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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팬이 만들어 가는 일본의 SF 문화

강지우 SF평론가 일본은 ‘오타쿠’의 나라로 불린다. 한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해 파고드는 마니아가 많다는 뜻이다. SF도 예외는 아니다. 12월 초, 교토대 SF/환상문학 연구회가 주최하는 ‘교토SF페스티벌’이 온라인으로 열려 한국에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300여 명의 참가자 중에는 장년층 여성도 눈에 띄었는데, SF 향유의 역사가 길어서인지 팬의 연령대가 우리나라보다 넓은 듯했다. 페스티벌에서는 작가나 평론가를 초청한 강연이 오후에 펼쳐지고, 밤에는 료칸 숙소를 통째로 빌려 방마다 주제(SF 초심자의 방, 공모전 준비 방 등)를 잡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요즘은 합숙 대신 디스코드 채팅을 활용한다. 올해 페스티벌에서 다룬 주제 중에는 해외 퀴어 SF의 약진과 SF 작품의 아이디어를 산업계에 컨설팅하는 ‘SF 프로토타이핑’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마추어 SF 비평, SF 번역 등 동인지를 홍보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팬 활동이라 내심 부러웠다.한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명맥이 끊긴 SF컨벤션이 일본에서는 여럿 운영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행사는 무려 1962년부터 이어져 온 ‘일본 SF대회’로, 성운상 시상식이 열릴 정도로 대표성을 띈다. 매년 1천 명 이상 참가자가 몰리며 전성기에는 수천 명 이상이 운집했다고 한다. 일본SF작가클럽이 주최하는 ‘SF 카니발’은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본 SF대상 시상식과 작가 사인회 등이 열린다. 올해는 황모과, 해도연 작가를 초청해 한일 SF 대담이 열리기도 했다.가을에 ‘교토SF페스티벌’이 열린다면, 봄에는 ‘SF세미나’와 ‘HAL-CON(하루콘)’이 열린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에서 이름을 땄는데, HAL의 일본어 발음 ‘하루’는 행사가 열리는 봄을 뜻하기도 한다. 2007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콘(세계 최대 규모의 SF 컨벤션) 스태프들이 운영하고, 켄 리우, 래리 니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도 초빙한다. 컨벤션 형태의 행사 외에 2001년부터 한 달에 한 번 ‘SF 팬 교류회’도 열리고 있다.이런 행사들에 참여해 보니 작가와 팬,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 없이 모두가 SF 팬이라는 정체성을 띠고 모여 즐겁게 어울린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SF 팬이었다가 작가, 평론가, 출판 편집자 등 SF 업계에서 일하게 된 이들도 많다. SF 팬덤이 SF 문화를 이끌어가는 양상이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특유의 마니아적 끈기와 열정이 깊고 견고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우리나라에도 PC통신 SF 동호회를 기점으로 SF 팬 커뮤니티가 여럿 있어 왔으나 그 활동이 이제는 많이 움츠러든 상황이다. 최근의 SF 붐은 SF 마니아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기존 문학 향유층이 SF까지 섭렵하게 된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일본의 사례가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니아 지향보다는 SF 애호층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SF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역사는 짧지만,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문화가 피어날 것이다.

2023-12-26

왜 우리나라 SF 영화는 흥행하지 못할까?

