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기부터 전성기까지<br/>경주 문화재 발굴 역사 산증인<br/>
선생이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명감보다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서였다. 1970년 대는 다들 경제적 빈곤으로 살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시절. 건축학도였던 그에게 발굴일은 적성에 맞았고 그것이 그의 인생이 되었다. 그리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 ‘나의 문화유산 이야기’라는 책에 그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발굴에 대한 장비라던가 지식이 현저히 부족했던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었을 테니 기억에 남는 현장을 말씀해달라 부탁했다.
천마총 발굴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방문 직전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인부 한 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작은 부상이었으나 당시 정권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부랴부랴 사고를 수습한 뒤 대통령의 방문이 이루어졌지만 그때의 긴박감은 지금껏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왕의 잠을 깨워서였을까?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일이 일어났다. 발굴을 한창 진행 중이던 111일째 되던 날 금관총의 금관과 비슷한 금관이 나왔다. 왕의 무덤을 건드려서 주변 일대에 가뭄이 심하다는 눈총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 순간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고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다들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금관을 씻어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밤하늘엔 달이 떠올랐다.
나라의 관심이 쏠린 발굴작업이었던 만큼 언론의 관심도 쏠렸다. 하지만 당시 언론통제가 심했던 시절이라 발굴 관련 사항은 기밀에 붙여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발굴 다음날이면 신문에 떡하니 관련 내용이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 8명의 조사원 중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은 건 유일한 경주사람이었던 남 선생이었다.
그로 인해 조사 작업에서 하루 제외 되었는데 다음날 또다시 신문에 발굴 정보가 올라왔고 덕분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엉뚱한 곳에서 진범이 발각되었지만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되었다.
곡괭이와 삽으로 시작되었던 문화재 발굴 역사의 산증인. 이제 일선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해도 충분할 듯한데 그는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남은 인생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간 쌓아온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문화재 발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경험이라 강조하며 특히 목수와 석공의 의견은 꼭 수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장은 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화재와 함께 한 일생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소년의 얼굴, 순수함이 남아있었다.
/박선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