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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흔적이 있는 유산곡수를 찾아서

등록일 2025-05-25 19:40 게재일 2025-05-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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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일주문 앞에 있는 유산곡수의 모습.

오늘은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사라진 인물을 찾아 해인사를 간다. 

해인사가 어디인가? 합천에 있는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는 법보종찰 아니던가.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의 문장가 최치원의 흔적인 학사대와 유상곡수가 남아 있는 곳이다.

흔히들 유상곡수라 하면 경북 경주에 있는 포석정을 떠올린다. 신라의 이궁으로 현재 정자는 없고 유상곡수연을 하던 곡수거만 남아 있다.

곡수거란 중국 정나라(B.C. 816~375)때의 풍속에 기원을 둔 것인데, 둥글게 도랑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여기에 술잔을 띄우며 노는 것이다. 잔이 자기 앞에 도착할 때까지 시를 지어 잔을 들고 읊은 후 다음 사람에게 잔을 띄워 보내는 풍류놀이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유상곡수연은 안학궁으로 고구려 장수왕(A.D. 413~491)때 평양 인근 대성산 남쪽 기슭에 조성된 후원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에 있는 포석정은 심오한 역사성이 인정돼 일제 때 국가유산 문화재 사적 제1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럼 해인사에 있는 유상곡수연은 언제,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문헌에는 1625년 허돈이 쓴 ‘유가야산기'에는 “일주문 위에는 석천 임억령이 지은 오언절구가 있어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문 밖에는 돌을 깎아 빙 돌아가게 하여 유상곡수를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최치원의 자취라고 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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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5년 정식의 ‘가야산록’에도 “최치원이 손수 심었던 소나무가 있어 비바람을 피할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대가 갈라져 아래로 향한 것은 최치원이 유상곡수를 하던 곳이다”라고 했다.

해인사를 만나는 첫 지점인 일주문 옆 공터, 둥근 돌로 도랑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개화기 때 분수로 개조돼 쓰였다가 지금은 그대로 방치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유상곡수의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많은 아쉬움을 남게 하는 대목이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문장가 최치원. 궁궐이나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풍류 생활을 즐기기 위한 정원시설로 한국정원 문화의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하는 유상곡수의 흔적이 그냥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풍류의 삶이야말로 우리 고유의 선풍(仙風)의 원류가 아니던가. 

/김성두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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