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달력을 펼쳐놓고 보면 2월처럼 아픈 손가락도 없지 싶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섣달의 요란하고 거룩한 뜻에 내몰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죽어 있는 11월이 있기는 해도 2월보다는 그래도 낫다.
새해를 맞아 활기차게 출발한다는 허울 좋은 정월의 수다에 얼굴 한번 세상에 내밀지 못하고 스스로 뒤로 물러나 옹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2월은 다른 달보다 하루 이틀이 짧아 겉으로는 왠지 왜소하여 막내 같은 아련함이 있다. 아이한테는 배부름을 느끼게 해 줄 수는 있지만 2월이란 작은 체구로 견뎌내야 하니 바라보기에도 애처롭다.
흔히 11월이 안쓰러우면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라며 체면치레해 주고 달랜다. 그러면 11월을 하찮게 여기던 사람도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막 달을 위해 온갖 애를 쓴다.
그러나 2월은 그것마저 마땅한 게 없다. 대개의 사람은 1월의 큰 다짐으로 대단한 결심을 세우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가오는 2월을 그냥저냥 보내면 된다고 자기 스스로 위로한다. 그러니 언제나 2월은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감이 허약해 아무리 돌이켜봐도 2월만큼 아픈 손가락은 없지 싶다.
한 해를 시작한다는 대단한 각오로 뽑아든 칼은 뭐라도 자를 기세이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 칼마저 녹슬게 하기 일쑤다.
막연하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으로 새해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번에도 2월은 달라질 게 없다.
커다란 꿈을 가졌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따라야 한다. 그 계획을 챙겨야 하는 달이 2월이다. 그래야 한 해의 희망이 영글게 된다. 이제 2월에 ‘꿈을 챙기는 달’이라고 머리띠라도 매어줄까. 새해의 대단한 각오를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챙겨서 한 해의 삶을 값지게 만드는 충전의 달이라고 내걸면 확실히 의미 있는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
이른 봄 조급하게 피는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모든 식물은 순서의 순리에 따라 성장의 길을 가게 된다. 새순이 돋고, 잎이 피고, 그 다음에 열매를 위한 꽃이 되어야 벌 나비도 찾아오고 수정도 가능하다. 마음이 조급해 잎이 돋아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운 것이 열매를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준비되지 않은 조급함은 어긋남을 초래한다. 충분하고 치밀한 준비로 순리대로 삶을 운영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구의 온난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지바른 화단의 한 켠에 민들레와 할미꽃이 피었다. 시기로 보면 아직 추위도 가시지 않은 2월인데, 며칠의 따스함이 그를 유혹한 모양이다. 충분한 준비도 없이 욕심부려 뛰쳐나오다 보니 몰골이 약하기만하다. 제대로 성숙하여 피웠더라면 나름 튼실한 열매를 맺는 꽃들인데 한 열흘 자태를 뽐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라간다. 두 꽃 모두 씨앗에 깃털을 달고 바람 타고 떠돌아다니는 처지라 아픔만 더한다.
분명 2월은 저 나름의 변명과 명분이 있다. 강렬한 1월의 꿈을 충실히 준비시키는 달이 필요하다. 세상은 큰 꿈만을 기억해 주고 그를 응원하지만, ‘꿈을 챙기는 달’의 숨은 공헌이 있어야 완성된다. 세상을 가늠하기 어려운 때에는 작은 것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주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영원히 서러웠을 2월. 다른 달들이 꼬맹이라 들볶아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문득 대견하다. 날짜를 늘려 달라고 투덜대거나 축원을 하지 않는다. 그의 대견함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위치와 슬기를 가슴에 새기는 참이다. 아무리 아픈 손가락이라 하지만 그는 오늘도 내게 삶의 슬기를 가르쳐 주고 있다. 꿈을 챙기는 달이여.
◇윤진석 프로필
△㈜건우테크 대표이사 △(사)중소기업융합경남연합회장 △청송 진보초등학교 총동창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