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시민을 넘어 이제 ‘생태시민’이 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롱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도 사람만의 민주주의가 아닌 지구상의 비인간 생명은 물론이고 무기물까지도 함께 민주주의를 누려야 한다는 ‘생태민주주의’를 이야기 한다.
숲을 개발하는 곳에서 나무들의 편이 되어 톱날 앞에 몸을 던져 막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멸종동물들을 보호하고 강과 숲에게 법적인 권리를 누리게 하는 입법 활동도 생겨나고 있다. 전 지구적 생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지구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짝짝짝. 다 좋다. 찬성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태시민이 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매일 다른 생명을 먹으면서 우리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가능할까?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지 못하면 갑자기 밥이 소화가 되질 않을 수도 있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만물의 영장이라더니 왜 이런 문제 앞에선 동물이래?” 소와 돼지와 닭들이 반격을 할 것 같다.
“동물들을 좋은 조건에서 제 본성대로 살게 하고 도축할 때는 고통을 최소화하면 되지 않을까?”고 하면 “민주주의 하자며? 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날 먹으려고 그래?” 음메에 꿀꿀 꼬꼬댁 난리를 칠 것 같다. “뭐야? 우리가 잘 키워서 먹겠다는데 그게 자연의 순리 아닌가?” 사람들도 불만 아니겠는가? 어렵다. 생태민주주의도 생태시민도 참 어렵다.
죽어서 쓰레기매립장에 버려지는 고래는 관심을 가지고 바다에 데려가서 원래 고래의 죽음과정인 ‘고래낙하’를 하게 해줘야한다는 둥 관심을 가지지만 개와 고양이의 집사노릇은 자처하지만 개를 돌보면서도 삼겹살을 굽고 치맥을 즐긴다. 그러면 하지 말아야 하나? 유엔에서는 공식적으로 지구온난화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지구열대화’를 선언하고 지구에서 인간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시급하게 대응책을 마련해야한고 목소리를 높인다.
식물들은 물론이고 동물과 해양생물들이 난민처럼 자신들의 서식처를 떠나 피난하고 있다고 한다. 난민은 인간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 많던 경북의 사과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다. 동해바다의 수온변화에 어종도 달라지고 있다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오지 않아 굶어 죽는 바다표범들의 모습은 멀지 않은 미래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해서 무서운 느낌마저 준다. 이 혼란을 만든 건 우리 인간이다. 뭐라도 할 수 있는 건해야 하는데 생태시민도 생태민주주의도 어렵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난감하다.
그래서 겨우 생각한 것이 ‘겨우 인간’이다. 우리의 잘못과 우리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심보부터 바꿔보자는 거다. 태생적으로 우리는 훌륭한 인간일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생명을 죽여서 이어갈 수밖에 없는 목숨이라면 최소한 ‘감사하게 먹고 밥값을 하며 살자’는 것이다. ‘생명을 먹어요’라는 책에서 이치다 미치코의 말은 그래서 곱씹어 볼만하다.
우리는 우리가 빼앗는 생명의 의미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는 우리가 먹는 생명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 먹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음식을 남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생명을 먹어요-만만한책방/2022>
용서할 수 없다, 말도 안 된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인치고는 참 단호하지 않은가? 내게 이 말은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차려야 ‘겨우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동이족은 예로부터 다른 생명을 죽여서 내 목숨을 잇는 태생적인 조건을 슬퍼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겸손했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잘 했다고 한다. 콩을 심어도 세알을 심어서 땅속의 벌레도 먹고 새도 먹고 나머지 한 알은 인간이 먹으면 된다고 농사를 지은 민족이다.
야외에서 밥을 먹으면 ‘고씨네’ 하면서 밥을 새나 벌레들에게 먼저 ‘대접’하고 먹었다. 사람이 먹고 남은 걸주는 게 아니라 먹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이니 ‘대접’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생태시민의 마음가짐 아닐까? 상추를 씻다가 그만 상추 한 잎이 떠내려가자 산 아래까지 따라가 상추 한 잎을 건져왔다는 스님들의 식사법인 발우공양은 지구최고의 식사법이지 않은가.
이런 우리 전통을 보면 지금의 생태사상을 뛰어넘는 사상들이 이미 생활화되어 내려왔다. 동학사상을 보면 여자고 어린이고 임금이고 백성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바위 같은 것들도 다 똑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상을 내면화 할 수 있다면 생태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는 ‘겨우 인간’으로 지구의 공동생활자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겨우 인간’ 아니 ‘겨우 겨우 겨우 인간’이다.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