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 43년 ‘국내 1호 준박물관’ 명성 무색···관리 전문성 부족으로 실태 드러나 2029년 시립박물관 분관 전환 앞두고 ‘방치’ 우려··· 유물 보존 및 콘텐츠 혁신 시급
“박물관 안에 유물과 청소도구가 나란히 놓여 있다니 믿기지 않네요. 개관 43년이나 된 영일민속박물관은 군 단위 민속박물관 중 국내 최초로 ‘준박물관’ 지정을 받은 곳 아닙니까? 지역 향토사의 상징 같은 곳이 이렇게 관리되고 있다니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2026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막이 오른 지난 5월 1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영일민속박물관을 찾은 한 시민은 현장을 둘러보며 이같이 분통을 터뜨렸다.
지역의 소중한 민속 유산을 보존·전시하는 박물관이지만, 입구 한쪽에는 버려진 종이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전시관 내부 한편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등 청소 도구들이 놓여 있어 관람객의 시선에 그대로 노출됐다. 비록 도구들이 한데 정리된 상태였으나, 유물과 같은 공간에 비치된 모습은 지역 문화자산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박물관의 관리 전문성에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 국내 최초 군 단위 ‘준박물관’의 명성과 초라한 현실
영일민속박물관은 1983년 조선 시대 흥해군의 동헌 건물이었던 제남헌(濟南軒)을 개보수해 개관한 유서 깊은 곳이다. 1987년에는 군 단위 민속박물관으로는 국내 최초로 문화부로부터 ‘준박물관’ 지정을 받기도 했다. 현재 약 4600여 점의 민속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600년 수령의 회화나무와 함께 포항의 향토 문화를 상징하는 핵심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역사와 달리 현재의 운영 체계는 ‘박물관’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다. 현재 이곳에는 상근직 공무원이나 전문 학예사가 상주하지 않는다. 포항시 문화예술과 소속 학예연구사가 일주일에 세, 네 번 방문해 관리하는 형편이며, 실질적인 현장 관리는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배치된 공공 근로자들이 맡고 있다. 전문적인 유물 관리나 관람객을 위한 해설 서비스는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 2029년 시립박물관 개관··· ‘분관’ 전환 준비는 ‘낙제점’
포항시는 현재 남구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내 부지에 포항시립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며, 2029년 개관 이후 영일민속박물관을 그 분관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분관 전환까지 남은 기간 동안 박물관이 방치될 우려가 크다.
실제로 전시 콘텐츠의 노후화와 프로그램 부재로 인해 관람객의 발길은 끊긴 지 오래다. 유물들은 수십 년 전 방식 그대로 전시돼 있으며, 습기나 온도 조절을 위한 항온항습 장치 등 현대적인 보존 시스템도 미비한 상태다. “볼거리가 없다”는 시민들의 냉소 섞인 반응은 지역 문화 정책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타 지자체 선진 사례: ‘스토리텔링’과 ‘주민 참여’로 활로 찾다
영일민속박물관의 위기는 단순히 포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한 타 지자체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구 수성구 박물관 ‘수’는 전통 자수와 민화라는 특정 테마를 현대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결합해 ‘에듀케이터 부문 우수기관상’을 받는 등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유물을 단순히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화 자수 프로젝트’ 등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콘텐츠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울산 해양박물관은 ‘찾아가는 박물관’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아동들과 접점을 넓히고, 지역 기업 및 축제와 협업해 박물관을 경제 활성화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박물관을 유물의 ‘저장고’가 아닌 지역민의 ‘놀이터’이자 ‘교육 공간’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이다.
■ 리뉴얼 및 운영 주체 역할 재정립 시급
전문가들은 영일민속박물관이 시립박물관의 분관으로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리뉴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우선 운영 주체의 전문성 강화가 시급하다. 공공 근로 중심의 관리 체계를 벗어나, 최소한 1명 이상의 전문 도슨트나 관리 인력을 배치해 기본적인 환경 미화와 유물 보존 업무를 체계화해야 한다. 또한, 흥해 지역의 역사성과 제남헌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활용한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이 도입돼야 한다.
황인 포항향토사학자는 “2029년 시립박물관 분관 전환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았다”며 “축제 기간임에도 유물 옆에 청소 도구가 버젓이 놓여 있는 현 실태는 포항시 문화 행정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문화자산은 관리가 소홀해지는 순간 그 가치를 상실한다”며 “충비 갑연 비석과 대원군 척화비 등 소중한 유산을 품은 영일민속박물관이 지역의 정신을 담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시의 즉각적인 개선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포항시 관계자는 “시립박물관 건립 과정에서 지역 내 산재한 유물을 전수 조사하고 체계적인 수집 전략을 세우고 있다”며 “영일민속박물관 역시 시립박물관 체제 안에서 효율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2026 박물관·미술관 주간은 ‘세계 박물관의 날(5월 18일)’을 기념해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주최하는 축제다. 5월 한 달간 전국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관람료 할인 및 야간 개장 등 시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 혜택이 제공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