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지인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느냐고. 나도 딱히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학생들에게 매 학기 첫 수업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 그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은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행위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운동 경험이 없는 사람이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첫날부터 무거운 바벨을 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고강도의 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근육과 근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레이너로부터 바른 자세와 운동법을 배워 몸에 익힌다. 언어에도 근육이 필요하다. 언어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이 바로 그 트레이너다. 시나 소설의 멋진 문장들을 여러 번 소리 내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는 것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언어의 근육이 생기고 가용어휘 또한 풍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어딘지 허전했다. 시와 소설을 읽으며 좋은 문장에 밑줄을 치고 그걸 외우는 일이 어휘력을 늘리기 위한 기능적 행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오래 곱씹으며 그 안에 가만히 머무르는 것에는 다른 효용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준다. 순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이 한 문장만큼은 외우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이 문장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 문장을 알기 전에는 벚꽃과 목련과 철쭉이 피어도 매년 반복되는 자연 현상 정도로만 여겼지 꽃이 예쁜 줄 몰랐다. 하지만 이 문장을 알고 난 20대 초반의 어느 날부터 나는 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 단 5분이라도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소설 속 허 생원과 동이가 보름달 아래 호수처럼 반짝이는 메밀꽃 윤슬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은 내게 눈 내린 아침의 황홀한 흰빛을 오래토록 감각하게 해줬다. 저 문장을 알기 전 눈은 그저 유년의 추억을 회상케 하는 매개이거나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였다. 내 청춘의 감수성은 저 문장을 통해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와 빛으로 들어섰으며 거기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정지용의 ‘유리창1’ 같은 시를 만나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는 사람의 마음과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이의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14년 전 초여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시골길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을 때 일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부딪치는 그 찰나, 쾅! 세상의 모든 문들이 일제히 닫히는 소리, 내겐 억겁과도 같이 느껴진 몇 십 초 후 정신을 차렸는데 내가 살았는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하게도 시를 외웠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라는 장석주의 ‘햇빛사냥’을. 그리고 한 편 더, 이성복의 ‘연애에 대하여’의 한 부분 “내 살아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를 외우고 나서야 내가 살았음을 알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내게 시와 소설 속의 한 문장은 단순한 글귀가 아니게 됐다. 좋은 문장은 때로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되고, 또 때로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되며, 마침내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가 우에노 공원에 핀 동백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한 얼굴이 떠올랐다. 긴 겨울 지나고 봄의 예감이 부풀어 오르는 요즘 내가 장기투숙 중인 문장은 이것이다. “그는 땅바닥까지 늘어진 동백 가지를 들치고 그녀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두운 동백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머리칼에 동백 가지에서 떨어진 이슬이 묻어 있었다.”(조용호 소설 ‘그 동백에 울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