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잊혀진 민족교육자 홍주일

등록일 2023-03-23 18:21 게재일 2023-03-24 19면
스크랩버튼
홍석봉 대구지사장
홍석봉 대구지사장

경북 청도 출신의 홍주일(洪宙一·1875~1927)은 개화기의 선각자다. 민족교육에 눈 뜬 그는 일본 유학 후 귀국, 교사로 일하며 학교 설립에 정성을 바쳤다.

민족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대구·경북 교육의 사표(師表)이자 민족교육의 선각자로, 항일애국지사로 묵직한 이름을 남겼다.

그는 31세(1906년) 때 일본에 유학한 후 돌아와 평북 옥천학교, 안동 예안학교, 구포 구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 후 대구 협성학교 교사로 대구에 정착했다.

협성학교는 1899년 달성학교에서 출발했다. 1909년 고등과가 협성학교로 바뀌었다. 협성학교는 홍주일이 구심점이 돼 민족교육이 이뤄졌다. 그러나 1916년 일제가 관립 대구고보를 신설하면서 폐교됐다. 1917년엔 명신학교(현재 복명초등) 교장을 잠시 맡았다.

홍주일은 1913년 서상일 등과 함께 1908년 계몽운동을 위해 결성됐다가 활동 중단된 달성친목회를 재건했다. 달성친목회는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2년 만에 강제 해산됐다. 홍주일은 1916년 정운일·최병규·김진만·서상준 등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 부호 서우순의 집에 권총을 들고 침입, 현금을 탈취하려다가 실패했다. 이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돼 홍주일은 1917년 징역 5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홍주일은 서상일이 운영하는 대궁상회 점원으로 일하면서 대구 3·1운동 참여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일제 관헌의 예비검속에 걸려 격리 조치됐다.

홍주일은 1921년 9월 정운기·김영서 등과 대구 북성로 우현서루를 가교사로 사용하는 교남학원(嶠南學院·대륜고 전신)을 설립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대구 유지들이 끓는 피로서 설립한’ 학교라는 기사가 보도됐었다. 그만큼 대구시민들의 기대가 컸다. 홍주일은 6년 간 교남학교 교사로 일했다. 1927년 6월 교남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취임 한 달 여 만에 숨졌다. 당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준비위원으로 선임돼 활동 중이었다. 홍주일의 장례식은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언론은 대구교육계의 은인이 서거했다며 애도했다. 후일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은 ‘스승 홍주일은 사상가였고 애국자·독립운동가였다’고 회상했다.

홍주일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교육 기여 뜻은 종손인 홍영기가 청도 운문에 설립, 경산으로 이전한 문명고등학교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독립운동자료집의 재판 기록과 경북중고등학교60년사 등에 기록이 남아 있어 겨우 그의 흔적을 짚어볼 수 있을 따름이다.

홍주일은 20년 간 교육과 독립운동에 몸바쳤다. 민족교육의 선구자이자 항일애국지사인 그를 국민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역 교육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늦었지만 관련 자료를 확보, 교육박물관 등에 전시하고 그의 헌신을 기릴 수 있길 바란다.

홍석봉의 視角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