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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껍질

등록일 2024-04-17 18:34 게재일 2024-04-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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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귀자 수필가
피귀자 수필가

‘여인과 노인’이라는 거장 루벤스의 그림 앞에 섰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노인이 젊은 여인의 가슴을 빨고 있는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에, 먼저 불쾌한 감정을 노출하기 일쑤라고 한다.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반나체의 노인을 통렬히 꾸짖던 사람들에겐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인이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유형으로 비춰졌을 테니 말이다. 삼류 포르노 같은 그림은 알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나고 그 끝은 대개 아름답지 못했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커다란 가슴을 내놓고 있는 그림 속의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고 로마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둔 후 ‘음식투입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딸은 해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에 찾아갔던 것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엔 핏발이 섰으리라.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금 밖으로 사라지려는 아버지. 여인은 가슴을 풀고 불은 젖을 아버지께 물렸다는 것이다. 무엇이 부끄러웠겠는가.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에게 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의 장면이었던 것이다. 부녀간의 사랑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으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아끼는 그림이라고 한다.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도 설명을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종종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옛날 어른들은 종종 본질을 호도할 때 ‘눈에 명태껍질이 씌었나.’라고 나무라기도 하였다.

지인 중에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나 꿀 등을 파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알맞은 값을 받을 판로가 부족하다보니 부탁을 받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려면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고 가끔 물건을 전달해줘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었다. 하지만 사는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물건을 시중보다 싸게 살 수 있고, 파는 사람들은 가계에 도움이 되니 서로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주 연결을 해주었다. 할 수 있는 한 적극 이어주던 어느 날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하면서 중간에서 물건을 얻는 등 이득을 취하리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의 겹이 두꺼울수록 그림자의 깊이는 깊어지는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 오해를 받고 보니 사람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음이 더 서글펐다. 수십 년 사귄 친구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되돌아 보였다. 사람들은 소개를 위해 입을 떼는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자신에게 이로움이 생기지 않는 일에는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음도 알게 되었다.

생각과 믿음에도 숨이 있다. 어떤 생각에는 숨통이 트이고, 어떤 생각에는 숨이 막힌다. 내가 한 행동처럼 좋은 일 한답시고 나서는 이는 오지랖이 넓어서가 아닐까. 한번은 소개를 해주었을 뿐인데 우리 집에 보낸 걸로 착각하는 해프닝으로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었다. 말의 독한 상처에 베인 이후로 나서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또 딱한 사정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옛날엔 그냥 버렸던 마른 명태껍질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콜라겐이 많다고 알려지자 기호식품이 되었다. 튀기거나 볶은 반찬은 맛도 괜찮은 편이다. ‘눈에 명태껍질을 발랐나’라고 질책하던 말의 뜻은 아무리 얇을지라도 눈에 막을 치면 사람의 품성이나 물건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이나 사물의 이치, 사람사이의 모든 관계에도 해당되리라. 눈에 불필요한 명태껍질을 떼고 교만과 아집과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내뿜는 세상의 향기들이 발을 헛디뎌 사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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