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예술가 조금진. 태양처럼 붉은 빨강, 한여름의 짙은 초록을 삼킨 그녀의 작품에선 자연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회적 기준에 잘 맞는 모범생 딸에서 태양을 품은 작가가 된 그녀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대학 교단에 있던 아버지는 딸이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다. 당시엔 당연하다 여겼다. 그렇게 첫 번째 대학이 정해졌다. 아버지가 퇴임을 하고 병으로 이듬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허무함을 느꼈다. 허무함은 그녀를 바꿔놓았다.
더 이상 사회적 기준의 착한 딸이 아닌 ‘조금진’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기로. 근처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간섭 없이 하루 종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1년쯤 지났을 때 원장이 대학원을 권유했다. 친구가 본교 대학원 진학을 추천했고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 원장을 찾아갔다. 마침 대학원 원장 전공이 염색이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모습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퇴임을 앞두고 있던 교수가 작업실을 준비 중이었는데 덕분에 한 학기 동안 배움의 기회를 얻고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됐다.
대학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다양한 시도를 하기엔 제약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특정 테두리 안에 갇히는 게 두려워졌다. 갇히지 않기 위해 누구와 부딪히는 것이 싫었기에 휴학을 신청했다. 한동안 자유롭게 작업을 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일본에 있던 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병간호 하고 있던 그녀를 안타까워하던 언니는 기분 전환 겸 일본 방문을 권했다.
어학연수로 체류하게 된 일본 생활은 머지않아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다. 보통 여러 군데 원서를 넣어두고 발표를 기다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학교에만 원서를 넣었다. 우에노에 있는 학교 캠퍼스 건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 주변에선 특이하다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일본 유일의 국립 미술대였기 때문에 진학이 쉽지 않았다. 결과는 다행히 합격이었다.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시스템과 전체가 다 모인 앞에서 매학기별 1주일씩 이어지는 평가는 힘들었다. 석사를 마치고 아쉬움이 남아 박사 과정으로 넘어갔다. 어려운 선발 과정을 통과했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박사 과정 중 담당 교수님의 부고는 학과의 존폐 위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향수병까지 찾아들어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을 때 경주의 소나무숲을 만나게 됐다. 소나무의 에너지와 이미지를 작품으로 만들어냈고 박사 과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귀국, 결혼, 그리고 남편 직장을 따라 경주로 이주라는 굵직굵직한 일들이 한 해 사이 모두 이뤄졌다. 차례차례 아이들이 태어났다. 셋. 육아만으로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청와 갤러리’를 시작했다. 그곳에선 당시 경주에선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인문학 강좌부터 누드 드로잉 수업까지 이뤄졌다. 6여 년간 고군분투한 시간. 작업 또한 놓지 않았다. 실과 바늘 천을 도구로 본인이 생각하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생명력을 표현한다. 통상적으로 실크에 프랑스 염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수증기로 쪄내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수증기로 찌면 염료가 고착되어 발색되는데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르다. 그 과정에서 마치 생명이 태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바느질 작업이 추가되기도 하는데 예상에서 더해진 우연적인 효과가 겹쳐져 나온다.
그녀의 작업엔 강렬한 원색이 두드러지는데 빨강, 초록이 대표적이다. 빨강은 태양과 사람의 피에서 차용했다. 붉은 색이 나무의 기둥이라면 초록은 나무의 윗가지다. 다음 작업은 뿌리를 상징하는 노랑이라며 말하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는 생명의 에너지와도 연결된다. 작품에서 보여주듯 나무를 좋아하는 그녀는 특히 섬세하지 않은 엄나무를 손꼽았다. 잎이 나기 전 예보하는 느낌과 가시에서 생명력을 느낀다.
어느덧 세 아이는 이소(離巢)를 준비 중이다. 다시 ‘조금진’만이 오롯이 기준이 될 그녀의 새 봄. 그녀가 피워낼 새순을 기대한다.
/박선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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