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니어 테니스 대회에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본부석의 경기대진표에는 한 번 지면 탈락하는 토너멘트의 경기결과가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겼는지만 표시하고 스코어가 표시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경기진행자는 모든 다른 시니어 대회도 그렇게 한다고 전한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동호인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면서 스코어 표시를 안 하는 대회를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과거 필자가 진행한 대회는 그렇게 한 적이 없었는데 가벼운 충격이 다가왔다.
스코어가 표시되지 않으면 어떻게 경기가 진행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승자 패자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기록과 보존을 안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포스텍에서 28년간 테니스 동아리 지도 교수를 하면서 매년 거행되는 각종 대회의 결과를 잘 보존하라고 했건만 잘 보존되는 걸 보기 힘들었다. 결국, 일부는 지도 교수가 기록 보존했지만, 학생들도 그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국가적 차원에서의 청와대 기록이나 정부 기록도 잘 보관되지 않아 전 정부의 기록들을 참고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책을 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전 정부의 부서를 폐기하고 생소한 새로운 부서를 만든다. 다행히 이번 정부는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몇 년 전 포항 역사의 상징 포항 기차의 역사(驛舍)는 결국 무참히 부서졌다. 그 부서진 역사 위로 차가 달리지만 허탈감은 너무 심했다. 특히 해병대 출신의 전역 장병들의 가슴은 휑하니 뚫렸다는 소문이다.
눈물과 기쁨,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포항역이었다. 일본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해방과 함께 건축된 포항역사는 거의 100년 가까운 포항의 산증인이다.
필자는 10년 전 2013년 여름 두달 간 드레스덴이라는 옛 동독의 명품도시에서 드레스덴공과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방문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엔 아주 유명한 프라우엔교회 (Frauenkirche)가 있다. 이 교회는 300년 전 지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드레스덴 시민들은 언젠가 재건축될 것을 생각하며 무너진 프라우엔교회의 돌에 번호를 매겨 보관했고, 독일 태생의 한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 기금을 모두 기부해 어린 시절 프라우엔 교회의 기억을 되살리며 10여 년 전 완전 재건축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에 반하여 한국에서는 옛 건물들과 유적지들은 사라지고 있다.
서울의 종로2가에 있던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화신백화점 건물이 사라진 건 큰 충격이었다. 일제시대에 건축되어 옛 건축미를 가지고 있던 그곳은 초현대 건물로 바뀌었다. 중앙청 건물은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폭파시키고 해체하였다. 단성사 국도극장 등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들이 이젠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파리나 런던, 바르셀로나나 리스본 등 유럽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으로 형성되어 있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유럽의 오랜 도시들뿐만 아니라 역사가 일천하다는 미국의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도 방문해 보면 옛날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건물들이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치욕의 역사적 건물, 부서진 역사적 건물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삼고 있다.
심지어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상업도시의 중심 젯다를 방문했을 때, 젯다의 옛마을을 보존하고 있었다. 젯다의 ‘올드타운’이라는 옛마을을 재건축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급격히 발달하는 나라이지만 사우디는 국격으로는 한국에 뒤지는 나라이다. 그런데도 젯다의 옛마을은 비록 세련되게 보존은 하지 못했지만, 옛모습 그대로 놔둔 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역사적 가치란 무엇인가. 반드시 건물이 고풍스럽고 멋있어야 하는가. 그냥 오랫동안 거기에 있던 건물이라면 그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그 건물의 초석은 그 시대의 것이고 건축양식은 좋든 싫든 그 시절 것이다.
진행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폐철도 공원 조성 시 축소된 모형을 건립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모형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왜 한국은 역사를 무시하고 부수고 없애는 것일까 그리고 기록을 보존하지 않는 것일까?
서울의 성냥갑처럼 서 있는 아파트촌을 보면 어지러워지기까지 한다. 요즘은 각 지역도 마찬가지로 황폐해지고 있다. 그냥 부수고 없애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걸 좋아한다.
기록도 하지 않고 옛것을 무시한다. 역사는 무시당하고 있다. ‘기록과 보존을 안 하는 한국사회’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