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백송이의 꽃을 기웃거린다면 그 중 아흔아홉 송이는 ‘그냥’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기웃거린다. 그래서 나비의 비행은 요리조리 자유분방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풍경을 ‘저기를 사서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될 것이다’며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다. 나비처럼 ‘그냥 즐기지’ 못한다. 우리의 감수성은 빠른 속도, 유용성, 수익, 효율성, 경쟁에 익숙해졌고 느림, 유연성, 대화, 호기심, 무용성, 우정 같은 것에 무감각하다. ‘어디로 가기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식의 말을 들으면 뭔가 뒤쳐진 자의 핑계 같아서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얼마 전 소설을 쓰는 친구가 찾아왔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지역의 어느 작은 도시에 방을 얻고 틈만 나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걸어 다닌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도시의 가로수 한 그루, 골목 한 귀퉁이도 다 아름답고 길에서 만나 인사하는 사람들의 친절함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감수성의 근육이 다시 생겨났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다니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느긋한 시간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공간을 제공하는 중이고 한 동안은 ‘자기 자신에게 윤리적인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하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니체도 지팡이 끝에 잉크를 넣어 다니며 걷기가 주는 생각들을 그때마다 휘갈겨 책을 썼다. 빅토르 위고는 걷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고 했으며 평생 도보 여행자였던 릴케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산책은 ‘살아있는 책을 읽는 것’이고 산길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여 그어놓은 ‘자연에 친 밑줄’이라는 것을 많은 예술가들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 걷기는 쇼핑과는 다르다.
프랑스의 비행청소년들을 감옥대신 걷게 함으로서 사회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단체인 쇠이유협회에 따르면 걷기는 내면의 여정 즉 ‘활기-존재감 높이기-신뢰를 쌓는 능력-연대감’을 느낄 수 있어서 오래 걷다보면 결국 자신에 대해 감탄할 만한 일을 발견해 낼 수 있어서 감옥보다 훨씬 교정효과가 높다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음식, 햇볕에 아름답게 빛나는 나무, 등을 밀어주는 바람, 더운 몸을 식혀주는 명랑한 계곡물소리, 힘들 때 함께 부르는 노래. 상상해보면 걸으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상큼하고 향기로운 공기처럼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 안의 퀴퀴하고 어두운 것들을 함께 뱉어내게 만든다.
유럽을 가보면 한적한 공원에 사람들이 의자와 담요를 들고 모여들더니 제각기 의자를 펴고 담요를 무릎위에 올리고 바로 책을 펼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세상에 있는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라 부러워하며 바라본 적 있다. 그리고 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책을 덮고 공원을 산책하며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산책을 하거나 혼자 빠져나가 걷는다. 걷다가 들고 있던 책을 친구들에게 낭송하거나 홀로 암송하다가 잊어버린 듯 자주 펼쳐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펼쳐진 일이라 그 자리에 있던 내가 본 일상적인 풍경이다. 저 여유로움과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의 걷기는 방향을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날며 꽃을 읽는 나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느림이란 더 빠른 박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느림은 시간을 성급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 세상을 넉넉히 받아들이며 인생길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 프랑스의 수필가인 피에르쌍소의 말이다.
한가롭게 걷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옮기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영혼의 숨쉬기를 하라는 말이다. 그런 소소하고 작은 일상을 삶의 리듬으로 만들어 지속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에너지가 된다는 말이다. 우연히 만난 들꽃 한 송이에도 우리는 변화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성장은 더 나은 인간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끊임없이 해낼 때 선물처럼 주어진다. 더 적게 소비하고 더 풍성하게 누리는 ‘대안적 쾌락’은 이제 시대의 요구이다. 그래서 ‘빨리 도착하기’가 아니라 ‘나비처럼 걷기’다.
가을이다. 많은 이들이 가을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산길을 걷는다. 나무라는 책을 읽으러 간다.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고 새들이 끼어들어 ‘이 구절 어때?’ 암송도 해 줄 것이다. 산길을 걸으며 ‘저 풀은 허리에 좋고, 위에 좋고’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솔바람소리에 바람을 꿰어서 헤진 마음 한 구석을 바느질하는 것은 어떤가. 먹과 종이를 들고 소나무 숲에 부는 솔바람소리를 듣기위해 만나고 물감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김치 국물로 단풍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낸 조선선비들의 풍류모임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짧은 가을, 혼자서 하루를 길게 늘여 쓸 수 있는 느리게 걷기를 권한다. 나비처럼 걷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