대와 무관할 수 없었다. 날을 세운 풍자와 거친 시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꿈틀거렸다. 1986년 출간된 첫 시집 `좋은 세상`이 그랬다.붉은 피와 푸른 청춘이 시집 속에서 갈등했고, 불의와의 반목 끝에선 불꽃이 튀었다. 시집의 제목은 “좋은 세상은 아직 멀었다”는 역설이었다. 그때 이 시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무엇이 너를 키우니` `걸레옷을 입은 구름` 등 여러 권의 시집이 이은봉의 머리를 거쳐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대학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쳤고, `실사구시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화두 또는 호기심` 등을 통해 문학평론도 병행했다.오늘 소개하는 `봄바람, 은여우`는 갑년을 넘긴 이은봉 시인이 부르는 `이순(耳順)의 노래`다. 아래 시에선 한소식 한 승려의 목소리가 들린다.봄바람은 둑길가의 민들레 씨앗털이다/등 떠밀지 않아도 절로 날개를 파닥거린다//민들레 씨앗털은 지금 촉촉이 젖고 있다/초록강아지들 흥건히 껴안고 있다- 위의 책 중 `봄바람` 일부.봄에 부는 바람을 `파닥이는 날개`로, `초록강아지`로 표현한 감각을 보자면, 이은봉은 아직 젊다. 그럼에도 사물의 본질과 세계의 운행법칙을 읽어낸 60대의 여유와 세련됨이 보인다.이은봉은 문단에서 `잘 웃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어지간해선 얼굴 찡그리고 화내는 법이 없다. 시종여일 빙그레 웃는 낯이다. 그 웃음 속엔 서늘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담겼다. 깊숙한 생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견자(見者)의 미소. 아래 시 `각시탈`은 그의 웃음에 관한 것이다.티내지 않으려고 씨익, 웃다 보니/웃는 모습, 어느새/일상이 되어버렸다//평범해지려고 씨익, 웃다 보니/웃는 표정, 벌써/익숙해져버렸다...`티내지 않으려`, 혹은 `평범해지려` 웃었다는 이은봉의 시적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는 시를 쓰는 자의 고통과 눈물을 숨긴 채, 평범을 거부하고 비범함을 지향하며 살아온 사람이다.`봄바람, 은여우`에 실린 노래 중 가장 매혹적인 건 `정취암 언덕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구름바다`라는 시다.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은 이은봉이 웃음 뒤에 숨긴 서늘하면서 뜨거운 시심을 구구한 설명 없이도 알게 해준다. 외로운 12월 겨울밤의 추위까지 따스하게 녹여준다.가까운 것은 늘 먼 것을 꿈꾼다/생사의 나뭇가지는 지금 희망의 산으로 가고 싶다//생사의 바깥에서 저 스스로 꿈이 되는 산/이제는 잿빛 옷의 구름바다를 데리고 가고 싶다.모딜리아니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매료된 시인 한 명을 알고 있다. 해사한 얼굴에 말수가 적은 사내. 오래 전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기자는 먼 세월을 소급해 두 명의 시인을 떠올렸다.고교 시절, 또래 숙명여고보 여학생들의 마음을 흔들던 미소년에서 카프(KAPF) 소장파의 좌장으로 존재를 전이한 임화. 그는 시적 재능을 이념에 빼앗기고 타향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사람이다.그리고, 박인환. 낭만과 우울 사이를 무시로 오가며 서른한 살에 요절한 그는 제스처로서의 시가 아닌 온몸으로 밀어가는 시학(詩學)을 위해 청춘을 소신공양했고, 그것이 이른 죽음을 불렀다.외모는 물론, 풍기는 작가적 향취까지 임화와 박인환을 닮은 시인이 바로 허연(51)이다.`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를 통해 빛이 아닌 그림자, 열락이 아닌 침잠, 희망의 배후에 자리한 어두움을 노래해온 그의 또 다른 시집 `오십 미터`는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노래들로 가득하다.시를 쓰기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허연이 주목한 것은 즐거움의 파편이 아닌 인간의 삶 내·외부에 자리한 외로움과 고뇌였다. 지천명을 넘긴 그는 이제 태생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어두움을 죽음이란 단어를 향해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위의 책 중 `Nile 407` 일부.현대를 숨쉬는 `산 자`들의 영역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휴대폰에서 그 옛날부터 거부할 수 없는 주문처럼 지속돼 온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그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을까?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되기 힘들다. 인간과 세계를 향해 뻗은 촉수에 슬픔이 묻어나오지 않는 이들을 시인이라 칭했던 역사는 드물었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그리움이 시인을 존재케 했다. 허연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허니, 시인인 그가 차안(此岸)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한국의 `좋은 시인` 대부분은 현세에서의 욕망을 눈 아래 둘 수밖에 없다. 허연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지리멸렬한 차안에서 `빛나는 피안(彼岸)`을 향한 시의 촉수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 인용하는 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사람들은/옆집으로 이사 가듯 죽었다/해가 길어졌고/깨어진 기왓장 틈새로/마지막 햇살이 잔인하게 빛났다/구원을 위해 몰려왔던 자들은/짐을 벗지 못한 채/다시 산을 내려간다.- 위의 책 중 `사십구재` 일부.보통의 사람들에겐 `존재의 절멸`에 다름 아닌 죽음. 그러나, 시인은 그 죽음조차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마주한 죽음은 슬픔이나 통곡이 아닌 말갛고 투명한 시적 재료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자성의 시간을 원하는 이들에게 허연의 `오십 미터`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겁고도 진지하다. 또한 의미가 작지 않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