강지우 SF평론가 우리나라 SF 영화 ‘더 문’은 왜 흥행에 실패했을까? 국내 최초 달 탐사 영화로 개봉 전에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종 관객은 50만 명에 그쳤다. 시각 효과는 손색없었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위기 상황이 극의 긴장과 감동을 반감시켰다는 평이 많았다. 지난해 개봉한 ‘외계+인 1부’에서는 흥미로운 설정 속에 김태리 등 배우들의 명연기가 감탄을 자아냈지만, 산만한 구성과 어색한 대사가 영화의 완성도를 해쳤다. 내년 초 개봉할 2부에서는 흥행 부진을 만회할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이런 작품들을 팟캐스트에서 소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우리나라 SF 영화는 흥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줄곧 품었던 의문에 대해 지난달 18일 개최된 ‘제2회 포스텍 SF 데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제2회 포스텍 SF 데이’에는 김초엽 작가, 김겨울 작가, 이다혜 기자가 연사로 초청되었다. 많은 청중의 열띤 참여가 행사를 알차게 완성했다. 1부 북토크에서는 예비 작가들의 질문이 이어져 그야말로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 펼쳐지기도 했다. 2부 시네마 토크에서는 이다혜 기자가 ‘SF 영화의 휴머니티’를 주제로 강연했다. 보통 한국 SF 영화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는 ‘휴머니즘’이 알고 보면 ‘인터스텔라’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SF 블록버스터의 중심 주제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은연중에 왜 한국 SF 영화는 ‘신파’를 못 넣어 안달이지? 라고 불평했던 터라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실제로 휴머니즘을 탐구하는 SF는 요즘 한국 SF 문학계의 주된 흐름으로, 국내외에서 평론가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결국 과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휴머니즘만이 한국 SF 영화의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SF 영화에는 큰 자본이 투입되기에 새로운 시도 보다는 기존의 공식을 따르는 시나리오가 채택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특수효과 등 시각적, 기술적 부분에 치중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분위기가 더해져 이야기에는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도 한다. 결국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속은 진부하고 빈약한 뼈대의 SF 영화가 나오게 되는 환경인 것이다.그러나 모든 한국 SF 영화가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고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다.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우리나라에 SF 영화가 충분히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경향을 파악하기에는 절대적인 작품 수가 부족한 것이다. 미국 SF 황금기를 이끈 작가였던 시어도어 스터전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 장르에나 뛰어난 작품보다는 모자란 작품이, 성공하는 작품보다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품이 훨씬 많다. SF 또한 그렇다. 다종다양한 SF 영화가 만들어져야 경험이 축적되고, 더 과감하게 경계를 여는 작품도 시도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성공 사례가 나올 수 있다. 또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칭찬이든 비판이든 관객들의 꾸준한 관심도 필요하다. 앞으로도 용감한 한국 SF 영화들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2023-12-12

연예계와 대중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인공지능 개

강지우 SF평론가 최근 ‘최애의 아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었다. 오프닝 곡에 안무를 따라 하는 SNS 챌린지가 유행할 정도로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았다.주인공이 ‘아이’라는 아이돌의 아들로 환생한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시작하지만, 주로 다루는 내용은 연예계의 뒷사정이다. 아이돌이 당하는 스토킹 범죄, 연예인에게는 사치로 여겨지는 사생활, 연예계에서 거물 PD가 행사하는 영향력, 연애 리얼리티 쇼 출연자에 대한 악플 공격과 언론 폭력 등 지금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이슈가 되는 주제가 연이어 등장한다.2023 문윤성 SF 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단요 작가의 ‘개의 설계사’도 연예계의 화려하고도 비틀린 속성을 소재로 삼았다. 최정상급의 인기를 누리는 슈퍼스타, 슈퍼스타가 기르는 로봇 개, 그 로봇 개의 인공지능을 설계한 설계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로봇 개는 대중의 관심에 시달린 슈퍼스타 소녀의 정신적 방황과 일탈을 지켜보며, 전 애인의 자살이라는 거대한 스캔들에도 관여한다.한편으로 이 작품은 인공지능을 축으로 삼아 인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깊이 파고든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며 기본소득이 정착된 사회, 그러나 일부 인간은 더 풍족한 삶을 위해 여전히 일을 한다. 주인공은 인간의 친구가 될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설계사 본인에게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이 결핍되어 있어서,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상대의 반응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해야 한다. 일상 대화 속에서조차도 무엇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대답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설계하는 인공지능과도 닮은 모습이다.그의 고민을 따라가며 독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감정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새삼스레 발견한다.인터뷰에 따르면 작가는 감정과 애정의 ‘본질적인 징그러움’이 윤리와 어떻게 뒤엉키는지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한다. 대중이 연예인의 사생활에 보이는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생각하면 ‘징그러운 애정’이라는 표현이 단번에 와닿기도 한다.연예계를 둘러싼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인공지능은 언뜻 생소한 조합이다. 그러나 소설은 징그러울 정도로 뒤틀린 감정들이 증폭되는 현장을 인공지능의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SF의 미덕인 ‘낯설게 보기’를 선사한다. 외로워하던 슈퍼스타를 그의 인공지능 로봇 개만이 위로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더불어 작가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처럼, 기존 사회에 견고한 도덕이나 질서를 아랑곳하지 않는, 또는 부러 그 틈새를 집요하게 공략하고 비틀어 엶으로서 세계를 확장하는 과감함도 고유한 매력이다.연예인의 사생활이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일반인의 연애사가 리얼리티 쇼로 화제를 끄는 요즘이다. 관심을 먹고 사는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에게는 잔인한 폭력이 가해지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인간성이 무엇인지 되묻는 시대에, 우선 우리의 감정이 무엇에 바탕하고 있는지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2023-11-14

