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보면서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 기생 홍도다. 그녀의 잃어버린 묘비도 이렇게 돌아올 수 있을까?
1778년생 명기 홍도. 홍도는 정조 임금이 내린 별호다. 100년 전 시대를 풍미했던 기생 최계옥. 시(詩), 서(書), 예(藝)에 뛰어나며 절세가인이었던 여인. 가선대부를 지낸 최명동과 경주의 세습 기생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재주가 영특하고 옛 글에 밝았으며 미색이 뛰어났다. 경주 부윤의 추천으로 상의원(尙衣院)에 들어가 독보적인 가무(歌舞)로 명성을 떨쳤다.
정조의 장인 박상공이 그를 좋아해 외부(外婦)로 삼자, 정조가 그에게 ‘홍도(紅桃)’라는 별호를 내렸다. 홍도는 박상공과 생활하며 고적한 심사를 시로 읊었고, 상공이 죽은 뒤 3년 상을 치르고 경주로 돌아왔다. 경주 악부(樂府)의 종사(宗師)가 된 홍도는 악사와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병을 얻자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눠주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으니, 때는 순조 22년(1822)이고 그녀의 나이 45세였다.
32세에 경주에 내려와 45세 숨지기 전까지 후진 양성에 힘쓴 홍도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사후 30년이 지나 교방의 악공과 제자들에 의해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묘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그 비가 사라지고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다.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서고 애써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담 쪽에 묘가 있었다는 표지판만 세워져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지역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그녀를 기리는 홍도기념사업회가 생겨났다.
납골당에 있던 유골은 건천읍에 위치한 추모공원에 봉안됐다. 그리고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으로서의 그녀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 건립운동을 전개해 금장대 일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또한 이후엔 ‘홍도추모예술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천재적 예인, 가난한 이들을 품은 의인, 후학을 아낀 스승. 최고의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사람 홍도 최계옥.
그가 조선시대 문인이었더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묘가 사라졌을까? 씁쓸한 의문이 들었다. 또한 역사와 문화보다 ‘돈’을 위한 개발이 먼저인 오늘날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다.
/박선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