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정상회의 맞아 경주를 다시 찾다
APEC 정상회의를 준비하는 경주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대릉원과 첨성대 같은 천년의 유산이 황리단길 같은 현대의 감성과 만나며 ‘역사 도시’에서 '외교도시'로 재탄생했다.
돌탑과 무덤, 절과 바다, 골목과 호수는 하나의 외교적 얼굴이 된다.정상들이 걷는 길, 보는 풍경, 머무는 밤은 그들의 대화보다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APEC 정상회의를 맞아 경주의 유적지를 다시 찾아본다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슴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불국사·석굴암·대릉원·첨성대 등 천년 유산
경주월드·황리단길 등 현대의 감성과 만나며
세계 정상들이 걷는 길, 보는 풍경, 머무는 밤
그들의 대화보다 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할 것
APEC을 준비하는 경주, 변화를 맞이하며
‘역사 도시’서 ‘외교도시’로 다시 숨 쉬기 시작
△ 첨성대 – 하늘과 시간의 돌탑
경주의 밤이 깊어질수록 첨성대는 더욱 빛난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 세워진 이 천문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소로, 1300년 넘게 같은 자리에 서 있다. 27단으로 쌓인 원통형 돌탑은 계절의 흐름과 별의 운행을 읽던 신라인의 지혜를 품었다.
낮에는 회색빛 돌이 따뜻하게 햇살을 반사하고, 밤에는 별빛이 돌의 틈을 타 스며든다. 첨성대 주변은 사계절 다른 표정을 보인다. 봄엔 유채꽃이, 가을엔 억새가 흔들린다. 새벽 안개가 머무는 시간, 첨성대의 실루엣은 신비로운 그림자처럼 솟아오른다.
남쪽 잔디길에서 바라보는 측면 구도는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포인트다. 인근엔 월성, 대릉원, 동궁과 월지 등 신라 천년의 유산이 반경 1km 안에 모여 있다. 첨성대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하늘을 읽던 한 문명의 철학이 돌로 응결된 ‘시간의 조형물’이다.
△ 대릉원과 계림 – 신라 왕의 잠든 정원
경주의 대릉원은 ‘시간의 언덕’이라 불러도 좋다. 부드럽게 솟은 봉분들이 공원의 능선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를 따라 난 산책길엔 고요가 흐른다. 이곳에는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천마총은 1973년 발굴을 통해 신라의 예술성과 금세공 기술을 세상에 드러냈다. 가죽에 그려진 ‘천마도’와 금관은 신라 왕실의 위엄을 증명한다. 봉분 하나마다 이름 없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잠들어 있다.
대릉원 북쪽의 계림(桂林)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의 전설이 깃든 숲이다. 낮에는 버드나무 그림자가 물결치고, 해질녘엔 새들이 귀환하며 숲이 낮은 숨결로 떤다. 이곳을 걷다 보면 ‘역사는 박물관 안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릉원은 산책의 형식을 빌린, 가장 조용한 역사 교과서다.
△ 불국사와 석굴암 – 돌로 빚은 이상향
불국사는 신라 불교 건축의 완성형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는 순간부터 공간의 질서가 달라진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주 선 중심 마당은 인간과 우주의 균형을 상징한다. 본당 뒤편의 나무 그늘 아래선 불경의 리듬이 들릴 듯하고, 오래된 기둥에 손을 대면 돌과 나무가 품은 시간의 결이 전해진다.
불국사에서 차량으로 20분쯤 오르면 석굴암이 나타난다. 인공 석굴 안에 모셔진 본존불은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눈길은 바다 너머를 바라보지만, 그 표정은 고요한 내면으로 향한다.
두 유적은 1995년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불국사는 이상향을 땅 위에 구현한 절이고, 석굴암은 그 이상을 돌 속에 새긴 공간이다. 경주 여행은 이 두 곳에서 신라의 정신을 만나는 일이다.
△ 문무대왕릉 – 바다에 잠든 왕의 신화
동해의 파도 끝, 감은사 맞은편 바다 한가운데 작은 바위섬이 있다. 그곳이 문무대왕릉이다. 신라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바다에 묻혔다.
능은 육지에서 200m가량 떨어진 바다속(海中)에 자리한다. 물결이 잔잔한 날엔 파도 사이로 봉분이 드러나고, 거센 날엔 물거품 속에 사라진다. 왕의 무덤이자 파도와 하나 된 수호의 상징이다.
