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지금 전형적인 ‘진지전’이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진지전은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했던 좌파지식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탈리아 국민의 일상을 통제한 파쇼집단의 지배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내놓은 헤게모니이론에서 나온 단어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은 대중 영향력이 큰 유기적지식인(주로 언론·교육계 종사자)이 진지를 구축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물리적 혁명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람시의 이 이론은 요즘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는 보수·진보 양대 진영이 대규모 집회를 했다. 자유통일당, 신자유연대 등 진보성향 단체들은 ‘자유통일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라는 타이틀로, 촛불승리전환행동 등 진보성향 단체들은 ‘윤석열 정부 규탄’이라는 이름으로 진지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서울 세종대로를 좌우 양쪽으로 갈라 “이재명·문재인을 구속하라”, “정치보복 윤석열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곳곳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마치 나라를 양분(兩分)한 모습이었다.
진보진영에는 민주당 초선 강경파 모임인 ‘처럼회’ 소속 김용민·황운하·민형배(무소속)·양이원영 의원과 안민석 의원 등도 참가했다. 학생단체인 전국학생수호연합은 지난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의 한 중학교 교사가 좌파집회에 학생들이 참가할 것을 종용했다며 그 교사를 선거법 위반혐의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그 교사는 학생과의 통화에서 “석열이 때려잡고 김건희는 감옥으로 보내자고 (집회)하는 거지”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교사가 직접 나서 진지전에 어린학생까지 동원하는 사태가 지금 우리사회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진영의 ‘진지’가 우리 사회 곳곳에 이미 견고한 요새를 만들고 있는 섬뜩한 느낌이 든다. 지난 2019년 고교생들이 교사의 정치편향 교육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정치 교사들이 학생들의 영혼과 정신을 지배하려 한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보수와 진보진영의 진지전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최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되면서 더욱 격렬해지는 것 같다. 민주당 지도부는 현재 이 수사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논두렁시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모두가 일치단결하고 함께 싸워서 이겨내야 될 때”라며 검찰수사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불법대선자금 수사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의 검찰진술에 의해 하나하나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유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지은 죗값은 내가 받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 명령으로 한 것은 이재명이 받아야 한다”고 했다. 유씨는 이 대표의 성남시장 시절 측근으로, 대장동 특혜사건의 핵심인물이다.
우려되는 것은 그동안 우리 국민이 공기처럼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자유민주주의 가치(법과 제도, 질서, 윤리, 관행)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이를두고 ‘권력이 상식적인 것을 비상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비상식인 것을 상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국민을 통제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가 불행하게도 이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