동네 책방에서 만나는 SF

강지우SF평론가 김초엽 작가가 지난 10월, 중국 은하상의 ‘최고인기외국작가상’을 수상했다. 성운상에 이어 중국의 양대 SF 문학상에서 모두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렇게 기쁜 소식이 들릴 때마다 작가와 포항의 한 동네 책방에서 진행했던 공개방송 겸 북토크가 떠오른다. 방송을 진행한 지 6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날은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201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김초엽 작가와 팟캐스트 ‘서바이벌SF키트’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북토크 행사가 열렸다. 포항 효자시장 안 독립서점 ‘달팽이 책방’에서였다. 책방 사장님이 마련해주신 포근한 공간과 향기로운 차, 설레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김초엽 작가와 ‘서바이벌SF키트’의 호스트 토끼한마리(내 닉네임이다), 공상주의자가 마법처럼 몽글몽글한 시간을 만들어 냈다. 그 시간 우리가 흠뻑 빠져들었던 작가의 세계는 SF의 언어로 쓰였기에 문화권을 넘어 공감받았는지도 모른다.그러고 보면 ‘달팽이 책방’은 SF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영어원서낭독모임 ‘영자’에서는 영화 ‘콘택트(Arrival)’의 원작이기도 한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다. 한국어로 읽어도 만만치 않은 책이라 영어로 도전하기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의 유려한 문장을 작가가 의도했던 대로 음미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나누며 안도의 웃음을 짓기도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테드 창의 소설은 인물이 아닌 과학이 주인공으로 보일 만큼 과학적 사고나 가치관이 작품의 뼈대를 형성한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어려운 작품도 간혹 있지만, 궁리하고 이해했을 때 느끼는 경이감은 다른 장르에서 느끼기 어려운 감동이다.얼마 전에는 포스텍SF어워드와 문윤성SF문학상 대상을 받은 지동섭 작가와 함께하는 ‘SF 소설쓰기’ 워크숍도 있었다. SF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창작의 원리를 알면 SF를 비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까 싶어 서둘러 참가 신청을 했다. 역시나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열띤 합평 속에 SF를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할지 많이 배우는 수업이었다. 수강생들의 글솜씨에 감탄하는 한편, 창작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내가 지방에 살면서도 SF적, 문화적 토양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책방 덕분이다. ‘달팽이 책방’에서는 유일무이한 개성의 독립출판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사장님의 안목으로 큐레이션 해 놓은 단행본(과학 교양 도서와 SF 소설도 빠지지 않는다)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시중의 카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홍차와 허브차 컬렉션을 맛보는 사치도 누릴 수 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독서 모임은 지역 문화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포항 지역의 문화예술인이 전시회나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이렇게 소중한 문화 플랫폼이지만 전국의 동네 책방 현황을 보면 운영이 어려워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드문 것도 사실이다.만약 그대의 동네에 운 좋게도 책방이 남아있다면, 이번 주말에는 동네 책방에 놀러 가 보는 건 어떨까?

