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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안 보이는 정치적 시니어 비하

등록일 2023-08-13 18:56 게재일 2023-08-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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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필자는 ‘노인’이란 단어를 개인적으로 쓰지 않는다. 노인이라는 단어을 공공연하게 쓰는 나라는 아마 한국뿐 일 것이다. 영어에서는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고 하여 경험을 강조하지 늙은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할인을 하는 경우 시니어 디스카운트(Senior Discount)란 단어를 사용한다.

민주당의 정치적 시니어 비하는 끝이 안 보인다. 시니어에서 표를 많이 얻지 못하니까 아예 시니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거나 차등화된 표를 주자고 주장한다.

어떤 정치인이 시니어에게는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 삶이 많이 남은 젊은이에게는 투표권을 더 할당하고 남은 삶에 비례하여 투표권을 비례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 또 다른 정치인이 맞장구를 치며 시니어는 곧 사라질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 중고교생들은 살날이 많으니 한 100표의 권리는 주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참 정신나간 정치인들이다. 표를 얻으려니 모두들 제정신들이 아닌듯하다. 이들의 막말과 비하는 처음이 아니다

과거 대통령 후보는 ‘60대 이상은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집에 쉬셔도 되고….’라는 발언을 비롯해 ‘50대가 되면 멍청해진다. 60대엔 책임 있는 자리는 맡지 말아야’한다는 말도 했다. 심지어 ‘서울 노친네들 투표 못하게 여행 예약해드렸다’는 네티즌의 트윗에 ‘진짜 효자!!’라고 댓글을 단 분이 교수를 하고 장관을 했다는 분이다.

사실상 이들의 시니어 폄하 발언은 표를 얻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치유할 수 없는 습관성 질병의 수준이다. 이들의 발언은 시니어 폄하가 아니라 시니어 혐오의 수준이다. 자기들에게 표를 많이 안준다고 하여 시니어들을 혐오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투표권을 남은 생명과 비례하여 주자고 주장한 그 분은 대학교수까지 했던 분이라고 하는데 정말 수학적 사고가 그 정도인가 묻고 싶다. 그 분 주장대로라면 갓 태어난 1세가 남은 생명이 가장 길기 때문에 가장 많은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 선거제도가 가령 18세 이하에 투표권을 안주는 것은 사고의 성숙도를 고려하는 것이다.

사고의 성숙도는 18세가 넘어 시작되어 계속 경험과 성숙도가 쌓이면서 늘어간다. 사고의 정점의 나이가 몇인가 하는 가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많은 시니어들은 사고의 성숙이 계속 늘어간다고 믿고 있다.

맞장구를 친 의원은 “김 위원장 말이 맞다.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살아있지도 않을 사람들”이라는 섬뜩한 글을 남겼다. 연령과 세대를 선거 득실과 표로 계산하고 재단하는 음습한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표를 주지 않는 유권자를 미워하고 투표권을 제한하자는 반민주적 공상을 하는 당이 ‘민주’라는 당명을 붙이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어간다. 선택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고령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성숙한 사고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니어들에 대한 반감과 저주를 퍼붓는, 조폭적 행패를 즉시 멈추어야 한다. 미래는 청년과 시니어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결정되는 것이다. 합리 운운하면서 시니어 차등 투표까지 토론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당사자는 발언의 맥락을 오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오해가 된 것이 아니고 표를 의식한 막말이 확실히 느껴진다. ‘청년’과 ‘미래’라는 명분으로 시니어들을 핍박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절대 아니다.

시니어들은 지금의 청년이 존재하도록 사회를 발전시킨 장본인들이다.시니어의 개념도 이제 자꾸 달라지고 있다. 100세 시대에는 기존의 청년, 중년, 시니어의 개념도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환갑잔치도 사라지고 칠순 잔치도 안하는 시니어들이 많다. 그들은 장년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에 대해 우리가 흔히들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은 판단이 흐려진다는 주장이다. 경험을 해보니까 판단은 더 명확해지고 오랜 경험에서 무리한 결정보다는 더 합리적인 좋은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 느껴진다. 치매 등에 의한 사고의 노쇠가 있지만 그건 본인이 확실히 알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대학에는 교수의 강제 은퇴가 없다. 스스로 판단하여 80이 넘어서 강단에 서는 교수도 많다. 특히 초일류 대학인 하버드, 스탠퍼드 등에는 이런 교수들이 많다.

나이는 숫자가 아닌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나이로 세대를 구분할 필요도 없고 차별화할 필요도 없다. 같은 사고를 하고 같은 감정을 가진 것이 시니어 세대이다. 이제 100세 시대에 우린 살고 있고 시니어들의 활약도 사회의 중요한 몫이 되고 있다.

“너 늙어보았니? 나 젊어 보았다”는 노래가 생각난다. 나이 들어 보지 않은 청년들은 시니어를 충분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추측으로 세대를 구분하고 혐오하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의 자신들의 이익 계산에 의한 시니어 혐오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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