해안 도로에 서면 수평선 위로 능이 선명히 보인다. 새벽에는 바다 안개가 덮여 신비롭고, 해질녘엔 붉은 노을이 왕의 영혼을 감싸는 듯하다.
문무대왕릉은 경주의 수많은 유적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풍경을 가진 곳이다. 바다와 왕, 나라가 한 몸이 된 이야기. 신라의 바다는 여전히 그를 품고 있다.
△ 동궁과 월지 – 신라의 밤은 물 위에서 깨어난다
‘동궁과 월지’는 경주의 밤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안압지로도 불리던 이곳은 신라 왕궁의 별궁이자 연회의 무대였다. 발굴조사로 드러난 연못과 기단은 당시의 화려함을 짐작케 한다. 복원된 전각의 조명이 어둠 속에 켜지면, 물 위로 그림자가 일렁인다. 현실과 반영이 뒤섞이는 순간, 신라의 궁전이 다시 살아난다.
낮에는 연못의 수면이 거울처럼 맑고, 밤에는 금빛 불빛이 반사되어 환상적이다. 야경 촬영 명소로 손꼽히며, 조명은 해질녘부터 자정 무렵까지 운영된다.
이곳을 천천히 걷다 보면, 천년 전 왕의 잔치 소리 대신 연인들의 웃음이 들린다. 동궁과 월지는 시간의 강을 건너, 여전히 경주의 가장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내고 있다.
△ 보문호수 – 경주의 휴식이 머무는 곳
경주의 유적이 역사의 숨이라면, 보문호수는 그 숨 사이의 쉼표다. 보문관광단지의 중심인 이 인공호수는 산책로, 자전거길, 카페, 리조트가 둘러싸여 있다. 봄에는 벚꽃길이 흐드러지고, 여름엔 수상레저와 유람선이 활기를 더한다.
호숫가를 따라 8km 코스를 걷는 동안 물결과 바람이 반복되는 리듬을 만든다.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과 전망대는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인기다.
보문호수는 숙박과 여가, 식사까지 모두 해결되는 경주의 ‘휴식형 관광지’다. 밤에는 호수에 리조트 불빛이 비쳐 또 하나의 도시가 물 위에 떠오른다. 천년고도의 유적 사이, 현대적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보문호수의 한 바퀴를 추천한다.
△ 경주월드 – 천년고도에 피어난 스릴
경주가 고도의 도시라면, 경주월드는 그 속의 ‘젊은 심장’이다. 롤러코스터의 굉음과 사람들의 환호가 신라의 고요를 흔든다. 스릴 어트랙션 ‘파에톤’, 여름철 워터파크 ‘캘리포니아비치’ 등 시즌별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아이를 위한 퍼레이드부터 가족형 라이드, 실내 체험관까지 세대 구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다.
경주월드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다. 유적 탐방 중심의 여행 동선에 ‘하루의 활력’을 불어넣는 리듬이다. 역사 도시 경주가 지닌 또 하나의 얼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이다.
△황리단길 – 천년의 골목에 감성이 피다
황남동 골목, 이른바 황리단길은 경주의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다. 오래된 한옥이 카페와 갤러리, 베이커리로 바뀌며 도시의 새 얼굴이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커피 향과 빵 굽는 냄새, 목재의 향취가 섞인다. 오래된 담장 옆으로 감각적인 간판이 줄지어 서 있다.
젊은 셰프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소규모 숍들이 골목을 채운다. ‘10원빵’ 같은 길거리 음식은 관광객의 손을 멈추게 한다. 황리단길은 대릉원과 첨성대에서 도보 10분 거리. 역사와 트렌드가 한 걸음 차이로 이어진다.
밤이 되면 조명이 낮게 켜지고, 한옥 처마 아래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흐른다. 경주의 천년은 이제 이 골목에서, 새로운 언어로 살아 숨 쉰다.
“경주는 역사의 끝이 아니라, 오늘의 시작이었다.” 첨성대의 돌 한 장, 불국사의 그림자 한 줄기,
황리단길의 불빛 한 점까지 모든 것이 이어져 있었다. 천 년의 도시가 다시 숨 쉬기 시작한 지금, 경주는 ‘기억의 여행지’이자 ‘미래의 도시’로 서 있다
/글_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사진_한국관광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