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팬이 만들어 가는 일본의 SF 문화

등록일 2023-12-26 18:06 게재일 2023-12-27 18면
스크랩버튼
강지우 SF평론가
강지우 SF평론가

일본은 ‘오타쿠’의 나라로 불린다. 한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해 파고드는 마니아가 많다는 뜻이다. SF도 예외는 아니다. 12월 초, 교토대 SF/환상문학 연구회가 주최하는 ‘교토SF페스티벌’이 온라인으로 열려 한국에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300여 명의 참가자 중에는 장년층 여성도 눈에 띄었는데, SF 향유의 역사가 길어서인지 팬의 연령대가 우리나라보다 넓은 듯했다. 페스티벌에서는 작가나 평론가를 초청한 강연이 오후에 펼쳐지고, 밤에는 료칸 숙소를 통째로 빌려 방마다 주제(SF 초심자의 방, 공모전 준비 방 등)를 잡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요즘은 합숙 대신 디스코드 채팅을 활용한다. 올해 페스티벌에서 다룬 주제 중에는 해외 퀴어 SF의 약진과 SF 작품의 아이디어를 산업계에 컨설팅하는 ‘SF 프로토타이핑’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마추어 SF 비평, SF 번역 등 동인지를 홍보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팬 활동이라 내심 부러웠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명맥이 끊긴 SF컨벤션이 일본에서는 여럿 운영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행사는 무려 1962년부터 이어져 온 ‘일본 SF대회’로, 성운상 시상식이 열릴 정도로 대표성을 띈다. 매년 1천 명 이상 참가자가 몰리며 전성기에는 수천 명 이상이 운집했다고 한다. 일본SF작가클럽이 주최하는 ‘SF 카니발’은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본 SF대상 시상식과 작가 사인회 등이 열린다. 올해는 황모과, 해도연 작가를 초청해 한일 SF 대담이 열리기도 했다.

가을에 ‘교토SF페스티벌’이 열린다면, 봄에는 ‘SF세미나’와 ‘HAL-CON(하루콘)’이 열린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에서 이름을 땄는데, HAL의 일본어 발음 ‘하루’는 행사가 열리는 봄을 뜻하기도 한다. 2007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콘(세계 최대 규모의 SF 컨벤션) 스태프들이 운영하고, 켄 리우, 래리 니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도 초빙한다. 컨벤션 형태의 행사 외에 2001년부터 한 달에 한 번 ‘SF 팬 교류회’도 열리고 있다.

이런 행사들에 참여해 보니 작가와 팬,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 없이 모두가 SF 팬이라는 정체성을 띠고 모여 즐겁게 어울린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SF 팬이었다가 작가, 평론가, 출판 편집자 등 SF 업계에서 일하게 된 이들도 많다. SF 팬덤이 SF 문화를 이끌어가는 양상이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특유의 마니아적 끈기와 열정이 깊고 견고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PC통신 SF 동호회를 기점으로 SF 팬 커뮤니티가 여럿 있어 왔으나 그 활동이 이제는 많이 움츠러든 상황이다. 최근의 SF 붐은 SF 마니아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기존 문학 향유층이 SF까지 섭렵하게 된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일본의 사례가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니아 지향보다는 SF 애호층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SF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역사는 짧지만,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문화가 피어날 것이다.

SF의 눈으로 세상보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