2023-10-31

영웅도, 괴물도 될 수 있는 초능력자 구룡포

강지우 SF평론가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무빙’이 화제다. 한효주, 조인성 등 유명 배우들이 초능력자로 열연하는 가운데 류승룡 배우가 분한 무한 재생 능력자 장주원의 고향은 포항 구룡포다. 묵처럼 투명하게 삶은 개복치를 맛있게 먹는 모습도 나온다. 개복치를 어느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지 찾는 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포항에서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경조사에 빠지지 않는 친숙한 음식인데, 드라마에서 보니 반가웠다.장주원을 주인공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개복치는 꽤 여러 번 등장한다. 왜 하필 개복치일까? 개복치는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게 예민한 생물이다. ‘살아남아라! 개복치’라는 게임이 유행했을 정도다. 장주원도 겉으로는 투박하고 강해 보이지만, 속은 허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이다. 길을 잃었다며 반려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무한 재생 능력으로 조직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 능력 때문에 결국 ‘괴물’이라 불리며 배척당했기 때문이다.‘무빙’의 포스터에는 “우리는 영웅도, 괴물도 될 수 있어”라는 문구가 있다.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만, 남들과는 다른 힘이 차별을 낳는다는 의미로도 읽힌다.SF에서 초능력자는 여러 가지 시선으로 그려진다.‘어벤져스’에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초능력자가 ‘엑스맨’ 시리즈에서는 돌연변이 괴물로 공포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 타고난 특성을 차별의 이유로 삼는다는 점에서 현실의 인종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엑스맨에서 대립하는 양 진영의 수장이 흑인 인권 운동가를 모델로 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차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의 공존을 꾀하는 자비에는 마틴 루서 킹으로부터, 결국 인간을 힘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매그니토는 맬컴 엑스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이렇게 초능력자가 차별받는 SF는 현실의 우리 사회를 낯설게 보게 한다. 초능력자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있는 데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다. 단지 우리와 다를 뿐인 이들에게 열등하고 더럽고 위험하다는 인식을 ‘차별의 이유’로 덧씌워 내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무빙’에서처럼 어쩌면 영웅이 될 수 있을 평범하고도 찬란한 이들을 우리는 괴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지금의 한국 사회에 초능력자가 있다면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될지,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 SF작가들의 앤솔러지 ‘이웃집 슈퍼히어로’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수록작 중 이서영 작가의 ‘노병들’도 ‘무빙’처럼 국정원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세대 간의 정치적 갈등을 중심으로 덜 화려하지만, 더 처절한 전투가 펼쳐진다.김보영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에서는 반복되는 대형 참사 현장에서 묵묵히 사람을 구하는 시간 능력자가 등장해 묵직한 여운을 준다.

2023-10-17

외로움의 총합을 늘리지 않는 철도망으로

강지우 SF평론가 지난주 전국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이 있었다. 40% 내외의 열차가 운행 중지되었다. 필자도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급하게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파업의 가장 큰 요구 사항은 수서행 KTX 운행, 궁극적으로는 KTX와 SRT의 통합 운영을 통한 지방 소외 해소다. 9월 초부터 포항역에서도 SRT를 탈 수 있게 되었으나 하루 2회 운영에 불과하며 대신 부산-수서 SRT 노선이 줄었다. 결국 지방민들이 겪는 불편의 총량은 줄이지 못한 채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기인 셈이다. 변두리 지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교통수단의 발달이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이라던 한 작품이 떠올랐다.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김초엽 작가의 베스트셀러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성간여행이 일상적인 우주 개척 시대에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안나는 먼저 이사한 가족을 따라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려 한다. 그런데 슬렌포니아로 향하던 ‘워프 노선’이 훨씬 빠른 ‘웜홀 통로’의 개발에 밀려 운항을 중단한다. 슬렌포니아 근방에는 웜홀 정류장이 없다. 별안간 안나와 가족은 빛의 속도로 가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거리로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안나 말고도 이산가족이 적지 않았지만, 우주 연방 정부는 그 외로움들을 무시한다. 그들을 일일이 고향으로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제주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보통 서울이나 인천쯤으로 생각하지만, 제주도민의 체감상 더 먼 곳은 대전이라고 한다. 대전에는 공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포항에서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고속철을 타도 오송이나 대전을 거쳐 크게 돌아가야 하는 광주는 서울보다 40분 더 멀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 고속철이 처음 놓이고 20년이 넘도록 영호남을 직통으로 잇는 고속철도가 없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영호남의 오랜 갈등과 불균형한 발전은 이런 상황의 원인일까, 결과일까? 최근 들어서야 진주-광양, 부전-마산 등의 노선이 이어지고 있다. 달구벌 대구, 빛고을 광주의 첫 글자를 따 두 도시를 잇는 ‘달빛고속철도’도 2030년 개통 예정이다. 그런데 수요와 경제성을 따지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기 어려워 특별법 제정까지 필요하다고 한다.지난 6월 윤 대통령은 ‘평택~오송 고속철도 2복선화 착공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어디에 살든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며 보다 촘촘한 교통인프라 구축이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어느 곳의 교통을 먼저 확충할 것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지방이 소외되지 않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리지 않는 교통인프라는 기술의 발전이 아닌 인간의 고민으로 이뤄갈 수 있다.

