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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등록일 2024-10-27 18:28 게재일 2024-10-2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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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블랙박스.

퇴근을 하던 남편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저녁상은 본 척 만 척하고 노트북을 찾았다. 회사에 주차해 놓은 차의 앞 범퍼를 누군가 세게 긁어 놓고 갔다며 범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밥도 먹지 않고 메모리 칩을 넣은 노트북에 눈을 주었다. 차에도 남편의 마음에도 꽤나 흠집이 났나보다.

며칠 전 내 차에 문제가 있어 수리를 맡기면서 남편 차를 며칠 타고 다녔다. 혹이나 내가 긁은 건 아닌지 괜히 조마했다. 남편은 회사에 있었던 시간부터 전 날 주차장 영상까지 찾기 시작했다. 범인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지 그 전 영상까지 뒤지고 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기다리던 나는 배가 고파 먼저 밥을 몇 숟갈 떴다. 그 순간 노트북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였다. 주차 되어 있던 영상만 보던 남편이 주행하면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나의 목소리를 틀어 놓고 듣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꿀맛 같던 밥알이 돌처럼 딱딱해져 왔다. 까먹고 있었던 전화 내용이 기억났던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는 운전 중 계속 이어졌다. 내 귀에도 들리는 내용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남편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얼마 전 시아버님이 쓸개 수술을 했다. 공직에 계셨던 아버님은 평소에도 말이 없으셨고 편찮아도 자식들 걱정할까봐 표현도 안 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갑자기 새벽부터 배가 아파 감당을 못하셨고 응급실을 갔는데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했단다. 겁이 났는지 장남인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과 새벽에 병원에 가보니 아버님은 혼자 계셨다. 당연히 같이 계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렇게 아파 병원을 가는 걸 알았으면서 그 새벽에 혼자 응급실을 보냈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나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열심히 주고받았다. 남편은 그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성대모사까지 해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 말했던 내용을 다시 듣게 되니 내가 들어도 좀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 우리의 표정은 굳어 있는데 전화 속은 남의 이야기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고 있었다. 블루투스로 통화를 하다 보니 함께 공감해주며 장단을 쳐 준 친구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불편한 드라마 한 편을 라디오로 듣고 있는 듯 했다.

“아줌마들 모이면 늘 시어머니 욕이구나”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처음에는 남편도 이해하는 듯 웃으며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 뿐 아니라 자기 집의 흑역사까지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일러바치듯 끝까지 말하고 있는 아내를 이해해 주기는 힘들었나보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범인도 찾지 못했는데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에는 거의 보지도 않던 블랙박스를 갑자기 들고 오리란 걸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남편의 차라는 생각을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친구와 나누었던 뒷이야기들이 다 옳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유쾌하지 않을 터인데 어머니 흉내까지 내 가면서 깔깔대는 소리를 직접 다 들었으니 배신감마저 들었을 것 같다. 남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가며 함께 동참한 친구는 또한 무슨 죄란 말인가. 나의 머릿속은 하얗게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온 과거의 잘못까지 다 드러나는 요즘이다. 비밀이란 수줍은 소녀의 얼굴처럼 숨길 수 없는 단어인 것 같다. 시기는 언제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다 드러나고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안 하고 살려니 어딘가가 간지러워 비밀스럽게 나눈 우리들의 대화 덕분에 나는 며칠을 남편 비위를 맞추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했다.

남편이 진짜 찾고 싶었던 범인은 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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