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지난 칼럼을 마감하며 벌어진 슬픈 일화다.
글 쓰는 사람이 텅 빈 눈으로 모니터 커서를 응시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의 상황에 해당한다. 마감 시간이 임박했는데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거나, 애써 쓴 글을 날려 버렸거나.
멍청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문서를 강박적으로 저장하던 시절의 결의 따윈 내다 버린 것일까. 백업 시스템을 철저히 믿은 것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완성된 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고지 3매 분량의 초안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란!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늘을 원망하고 나의 아둔함에 혀를 차고…. 인터넷을 뒤져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애석하군요. 아이클라우드를 믿다니….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는 파일 관리에 신중을 기하길 바랍니다.’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절망에 절망이 더해지면 눈물보단 실소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허파에 구멍 난 것처럼 웃다 보면 절대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킨 마음이 느슨해진다는 것도. 어차피 모든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 똑같이 구성할 수 있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신년운세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성공운이 따른다고. 만일 원고지 1천 매에 육박하는 장편소설이 사라졌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일련의 사건이 굉장한 행운처럼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능숙한 연주자처럼 키보드에서 줄기차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몇몇 문장은 어렴풋이 떠올라 나름대로 비슷하게 구성할 수 있었지만,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기는 불가능했다. 미로를 헤매다가 다른 길에 들어서기를 반복, 결국 제목부터 결론까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글이 탄생하고야 말았다.
신기한 일이다. 쓰는 사람도, 쓰려고 하는 내용도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 것일까? 그 짧은 시간에 내가 변화하기라도 한 것일까?
물론 그럴 리 없다. 언어는 이상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단 하나의 마침표, 쉼표만으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눈 밑에 점 하나를 찍으면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는 막장 드라마처럼. 하나의 점으로도 한 세계가 뒤바뀐다. 정말이다.
온점과 반점을 고민하는 일, 단어를 교체하고 형용사와 부사를 넣고 빼는 일, 백스페이스와 스페이스를 누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애초에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많다.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기우뚱대다가 엉뚱하게 완결짓기도 한다. 마침표를 찍은 문장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반드시 유의미할 수 없다. 새롭게 적은 문장이 이전의 것보다 훌륭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글은 늘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지난번처럼 불운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다분히 자의적으로 내 글을 휴지통에 버리기도 한다. 소설의 경우 쓰는 양보다 버리는 양이 훨씬 더 많다. 편안하게 적는 문장 하나하나에 자기 철학이 눅진하게 담겨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내겐 아직 그러한 능력이 없다. 뭔가에 관해 닿아보고 싶다면 일단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쓰고 버리고, 다시 쓰고 버리고. 이 무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메일함에 들어가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보라. 체력적 한계 따윈 없다. 만족할 때까지 새로운 문장을 끊임없이 내어준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도 정신도 너무 빨리 지쳐버린다. 미숙한 판단으로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오류로 점철된 기능을 가진 존재에 불과하면서 어째서 이러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가. 이토록 비효율적인 일에 일말의 재미를 느끼는 나 자신이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글이 사라져도 즐겁게 다시 쓰면 될 걸, 왜 이렇게 길게 한탄을 늘어놓고 있느냐는 어퍼컷이 날아올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주먹을 가뿐히 피하며 답한다. 이미 끝낸 노동을 처음으로 돌아가 또 하고 싶은 노동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활자 노동자의 푸념을 받아 주시죠?
억울하지만 방법이 없다. 파일이 날아가도 다시 쓰고, 문장이 엉망이어도 다시 쓰고, 하나의 점을 잘못 찍어도 다시 쓴다. 그렇게 매일매일 앉아 쓰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나저나 글을 날려 먹은 일화로 새로운 글을 쓰다니. 다시 생각해도 글쓰기란 참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