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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 남원 교룡산성

등록일 2025-02-18 18:35 게재일 2025-02-1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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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홍석의 한국 테마 기행
교룡산성을 따라 복덕봉을 오르는 탐방로의 교룡산성.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한때 88고속도로라 불렸다. 그 광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원IC 인근에 있는 산으로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과 교룡산성이다. 두 개의 뿔로 형성된 산자락에는 교룡산성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쪽은 상당히 아늑한 느낌이다. 그 한 가운데에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이 위치한다.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와 대적하려고 쌓았던 삼국시대의 성으로,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전열을 정비한 장소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휴정대사의 제자이면서 호남의 승병을 이끌며 이치대첩, 독산성 전투, 행주대첩 때 맹활약한 뇌묵 처영(雷默 處英)이 교룡산성을 크게 수축(修築)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경주 용담정에서 도를 깨우치고 교룡산성으로 숨어들어 사찰의 방 하나에 8개월 동안 피신 수양하며 동학의 교리를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보물제1517호로 지정된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보물제1517호로 지정된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룡산성으로 올라선다. 길옆에는 동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동학성지 남원’이라 쓰인 조형물이 보인다. 가파른 길로 조금 올라서면 이내 교룡산성이다.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여러 개 감싸며 축성한 교룡산성은 그 길이가 무려 3킬로다. 산성이 번성하였을 때 우물이 99개였고, 무기고까지 있었다. 동서남북 4대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문이었던 홍예문만 남아 그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그 홍예문 입구 좌측에 ‘김개남 동학농민 주둔지’라는 하얀 나무말뚝이 서 있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 그는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을 따르지 않고 청주를 향해 진격하다 패하여, 태인에서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대의를 잃어버린 그의 야욕이 빚은 오판 탓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여 2만여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위민’이란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평소 사람들의 목숨을 아끼고 양반들과 관리자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랬던 전봉준과는 달리 김개남은 양반들에게 엄청난 원망을 받은 두려움의 대상자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김영주, 동학의 후천개벽을 알게 되면서 남쪽 세상을 열고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뜻으로, 김개남(金開南)으로 고쳤다.

결단이 빠르고 과감한 추진력에, 활화산 같은 폭발성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그것이 그의 한계이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강한 애착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질투와 시기심이 그 원인이었다.

교룡산성 홍예문(ㄱ자 형상의 옹성으로 둘러쌓았으며 예술과 과학이 숨어있는 아치형의 문이다).
교룡산성 홍예문(ㄱ자 형상의 옹성으로 둘러쌓았으며 예술과 과학이 숨어있는 아치형의 문이다).

고종의 지시로 내탕금을 전하러 내려온 선전관의 목을 베고, 2차 봉기 후 북상하는 도중에 남원 부사 이용헌과 그의 수행원 2명도 함께 참수했다. 고부군수 양성환은 그에게 붙잡혀 호되게 매질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열 손가락에 대못이 박히고, 소나무 서까래로 빙 둘러서 엮은 달구지 위에 태워졌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짚둥우리를 서까래 위에 덮어씌웠다. 절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지한 것이다. 재판 절차도 생략되었다. 붙잡힌 지 이틀 만에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목이 베어졌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에 대한 양반들과 관리자들의 원한과 두려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교룡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홍예문은, 기역(ㄱ)자형의 옹성으로 둘러쌓았으며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이다. 외부에서 성문을 보면 외부에 쌓은 작은 옹성(甕城)으로 인해 그 입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의 둥근 부분은 아홉 개의 돌을 쌓아 예술과 과학이 숨어 있는 아치형으로 맞추었다. 현재 전북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홍예문을 통과하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도 교룡산성 안에는 민가가 몇 채가 남아 있다. 선국사로 바로 오르려다가 성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교룡산성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교룡산의 두 봉우리인 남쪽의 복덕봉(福德峯)과 주봉인 밀덕봉(密德峯)을 오르기 위해서다.

복덕봉에 오르면 발아래로 대구와 광주를 이어주는 광대고속도로와 남원 시내가 발아래로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만복대에서 정령치와 바래봉, 덕두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 만행산 등도 시원한 조망으로 구분된다.

현재 통신 탑이 세워져 있는 주봉인 밀덕봉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칠백여 미터를 돌거나, 선국사에서 삼백여 미터를 뒤쪽으로 오르면 ‘은적암’ 터다. 일명 ‘덕밀암’ 터로 불리는데 동학에서는 은적암, 불교에서는 덕밀암이라고 한다. 최제우가 수도하면서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집필했던 곳으로,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이 출가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장소의 의미는 어디로 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작은 팻말 하나만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교룡산성 홍예문 입구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팻말.
교룡산성 홍예문 입구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팻말.

삼백여 미터를 더 내려서면 선국사다. 평상시는 불법을 수행하는 도량이지만 전시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전략적 요충지다.

지홍석 수필가
지홍석 수필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순조 2년에 다시 지었다는 대웅전에는 2017년 7월 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517호로 지정된 건칠아미타여래좌상(乾漆阿彌陀如來坐像)과 지방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큰 북이 보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인장인 ‘교룡산성승장동인’은 이번 기행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선국사에서 이백여 미터를 내려서면 처음 탐방을 시작했던 홍예문과 동학공원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탐방을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복덕봉과 밀덕봉, 은적암터를 지나 선국사를 두루 돌아보는데 약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남원 교룡산성은 영남지방에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 명이 산화한 성지로, 최근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어 성역화 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찾아들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홍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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