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내려앉은 봉우리, 구지봉 궁궐이 사라진 자리, 분성대 삶의 현장, 교류의 터전이던 봉황대
김해의 땅속에는 여전히 가락국의 오래된 시간이 숨 쉬고 있다. 구지봉에서 분성대, 봉황대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 신화와 역사가 잔향처럼 피어오르며 현재의 풍경과 포개진다. 도시의 일상적인 소음 너머로, 오래전 사람들의 기운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다가온다.
구지봉은 6가야 시조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이다.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봉우리의 기운처럼 남아 있다. 정상 동편에는 남향으로 자리한 수로왕비릉이 펼쳐지고, 능선은 거북의 목처럼 서쪽으로 뻗어 ‘구지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복원된 산책길을 따라 오르면 남방식 고인돌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원전 4세기 추장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이 고인돌의 윗면에는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진 ‘구지봉석’이 새겨져 있다. 맞은편 비석에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라는 문구가 또렷해, 신화적 탄생의 무게를 전한다. 그 앞에 서니 오래된 시간의 여운이 조용히 마음속으로 번져왔다.
1976년 봉우리 중앙에 세워졌던 여섯 개의 알과 아홉 마리 돌거북 조형물은 지금 수로왕릉 연못가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원래 위치에 두는 것이 역사성이 더 있을 것 같다. 육란의 석조상이 모여 있는 모습에서 설화가 세월을 넘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분성대는 가락국의 또 다른 중심지다. 지금의 연화사가 자리한 이곳은 2008년 ‘김해객사 후원지’로 지정되었으며, 한때 중궁전이 있던 터로 알려져 있다.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을 세우기 위해 호계사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지금은 궁궐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가락고도궁허’ 비만 외롭게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윤용구가 글을 짓고 김문배가 1928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앞에 서자, 사라진 궁궐의 자리는 오래된 빈터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적막 앞에 서니, 태풍 사라호로 집터를 잃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잿빛 잔상처럼 떠올랐다. 역사와 개인의 기억이 한순간 겹친다.
봉황대는 회현리 패총과 함께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유적지다. 구릉을 오르니 김해 시가지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이곳이 오랜 세월 주거지이자 대외 교류의 창구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발굴 조사에서는 도랑과 집터, 고상 가옥의 흔적이 드러나며, 이곳이 한때 교류와 생활이 뒤섞여 흐르던 터였음을 확인하게 했다. 외부 침입에 대비하면서도 무역 활동을 위한 저장과 집배송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다.
봉황대는 허왕후를 맞이하기 위해 수로왕이 신귀간에 명해 머물게 했다는 승점의 자리로도 추정된다. 서편 기슭에 복원된 고상 가옥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고요하게 재현하며, 유적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가락국의 일상을 상상하게 한다.
세월 속에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구지봉의 설화와 분성대의 궁궐, 봉황대의 삶의 터전은 여전히 땅 아래 깊은 호흡을 간직하고 있다. 그 위를 걷는 일은 오래된 시간과 오늘의 내가 마주하는 일이다. 과거는 멀리 있지 않았다. 땅의 기억 위에서 현재의 내가 다시 세워지는 순간이 김해의 시간 속에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김성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