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장엄한 장면 중 하나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이 매달린 십자가 아래로 다가가는 대목이다.
처형된 이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단순한 장례를 넘어, 빌라도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결단이었다.
이런 도덕적 저항의 서사는 중국의 사서에서도 발견된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중상모략에 의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을 때, 백성들은 북을 치고 음식을 던지며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그것은 억울한 죽음 앞에서 공동체가 선택한 최후의 예우였으며, 훗날 단오(端午)라는 거대한 문화적 의례로 승화되었다.
시대와 지역은 달라도, 권력이 버린 죽음을 인간이 거두는 행위는 인류 역사의 서사로 흐르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 보편적 윤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조선 영월의 민초, 엄흥도(嚴興道)다.
세조에 의해 폐위, 시해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당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기(禁忌)였다. 시신에 손을 대는 순간 삼족이 멸하리라는 공포가 영월 땅을 짓눌렀다.
하지만 엄흥도는 밤의 어둠을 틈타 왕의 시신을 수습했다. 칼을 든 군사도, 녹을 먹는 관료도 아닌 한 명의 민초가 왕권의 폭력이 남긴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그의 충절은 일회성 용기에 그치지 않았다. 엄흥도는 가솔을 이끌고 깊은 은거를 택했다. 족보마저 없애며 세상과 절연한 채 스스로를 지웠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마을 사람들의 태도다. 관청이 사라진 그들의 행방을 쫓았으나, 주민들은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짐작하면서도 끝내 함구했다.
역사 정의의 회복은 200여 년 후에 찾아왔다.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 역시 공조판서로 추증되며 ‘충의(忠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밤새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안장했던 자리는 오늘날의 ‘장릉’(莊陵)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그 능역의 수호자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수습과 의리’의 정신이 가문의 전통을 타고 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엄흥도의 직계 후손 엄항섭(嚴恒燮)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항일 투쟁의 중심에 섰다.
또 다른 후손 산악인 엄홍길은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속에 갇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건 ‘휴먼원정대’를 이끌었다. 가문의 윤리가 시대에 따라 항일 정신으로, 또 동료애적 인본주의로 변주되며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엄흥도의 선택은 패자의 마지막을 지켜낸 자가 쓴 소리 없는 기록이다.
그는 격문을 쓰지도, 창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다만 버려진 시신을 정성껏 거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왕권의 폭압에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충(忠)과 의(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