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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등록일 2023-11-05 18:16 게재일 2023-11-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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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만원.

독거 할머니, 할아버지 스무 분께 생일상을 차려 주기로 한 날이다. 복지관에 들어서니 10시였다. 12시까지 오시면 된다고 했는데 어르신들이 벌써 와 계신다. 어르신들께 따뜻한 커피를 한 잔씩 드렸다.

“아이구야, 고맙네. 고마워.”

흔하고 흔한 게 커피인 것을. 커피 한 잔에 어르신들은 마음을 다 내놓으신다. 할머니들은 나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한다. 배가 고파서 일찍 와 계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파서 일찍 와 계신다는 것을 나는 어르신들의 한마디에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엇엔가 홀린 듯, 내 부모를 대할 때처럼 온기를 가득 담은 시선을 보내 주었다. 12시가 되기도 전에 어르신들은 모두 도착했다.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혼자 먹는 것은 맛이 없다고 하신 어느 어르신의 말씀이 가슴이 찡했다.

밥을 먹다가, 나는 빨간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 한 분께 시선이 멈췄다. 할머니는 미역국을 드시다 말고 미역 줄기처럼 긴 눈물을 흘리셨다. 미역귀 같이 갈라진 손으로 눈물을 훔쳤으나, 어느 누구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그 침묵에 공감하고 있었다. 할머니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리고 두텁고 거친 손마디를 꾹, 잡았다. 할머니는 무겁게 입을 여셨다.

“내, 시집와서 3년 되던 해, 영감 죽고 50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생일상….”

시집오던 첫 해에 남편이 미역국을 끓여 줬는데 미역국을 보니 영감 생각이 너무 나서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늙으니 자식도 소용없다 하시며 영감 보고 싶어서 빨리 영감 곁으로 가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신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 영감 해 드릴게요”

“진짜가? 진짜가?”

할머니는 못 미더운 듯 자꾸 확인을 하셨다. 할 일이 많았지만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했다. 할머니의 살아온 안타까운 이야기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 한 번도 찾아 주지 않는 자식들 이야기는 몇 번씩 반복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 내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새댁아, 나는 세상에서 나무가 최고 부럽대이.” 할머니는 뜬금없이 나무가 부럽다고 하신다. 출세한 자식도 아니고, 등 긁어줄 영감도 아니고 그저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신다. “봐래이, 나무는 봄에 꽃 핀다고 사람들이 보러 오제, 여름에는 덥다고 나무 밑에 모이제, 가을에는 늙어도 단풍 본다고 너도나도 찾아 주지 않나?”

할머니가 왜 나무가 제일 부럽다고 하는지 알고 나니 나는 스스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도 바쁜 일을 핑계 대며 부모님을 찾은 지 오래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고 있으니, 나 또한 빨간 스웨터 할머니 자식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 얼굴은 할머니의 스웨터에 반사된 듯 붉어지고 있었다.

김경아 작가
김경아 작가

“제가 이제 할머니 보러 갈 테니 저의 나무가 되어 주세요. 저는 사시사철 갈게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까르르 웃으셨다. 행사가 끝나고 짐을 챙겨 나오는데 빨간 스웨터 할머니가 갑자기 다가와 내 손을 꼭 잡더니 무언가를 건네주고는 부랴부랴 도망치듯 가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영감님을 만나신 듯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가셨다. 꼬깃꼬깃 구겨진 만 원짜리 하나가 내 손바닥의 지문을 물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혼자서 열 번도 더 불러보았다. 눈물이 났다. 어쩌면 전 재산 일지도 모르는 만 원에 할머니의 지난 세월이 다 들어있었다. 나는 가로수의 은행잎에 시선을 멈추었다. 어디를 보며 여기까지 왔을까. 앞으로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이 어디일까. 무관심의 세상에 나도 일조를 하고 있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누가 죽어 나가는지. ‘나 좀 봐 달라’는 가련한 소리를 어쩌면 우리는 돈으로, 옷으로, 음식으로 잠재우거나 아예 무시하지 않았던가.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돈을 쉬이 내게 주었던 할머니의 마음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마음에 오버랩 되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큰 재산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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