2023-09-19

포항 하면 SF가 떠오르기를

강지우 SF평론가 2019년, 포항에서 ‘제1회 포항 SF 페스티벌’이 열렸다. 육거리에 위치한 인디플러스 포항 영화관을 중심으로 SF 영화제, 토크콘서트는 물론 한국 SF 100년사 전시와 각종 부대행사가 알차게 펼쳐졌다. 필자가 SNS에 행사를 공유하니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이 많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컨택트’와 ‘매트릭스’를 보고 우주과학자, 뇌과학자와 영화 속의 과학에서 시작해 우리의 삶과 우주로 확장하는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특히 인상에 남았다. 그러나 ‘제1회’에 담긴 지속하고자 하는 포부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포항 SF 페스티벌은 열리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도 있었겠지만, 찾는 관객이 다소 적었던 것도 원인이 아닐까 싶다.포항 SF 페스티벌은 포스텍에 위치한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주관이었다. APCTP는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이론물리 연구소로, 세계적인 석학들이 물리를 연구하는 곳이다. 동시에 이곳은 우리나라 ‘과학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20년 가까이 포항시와 함께 ‘포항 가족 과학축제’를 운영하는 주체가 바로 APCTP다. 매년 ‘올해의 과학도서’를 선정해 저자 강연을 개최하며, 이공계 학생 대상의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도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SF와의 인연도 깊다. 2008년부터 웹진 ‘크로스로드’에 SF 코너를 운영해 온 덕에, 지금은 거장이 된 SF 작가들이 데뷔 초기, SF를 발표할 마땅한 지면이 없던 ‘보릿고개’를 버티고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처음 SF의 매력에 빠진 것도 ‘크로스로드’에서 낸 SF 앤솔로지(여러 작가의 작품집)를 읽고서였다.APCTP가 위치한 포스텍도 SF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포스텍은 2020년부터 ‘포스텍 SF 어워드’를 개최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SF작가 김초엽이 나온 대학이기 때문일까. 일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여타 SF 공모전과는 달리, 이공계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만을 참가 자격으로 받는 것이 특징이다. 이공계 전공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SF계를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할 작가와 작품들이 발굴되고 있다. 포스텍은 SF 작가의 강연이 자주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SF, 오래된 미래의 서사’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여섯 명의 연속 강연이 열렸다. 또한 ‘제1회 포스텍 SF 데이’에서는 맨부커상 후보에 빛나는 정보라 작가와 김겨울 작가의 북토크가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처럼 포항과 SF의 연결고리가 여러 겹으로 견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 연구의 최첨단을 이끄는 포스텍과 최첨단의 기술로 지어진 제철소가 일상처럼 가까운 도시. 이곳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 낼 미래를 꿈꾼다. SF적 상상력을 배양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이제 ‘포항’ 하면 푸른 바다와 맛있는 해산물뿐 아니라 ‘SF’가 떠오르기를 바란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곳,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SF 기반 문화 콘텐츠가 한껏 피어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제2회 포항 SF 페스티벌’이 벌써 기다려진다.

202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