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 추석을 앞두고 포항 시내 주요 도로와 교차로가 현수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포항시 북구 육거리, 죽도시장 사거리는 물론 남구 효자네거리 등 도심의 요충지에는 이름과 얼굴을 내세운 정치인들의 홍보물로 빼곡히 들어찼다. 추석 인사를 빙자했지만, 시민들은 이를 두고 “명절 분위기를 가장한 사실상의 선거운동”이라며 눈살을 찌푸린다.
28일 포항시 북구 육거리에는 무려 20개가 넘는 현수막이 걸렸다.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뒤엉켜 있다. 택시기사 이모 씨는 “신호등 보다 정치인 얼굴이 더 잘 보인다”며 혀를 찼다.
현수막 문구는 대개 ‘시민 행복 기원’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채워졌지만, 글자 보다 더 크게 자리한 것은 정치인의 이름과 얼굴이다. 죽도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명절 인사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의 이름 알리기에 다름 아니다”라며 “차라리 지역 봉사활동이라도 하며 얼굴을 내미는 게 덜 불편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수막 물량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현수막 업체 관계자는 “정치인 한 명이 최소 100장, 많게는 500장 이상을 발주한다. 명절 전후는 공장 라인이 밤새 가동될 정도”라고 귀띔했다. 정치인들은 자기 이름이 걸린 현수막이 도시 구석구석에 붙어 있을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표심을 잡을 수 있다고 믿지만, 시민들 눈에는 오히려 ‘구태 정치의 전형’으로 비칠 뿐이다.
환경문제도 뒤따른다.
현수막은 내구성을 높인 합성섬유 재질이어서 재활용이 쉽지 않다. 사용 후에는 결국 소각 처리돼 대량의 미세먼지와 유해물질을 배출한다. 지역 환경단체 관계자는 “수천 장 가까운 현수막이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된다면 그 자체가 환경 재앙”이라며 “정치인들이 친환경, 탄소중립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날을 세웠다.
정치인과 일반 시민 사이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정치인은 정당 명목으로 법적 특혜를 받아 마음껏 현수막을 걸 수 있지만, 일반 시민이나 소상공인은 시청의 검인 절차를 밟고 제한된 장소에만 설치할 수 있다. 시민들은 “정치인에게는 열린 하늘이고, 시민에게는 좁은 문”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행정당국은 무기력하다.
옥외광고물법은 정당 현수막을 일정 범위 내에서 허용하고 있어,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규제할 수 없는 구조다. 포항시청 관계자는 “법적으로 허용된 부분이라 강제 철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같은 제도 안에서도 지자체의 태도 차이는 크다. 전북 남원의 경우 시장 조차 현수막을 지정 게시판에만 게시하고, 시내 곳곳에 무분별하게 내걸지 않는다. 그 결과 거리는 쾌적하게 유지되고, 행정의 일관성에 대한 시민 신뢰도 높다. 포항의 무기력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정치인들의 현수막 게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광고홍보학계의 한 교수는 “정치인들이 내거는 현수막은 홍보 효과도 미미하고, 오히려 정치 혐오를 불러오는 역효과를 낳는다”며 “SNS, 온라인 플랫폼 등 대체 수단이 충분한데도 현수막을 대량 내거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귀성객들의 눈에도 이 풍경은 낯설다.
고향을 찾은 한 40대 시민은 “정겨운 거리가 정치인 이름으로 도배된 걸 보니 불쾌하다”며 “명절을 빌미로 자기 이름을 팔아먹는 정치 쇼에 불과하다”고 언성을 높였다.
현수막이 거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홍보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태도, 그리고 이를 막지 못하는 제도의 허점이 맞물려 벌어진 구조적 문제다. 정치적 이익을 시민의 불편과 안전 위에 놓는 한, 이런 풍경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임창희기자 lch8601@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