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절정에 든 모습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커다란 축제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요즘처럼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 사람들의 마음은 본능처럼 달아오른다. 아마도 그것은 붉은색 노란색에서 오는 따스한 느낌이 인간의 몸에 혈류 순환을 돕기 때문 아닐까 싶다.
단풍이란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산천에 나무들이 제 몸에 머금은 물기를 내리고 겨울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나무가 제 몸에서 물기를 내리고 나면 푸르던 나뭇잎에 남은 색깔은 흙의 색깔인 황색과 불의 색깔인 홍색뿐인데 이는 지상의 모든 생명 구조는 물과 불과 흙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자연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의 생이 그 명을 다하면 그 몸에서 물이 제일 먼저 떠나고 그다음은 불의 기운이 떠나고 마지막 남는 것은 흙뿐이라는, 오묘한 생명 구조의 원리를 암시하는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현란하게 불타는 산야의 단풍을 보노라면 지난 여름 어느 축제장에서 본 불꽃놀이가 연상된다. 화구를 벗어나 끝없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다가 그 여력이 다할 때쯤 큰 소리와 함께 현란한 빛을 발산하며 사라지던 그 불꽃은 온 계절을 푸르게 일하다가 그 본분을 다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며 떨어지는 저기 산천의 단풍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축제장에서 산화의 빛을 발하며 생을 마감하던 그 불꽃이나 저렇게 아름다운 회상으로 제 살던 나무와의 작별의 준비를 하는 단풍잎을 보며 우리네 인간의 생(生)이라는 것 또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화려한 빛을 발하며 산화되어가는, 그런 불꽃놀이나 단풍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기권에 존재하는 세상 만물은 태양 볕에 노출되는 그 순간부터 급속히 혹은 서서히 산화되기 시작한다. 그 산화하는 속도가 매우 급속한 현상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불이라 이름 지어 부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산화되는 과정을 생(生)이라 이름 지었고 조금은 느리게 몇 달 혹은 며칠의 시간 안에서 산화되는 현상을 두고 썩는다거나 발효된다고 한다.
산화하는 모든 생명은 탄소배출을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가지는 것과 내어놓는 것에서 균형의 법칙을 적용받고 있다. 흔히 나무가 산소 배출을 많이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나무가 수명을 다하여 산화될 때 그 크기와 삶의 무게만큼 탄소를 배출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자연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해서 사람들이 탄소배출의 책임을 인간 혹은 소 등의 동물류에게만 떠넘기는 것에 조금의 모순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을이면 나는 늘 푸른 바다 그 아래 산다. 사람들이 하늘이라 부르는 저 푸른 수평선 위로 돌고래처럼 튀어 올라 푸른 도시의 주인이 되고도 싶고, 가을 바다에서 만난 온기를 지닌 해양 생물과 함께 푸른 세상을 가꾸고도 싶다. 촌부의 능력으로 어디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 또한 이 계절이 주는 ‘꿈꾸는 특권’이어서 나는 살면서 만나는 여러 개의 가을 중에 하나쯤은 어떤 그리움에 젖어 사는 가을이어도 좋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