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꺼내 나를 비춰본다. 화장이 지워진 여자가 거울 바깥의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여자도 가끔은 거울 바깥의 내가 궁금해서 바깥을 내다볼지도 모른다.
스마트 폰을 열어 날씨를 확인한다. 강수 확률 50%다. 바깥을 내다보니 하늘이 새파랗고 단단해 보인다. 저 하늘이 깨져 물방울이 된다는 것은 상상 바깥이다. 짐이 될까 싶어 우산을 내려놓는다.
고민은 또 있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차를 가져갈까, 버스를 탈까. 캐리어를 들까, 작은 가방을 멜까. 평소에는 하지 않을 고민이 겹겹이다. 일상에 이러한 고민이 많다니, 그냥 하던 대로 하던 것을 막상 작심하니 하나를 선택하기 쉽지 않다.
카드 하나를 쥐고 버스를 탄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내린다. 바다 뒤로 마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무작정 걷자니 5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도 보이고, 한없이 바다만 바라보는 등대도 보인다. 눈에 담기는 것들과 한없이 느리게 늑장을 부리고 싶다
해변에는 화려한 무대나 환호하는 군중이나 빛나는 조명도 없다. 반겨주는 이도 알아보는 이도 없다. 잘 익은 밀이삭을 닮은 황금빛 모래사장에 앉아 물멍에 들고 지나온 삶의 대본들을 불러 모은다. 주어진 자유에는 내가 주인공이다.
혼자만의 놀이에도 배가 출출해진다. 따뜻한 매운탕을 먹을까, 시원한 물회를 먹을까. 바다를 옆에 두고 보니 매운탕과 물회라는 갈림길이 있다. 시원한 물회 한 그릇 먹고 나자 따뜻한 차 한잔 생각난다. 쌉싸래한 커피를 마실까. 달짝지근한 홍차를 마실까.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니 나른한 피로가 몰려든다. 조는 풍경을 연출할까 하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하는 자유를 더 누리고 싶어 바닷가를 거닌다
갑자기 후둑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진다. 물방울은 하나, 셋, 열, 점점 굵어지더니 금세 장대비로 바뀐다. 접이식 우산 하나가 무에 그리 무겁다고, 얄팍한 선택을 탓하면서 비를 피할 곳을 찾는다. 허둥대는 사이 이미 마음속까지 축축하게 젖어 든다. 젖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근다. 내가 젖는지 바다가 내게 젖는지. 물방울을 발로 차며 뛰는데,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아이, 청년, 어른, 엄마 역할로 숱한 나날을 살았으면서 한 번도 연출해보지 못했던 이 낯선 역할, 나는 속박에서 탈출한 여인이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영화의 주인공이다. 바쁜 일상과 중년만이 지니는 무게가 다 씻어진 듯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이다. 만약 우산을 가져왔다면 이러한 혼자만의 낭만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면 내가 누리지 못한 풍경과 마주친다. 혼자 산길을 걷다가 영문 모르게 눈이 마주친 다람쥐의 눈동자, 따끈한 커피 한 잔 들고 산사 툇마루에 앉아 들어보는 풍경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발 너머로 펼쳐지는 한 폭의 수채화, 도심 골목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옛사랑의 연가, 우연의 길목에서 건진 풍경들이다.
살면서 늘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며 살았다. 그 길에서 낭패를 보더라도 내 판단이 옳았다며 위안했다. 이 이기적인 생각은 선택받지 못한 일은 무용하다는 확증 편향에 나를 빠트리곤 했다. 거울 바깥에 더 넓고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모른 채 거울 안만 보다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
우리는 때로 관습에 의지하여 삶의 해답을 풀어간다. 홀짝으로 겨루는 구슬 따먹기처럼, 내가 선택하는 것에는 50%가 아니라 100%의 신뢰를 보냈다. 맞춘 쪽은 100이 되고 못 맞춘 쪽은 0이 되는 모순. 하지만 이든 저든 모호할 때, 무작정 하나를 선택해도 오늘처럼 뜻밖의 행복을 누리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혼자만의 놀이가 슬슬 따분해진다. 어느새 강수 확률이 낮아지더니 드문드문 햇빛이 내린다. 비에 젖은 몸이 후줄근하다. 따뜻한 홍차를 주문한다. 이 일탈적 선택의 따뜻함도 새롭다.
거울을 꺼내 나를 비춰본다. 화장이 지워진 여자가 거울 바깥의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여자도 가끔은 거울 바깥의 내가 궁금해서 또 다른 외출을 꿈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